우리의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달려나가는 철학이나 종교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우리의 일상 속으로 내려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높은 세계로 이끌어주는 측면이 함께 있는 조화와 균형을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승불교 출현 이전의 소승불교는 승단 중심으로만 운영돼 초세간적인, 그래서 일상을 포기하는 냄새가 너무 진하게 났습니다. 이에 반해 대승은 범과 성을 함께 돌아보며 세간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일상적인 것을 살려서 그것을 열반으로 향하게 하는 구조, 이것이 『유마경』의 불이(不二)의 틀에서는 아주 소중합니다. 어떠한 대상이 나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나쁘게 말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보는
유마 거사는 방편으로 중생교화를 위해 술집도 가고 환락가도 갔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수행하는 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더럽다고 하는 삶의 무대를 청정하게 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연결하지 못하면 재가불교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 세계에 몸담고 있으나 푸른 꿈을 잃지 않는 중생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며 삶을 풍요롭고 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지혜를 우리 삶속에 옮겨올 때 행복해지고, 불퇴전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수행한다는 것은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 두 세계는 다른 세계가 아니며, 차별 없이 나가는 것이 수행의 과정입니다. 진여문에 도달하는 순간 진여와 생멸 자체를 분별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앉을 자리가 없고,
삶의 현장에서 ‘나’ 찾지 않는 건세상과 마음을 둘로 나눠 보는 것적극적 행동이 활발발한 삶 동력 『유마경』은 “어느 때 부처님이 바이샬리 성내 암라팔리 숲에서 큰 비구 8천인과 함께 계셨는데 모두 아라한 이었다.(…) 또 보살이 3만 2천명으로(…).”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장자의 아들 보적이 500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일곱 가지 보배로 된 일산을 공양하자 부처님이 이를 합쳐서 하나의 일산을 만드니 일산이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었다. 이에 보적이 찬탄하고, 부처님 국토의 청정함을 얻는 것을 듣기를 청했다.(…)”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우선 3만 2천의 보살이 함께 했다고 하는데 숫자에 얽매여 웬 보살이 이렇게 많을까 하고 의심하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시대상을 반영해 경전
『유마경』은 초기대승불교의 경전으로 기원전후 재가보살운동의 역할과 위상을 풍부한 문학적 상징을 통해 전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 이념을 표방하는 한국불교계에서는 재가불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마경』을 홀대하는 듯한 인상이 적지 않다. 이에 사단법인 우리는선우가 성태용 교수의 강의로 9월 29일부터 11월 24일까지 매주 수요일 진행하고 있는 유마경 특강을 지상 중계한다. 편집자 『유마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느꼈던 문제 중 하나는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불자로서 『유마경』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해갈 것인지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도록 강의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저는 재가불교운동의 현장에 몸담고 있으면서 ‘내가 하는 일이
오늘은 화엄경의 여성 선지식을 통해 선지식의 가르침을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화엄경은 일승경전입니다. 일승 화엄을 통하면 출가, 재가, 또는 남녀노소 누구나 선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법을 구하기 위해 찾아간 선지식을 53선지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확히는 54분입니다. 한 장소에서 두 분을 함께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들 중에서 여성 선지식은 21분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의 선(善)은 좋을 선, 착할 선, 훌륭할 선입니다. 중생들에게 수행의 모범을 보이고 또한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재동자와 선지식의 만남을 담은 것이 화엄경의 입법계품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이라고도 하는데 줄여서 보현행원품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품명으로 보
『선요(禪要)』는 선(禪)의 요체를 담은 법문입니다. 즉문즉설(則問則設)입니다. 질문을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한다는 뜻으로 깨달음에 바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중국에 방거사란 분이 있었습니다. 방거사는 “시방동취회(十方同聚會)하야 개개학무위(箇箇學無爲)하나니 차시(此是) 선불장(選佛塲)이라 심공급제귀(心空及第歸)라.”라는 게송으로 유명합니다. 해석하자면 “지금 한 자리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무위의 법을 배운다, 그래서 여기 부처를 뽑는 과거장이니 마음이 공한 도리를 깨달아야 급제해 돌아가리라”는 내용입니다. 요즘도 선방을 선불장이라고 말하는데 부처를 뽑는 과거장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공한 줄, 또 그림자인 줄 아는 것이 공부의 시초입니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가을이라, 공부하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공부하기 좋은 계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을에는 누구나 시인이 되듯이, 가을이 오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생노병사(生老病死)에 대해 참구하게 됩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오늘 이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을 설악산을 오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가을이 오니 좋구나”라고 생각하신 분은 드물 것입니다. 아마도 “벌써 가을이 왔네”라고 탄식한 분들이 더 많으실 것입니다. 인생이 백년, 천년 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구나 하는 인생무상의 진리를 일깨워 주는 것이 바로 가을의 힘입니다.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으로 ‘시의 귀재’라 평가 받는 이하(李賀)는 『숭의리체우(崇義裡滯雨)』란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가을을 노래했습니다. “뉘 집의 자
오늘은 49일간 지내온 영가천도기도를 회향하는 날입니다. 우란분재 또는 백중으로 불리는 오늘은 스스로의 허물을 참회하고 돌아가신 조상님의 넋을 기리며 천도하는 날입니다. 또 선방이나 강원에서 석 달 동안 정진했던 스님들이 안거를 마치고 만행을 시작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천지불능장구재(天地不能長久在)황차소생천지간(況且所生天地間)당당불수음양자(堂堂不受陰陽者)역겁다생자재신(歷劫多生自在身)하늘과 땅도 능히 영원하지 못하거늘하물며 천지 안에 생긴 사람이겠는가.당당히 생사윤회를 받지 않은 자라야억겁 다생에 자유자재한 몸이니라. 오늘 법석은 백중에 맞춰 영가천도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게송은 모든 영가들의 색신과 법신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 게송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육신은 무상한 것입니다.
