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성을 비판한다고 해서 복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복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복을 권하셨다. 중아함 제34권의 ‘복경(福經)’의 서문에서, “복을 두려워하지 말라. 복은 사랑스럽고 행복한 것이다. 마음으로 늘 생각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복은 기쁘고 행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복을 사랑스럽지 않다고 생각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라. 마음으로 늘 생각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 왜냐하면 복이 아닌 것은 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틱낫한 스님이 수 백 만 명의 서양인에게 불법을 전한 제1요인은 서양인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행복을 부처님의 말씀을 통하여, 마음 가다듬기 수행을 통하여 느끼고 깨닫게 한 데 있다. 필자 또한 한국불교가 거창한 주장을
산신당을 절 안에 두어 부처님과 함께 산신을 모시고, 관음청과 함께 산신청을 읊는 의례를 지금도 행하는 것처럼 이 땅에서 고유의 신앙과 불교는 하나로 어우러졌고, 그 자체가 한국불교의 특성이 되었다. ‘지금 여기에서’ 재앙을 없애고 복을 불러오려는 샤머니즘적 신앙은 한국인의 소망일 뿐 아니라 집단무의식을 형성한다. 불교만이 아니라 서양으로부터 근대의 여명기에 들어온 기독교 또한 강한 기복성을 내포하고 있다. 교회 신도들의 기도 제목을 보면 자식의 합격, 부모님의 치병, 남편의 승진 등 기복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기에, 역사와 전통으로서 기복성을 부정하는 것은 자칫 나의 정체성, 한국문화와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에 문화유전자처럼 있는 기복성의 성향을 없앤다고 해서 없어지는
신라시대에 왕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소의경전의 구실을 한 구마라집 역본의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을 보면, “1백 구의 불상, 보살상, 나한상 등과 곳곳의 대중을 청해 이 경을 즐겨 듣고 … 1백 명의 법사가 높은 자리에 앉아 1백 가지 향을 피우고 1백 가지 빛깔의 꽃을 뿌려 불법승 삼보의 공양을 하면 … 그대들의 국토를 지키리 … 나라가 어지러우면 귀신이 먼저 난을 일으켜 백성이 혼란에 빠지니 … 또 만일 불의 재난, 물의 재난, 바람의 재난 등 일체의 온갖 재난이 있을 때면 위에서와 같은 법의 쓰임에 따라 이 경을 강독하라. 대왕이여 다만 나라를 지킬 뿐만 아니라 또 복과 덕을 지키는 힘도 될 것이니…”라 적혀 있다. 이 인왕경의 가르침에 따라 신라 최초의 국통인 고구려 귀화승 혜량은 진흥왕 12년
경주 터미널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높이 380미터의 선도산이 보인다. 눈이 밝은 이는 정상 쪽에서 삼존불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 신라 시조 혁거세와 알영을 낳은 어머니, 선도산 성모 사소(娑蘇)의 사당이 있는 산이다. 무열왕릉. 진지왕릉. 헌안왕릉과 이름 모를 고분들이 줄지어 있고, 그 고분군을 지나 오르면 정상 바로 밑에 선도신모 유허지가 있으며, 그 옆으로 1백여 미터 아래쪽으로 위패를 모신 사당인 성모사가 있다. 성모사 옆으로 마애삼존불(보물 62호)이 있다. 주존인 아미타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있다. 이 현장은 불교가 이 땅에 들어와 고유의 신앙과 어떻게 하나가 되었는지, 한국 불교가 왜 기복성을 띠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2,000여 년에 걸친 ‘기억의 주름’이다. “진
바야흐로 입시철이다. 애오라지 자식이 잘되기만 애가 닳도록 소망하는 부모들은 절을 찾아와 부처님께 빌고 또 빈다. 이를 놓칠새라 절들은 합격발원기도 현수막을 내걸고 불안에 떠는 부모들을 끌어들인다. 영험이 있기로 소문난 절은 이 기간 동안 가뿐하게 수십억 원의 수입을 올린다. 하지만, 어느 부처님이 다른 자식을 떨어뜨리고 내 자식만 합격시켜 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실까. 이것은 부처님의 뜻과 어긋난다. 합격발원기도를 부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 생각하면 무지한 것이고,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라 알면서 돈을 받는다면 바르지 않은 것이다. 절이 정녕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고 그 마음에 이르려 수행정진하는 도량이라면, 합격발원기도 현수막을 내려야 한다. 소망을 빌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소망을 빌지 않고 어찌 종교가 성립
사회주의 공동체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위기에 대해 성찰하고 사회는 개혁하였지만 개인의 깨달음이 따르지 않은데 결정적 실패요인이 있었다. 종교 공동체는 개인의 영혼을 거듭나게는 했지만 사회 체제를 개혁하지는 않아 사회와 통로가 열렸을 때 급속히 무너졌다. 대안의 공동체는 개인의 깨달음과 사회 체제의 개혁이 종합된 양식이어야 하며, 이를 잠정적으로 ‘연기적 공동체’라 하자. 연기적 공동체는 구성원 각자가 공(空)사상에 따라 자기를 비우고 타자와 내가 서로 의지처임을 깨달아 서로 상생하는 연기적 주체로서 실존하고 실천한다. 이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종합한다. 마음껏 자신을 실현할 자유를 보장하되, 연기적 세계관에 따라 정의와 평등, 상생의 가치를 지향하도록 한다. 모든 생산수단과 도구는 공동의 소유로 하지