절은 부처님께서 도(道)를 이루신 후에 도를 펴신 장소입니다. 따라서 선도후사(先道後寺)입니다. 도가 먼저고 그 다음이 절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시기 전에는 절이 없었습니다. 인도의 죽림정사나 기원정사도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이후에 생겼습니다. 절에는 사격이 있습니다. 충남 보령 성주사지의 낭혜백월국사 비문에는 도대행사대성(道大行寺大成)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도를 크게 행하니 절이 크게 성했다는 말입니다. 달리 해석해 보면 사격이 가장 높은 절은 큰 도인이 머무시는 절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물론 도인이 주석한다하더라도 다 같지는 않습니다. 도만 있고 절이 없는 도인도 있고, 도도 있고 절도 있는 선지식도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도는 작은데 절이 큰 경우도 있습니다. 바람
위빠사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네 가지 단계부터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사성제를 가르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 곧 열반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고집멸도 사성제를 모르면, 우리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삼매를 닦아 그 힘으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사성제를 정확하게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할 때 우리는 열반에 도달하고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성제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과 정신의 무더기(五蘊)가 바로 고(苦)입니다. 고의 원인이 되는 갈애가 바로 집(執)입니다. 고(苦)와 집(執)은 여러분이 향상 발전시켜야 할 위빠사나의 대상입니다.
이번 하안거 기간 동안 미타선원에서는 금강경 산림 수행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일 사시예불 때 마다 금강경을 독경하고 지금처럼 강설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이번 산림을 통해 새로운 마음으로 금강경을 읽고 있는데, 참 좋습니다. 늘 함께 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기 어려운 것이 인간사입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심(本心)은 그것이 아닌데, 본심과 어긋나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 때문에 다투면서도 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을까 후회하기도 하고 간혹 자신이 상대방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을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렇게 본심과 다른 말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안타깝고 애처로웠을까요.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본심에서는 아무 말이
최근 한반도의 안전은 국제 사회의 시선이 집중될 만큼 커다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불교에서 말하는 평화와 자비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갖는 연대의식은 ‘상호간에 서로 깊이 의존되어 있다(Interdependence)’는 부처님의 연기(緣起) 설법을 이해할 때 보다 명확히 설명할 수 있으며 또한 보다 안전한 세계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저의 학창시절에 접할 수 없었던 동양의 여러 문화들이 이제는 세계 곳곳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청소년들이 태권도나 스즈키 바이올린을 배우고 성인들은 요가나 명상을 위해 한국이나 태국으로 여행을 합니다. 많은 미국 사람들이 집에 불상을 모시거나 불단을 마련합니다. 이집트나 희랍의 문화가 서구의 역사에 중요한 역
둥글고 원만한 공 하나에 전 세계인이 하나가 되는 시즌이 돌아왔다. 남녀노소, 직업과 종교, 빈부의 격차를 떠나 누구나 붉은 물결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 바로 ‘월드컵’이다. 2010 FIFA 남아공 월드컵을 20여 일 앞둔 가운데 지난 4월 30일 국가대표 예비 명단 30명이 발표됐다. 허정무 감독의 죽비소리 아래 집중수행 같은 경기에 몰입할 월드컵 선수단에는 어떤 선재동자가 포함이 됐을까. 열정어린 플레이를 서원하는 불자 선수 6명을 공개한다. ‘산소탱크’ 미드필더 박지성(2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잉글랜드) 선수는 일찌감치 허정무호의 주장으로 내정됐다. 지난 5월 10일 시즌 4호골을 터트리고 귀국한 그는 세계 무대를 누비는 국내 최고 축구스타답게 최근 시민들이 뽑은 ‘월드컵에서 첫 골을 넣을
강릉 성원사 회주인 여강당 주경 큰스님께서 4월 26일 새벽 홀연히 입적했다. 한해 평균 50여회 이상 법석을 펼치셨던 주경 스님은 이 시대의 설법제일인 부루나 존자로 통한다. 이 법문은 다르마 법우회가 2005년 8월 24일 일산 사법연수원에서 주최한 주경 스님 초청법회에서 설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강릉 성원사 회주인 여강당 주경 큰스님이 4월 26일 새벽 홀연히 입적했다. 해마다 50회 이상의 법석을 펼쳤던 주경 스님의 미소가 평소 스님의 모습처럼 걸림없이 자유롭고 소탈해 보인다. 북풍이 불면 북쪽에서 달려 온 말은 고향 생각이 난다고 합니다. 우리 중생도 고향을 떠난 나그네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법을 바로 알고 행해야 행복한 삶을