라다크는 불교공동체 대안될 수 없어자본주의 속성 이해 없으면 결국 붕괴 자본주의는 ‘확대 재생산’을 해야만 존속되는 체제다. 자본가는 화폐(M)를 자본으로 하여 생산수단(MP)과 노동력(LP)을 구입하여 생산과정(P)을 통해 상품(C’)을 만들어 시장에 팔아 돈(M’)을 벌어들인다. 이때 M’은 M보다 많다.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가 발생하였고 이를 자본이 착취하였기 때문이다. ①의 노동과 ②의 소비 가운데 하나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체제는 붕괴한다. 하지만, 양자 모두 제대로 작동하여 이 체제는 엄청난 호황을 누리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체제는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한껏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하고, 대중의 탐욕을 무한히 증대시켜 과잉소비를 유발하여 막대한 이윤
이번엔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선 대안과 불교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흔히 자본주의를 부정하면 ‘좌파, 빨갱이’ 등으로 매도한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자본주의식으로 산다는 것은 반불교적이다. 진정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자본주의를 용인도, 수용도 할 수 없다. 타인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는 것이 자본주의인데, 부처님은 그 반대로 보살행을 행하라 하셨다. 끊임없이 확대재생산을 하여 탐욕을 증대하는 것이 이 체제의 원리인데, 부처님은 탐욕을 없애라 하셨다. 물질에 휘둘려 물화와 소외를 심화하는 것이 이 양식의 특성인데, 부처님은 그 망상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함과 깨달음에 이르라 하셨다. 혹자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는 인정하는데, 자본주의를 넘어선 체제가 가능하냐고 묻는다. 100여년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선 것은 다음 호로 미루고, 이번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이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방편을 모색하자. 이는 재산을 증식하면서 삼업(三業)을 짓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소외는 사물과 인간을 교환가치로 대체하는 데서 비롯한다. 마땅히 팔정도를 지켜 정념(正念)을 이룰 일이다. 정념에 도달하여 여실지견(如實知見)으로 사물과 인간을 바라보면 교환가치에 얽매여 일어나는 탐·진·치도 사라진다. 하지만, 문제는 시장에 있다. 홀로 수행할 때는 이것이 가능하지만, 시장체제에 얽혀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교환가치에 이끌리고, 이는 이기심과 탐욕을 낳고, 결국 소외를 야기한다. 이 경우 내 앞에 교환가치가 침투하지 못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을 만날 때 이해관계를 떠난 도반으로 만나고,
이처럼 자본주의는 잉여가치를 착취하고 인간 소외를 심화하고 탐욕을 증대하며 자연을 파괴하고 실업자를 늘리며 빈부격차를 심화한다. 나아가, 더 많은 자본을 가진 자가 자본 증식에 유리하기에 독점을 강화하고 결국 공황을 부른다.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사람들이 탐욕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단 돈 몇 만 원을 가로채려 하룻밤에 서너 명의 주부를 죽인 사람도 있다. 더 많은 이윤을 취하려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전쟁과 학살을 벌이는 자본가도 있다. 심지어 돈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 예술가, 지식인, 종교인조차 물신(物神)을 섬기며 인간성과 양심과 진리를 내던지는 일을 다반사로 여긴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모든 대중도 마찬가지다. 불교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을 살라, 아예 탐욕을 버리라 가르친다. 필자 또한 많은 부
비약엔 늘 대가가 따른다. 한국사회의 사회문화적 모순의 근저에 비약으로 인한 문화지체(cultural lag)가 자리한다. 한국사회는 서양에서 300년이 넘게 걸렸던 자본주의화와 근대화를 수십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룩하였다. 이로 한국사회는, 몸은 성인으로 성장하였는데 정신은 아직 유아에 머물고 있는 아이처럼, 물리적인 환경은 발전하였는데 그에 부합하는 새로운 가치가 아직 정립되지 못해서 생기는 문화지체로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근대성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합리성(rationality)인데, 세계 10위권에 이르는 경제대국인 한국에서 기업은 물론 대학과 시민단체에서조차 학연, 지연, 혈연이 권력을 행사할 정도로 전근대적이다. 포스트모던을 말하기 전에 근대성을 완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취
이처럼 일정한 윤리규범에 부합하는 한 재산의 획득과 증식은 정당한 것이며, 나와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성자에게 공양할 수 있는 길이다. 그럼, 근본적으로 불교는 노동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박경준 교수와 종명 스님의 연구를 빌리면, ‘잡아함경’에서는 “종종(種種)의 공교업처(工巧業處)로 스스로 생활을 영위하라.”라고 말한다. ‘숫다니파타’에서는 “밭갈이는 이리 이루어지고 감로의 과보를 가져옵니다. 이런 농사를 지으면 온갖 고뇌에서 풀려나게 됩니다.”라고 말하였고, ‘유마경’의 ‘방편품’에서는 “법을 굳게 지키어 어른들과 어린이를 가르치며, 모든 생업의 경영이 순조로워 세속적인 이익을 얻지만 그것에 기뻐하지 않았다.”라고 했으며, 또 ‘법화경’의 ‘법사공덕품’에서도 “그가 설하는 모든 법이 그 뜻을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