육조 혜능 스님과 관련된 오래된 일화가 있습니다. 남종선의 시대를 연 육조 스님은 한때 죽음의 위협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스승인 홍인 스님으로부터 상수제자였던 신수 스님을 뒤로 하고 부처님으로부터 역대 조사로 전해지던 의발(衣鉢)을 전수 받은 것입니다. 함께 수행했던 스님들 또한 이 가사와 발우를 원하고 있었기에 멀리 도망을 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발에 대한 탐욕으로 이글거리던 한 스님은 끝까지 육조 스님을 쫓아왔습니다. 육조 스님은 마침내 역대 조사로부터 대대로 이어지던 가사와 발우를 없애버렸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역대 조사로 이어지던 그 의발이 영원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화가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참 깊습니다. 여러분 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님의 마음
오늘 이 법석의 주제는 ‘수행하면 행복해진다’입니다. 수행을 잘하면 행복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수행을 하면 ‘괴롭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괴로운 것도 사실입니다. 행복과 불행 중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하고자 하는 원력이 있다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심(信心)이며 불성(佛性)입니다. 의심을 하고 부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면 결코 이룰 수가 없습니다. 최근 우리 곁을 떠나신 법정 스님께서는 일생 동안 ‘무소유’를 실천하셨습니다. 법정 스님에게 무소유는 깨달음(法身)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소납은 ‘무소유’라고 표현하지 않고 “우주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일체 생명
세상의 것은 온통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결돼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 내면과 외면, 물질과 정신이 결코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영향을 주는 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나와 너, 아내와 남편, 남자와 여자,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미와 추, 성과 속. 이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입니다. 동전의 양면 같은 그런 관계입니다. 대승불교의 핵심은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여실지견(如實知見)과 여실지견행(如實知見行)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실지견이란 무엇입니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입니다. 사물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지혜라고 합니다. 팔정도(八正道)의 관점으로 보자면 정견(正見)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우리의 삶과 윤회’ 입니다. 불자들은 윤회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깊이 윤회를 믿는지, 정확한 지혜와 지식을 갖고 있는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윤회를 확실하게 믿는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마음을 열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끊임없이 나아갑니다. 우리가 살아야 되겠다고 이렇게 계획하고 실천하기 이전에 삶이라는 형태가 이어집니다. 마치 고지대에 있는 물이 계곡과 강을 따라 바다에 이르러 멈추려고 해도 멈추지 못하고 끊임없이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이 흐르는 원인은 중력입니다. 우리가 삶을 멈추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진리의 근원적인 모습, 일심이라는 진리에
오늘은 ‘운명을 바꾸는 법’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여러분,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참으로 어려운 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으로 바꾸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이지 않은 무언가 획기적인 다른 수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이런 절묘한 방법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요. 불교에는 이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주제가 운명이니, 바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는 운명을 바꾸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잘 아시겠지만 바로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부처님 명호를 열심히 부르는 수행이 있습니다. 기도라고도 하고 염불이라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세상은 보는 시각에 따라 동일한 것도 다르게 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마다 업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연 또한 이와 같아서 같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사람마다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얼마 전 법정 스님께서 입적하셨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양한 기억을 가지고 있겠지만 저는 법정 스님에 대한 남다른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은 비록 저와 짧은 인연이었지만 큰 가르침을 주신 스승입니다. 저는 법정 스님이 입적하시고 상좌가 아닌 스님 중에 가장 먼저 스님의 모습을 접했습니다. 총무원에서 소임을 맡고 있기에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게 됐습니다만 돌아가신 모습은 제가 수십 년 전에 친견했던 그 모습 그대로셨습니다. 차 한 잔을 주시던 그 모습. 어찌 보면 약간은 꼬장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