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아일여(梵我一如)란 무엇인가. 우주적 자아인 브라흐만(Brahman)과 개체적 자아인 아뜨만(Ātman)이 동일하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불교가 출현할 무렵 일부 바라문교의 현인들은 변화하는 현상계 너머에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가의 문제에 천착해 들어갔다. 현상 세계의 번잡스러움과 덧없음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들은 그것을 앎으로써 다른 모든 것들을 알게 되는 단 하나의 근원적인 실재를 추구하였다. 그 결과 현상계의 다양한 사물들을 포함하여 모든 신들의 의지처가 되는 근본 원인인 브라흐만 개념을 고안해 내기에 이른다. 브라흐만은 모든 존재의 배후에 혹은 그들 안에 내재해 있다고 믿어졌다. 현상계의 차별적인 모습들은 브라흐만으로부터 유래된 환영에 비유되곤 하였다. 혹은 브라흐만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의
금욕주의란 무엇인가. 세속적인 명예라든가 이익을 추구하는 따위의 욕심을 경계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에 이르려는 종교적·철학적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초기불교 또한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의 전반적인 색채가 출세간의 금욕적 삶을 지향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중생들의 삶이 탐욕과 갈애로 인해 갖가지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고 가르쳤으며,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 그것을 가라앉히는 수행을 일차적인 과제로 인식하였다. 초기불교의 궁극 목적인 열반(涅槃) 또한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된 경지로 묘사되곤 한다. 불교가 출현할 당시 바라문교나 자이나교에서도 금욕주의를 가르쳤다. 바라문교의 금욕주의는 제식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그들은 제사의례와 관련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제사란 불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불교가 출현할 무렵 고대 바라문교는 인도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바라문교의 실천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제사의례이다. 제사는 신(神) 혹은 초월적 존재에게 감사의 마음을 올리거나 은총을 구하고자 행해졌다. 당시 사람들은 제사가 자연계의 운행과 질서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엄격한 절차의 제사를 인간의 운명이라든가 길흉화복에 연결시켰다. 제사의 실천은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했고, 그것을 담당하는 바라문은 최고 재배계급의 지위를 누렸다. 제식주의란 제사에 대해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형성된 형이상학적 경향을 가리킨다. 바라문들은 일정한 절차에 따라 의례를 행하면서 그것이 반드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가르쳤다. 제사는
불교와 비불교는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불교는 인도에서 출현했으며 당시 유행하던 여러 종교·사상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중 하나가 고대의 바라문교이다. 바라문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전에 형성된 베다(Veda)라는 문헌에 근거한 종교이다. 바라문교의 계승자들은 이 문헌을 ‘신(神)이 직접 전하는 말씀’으로 간주하고서 자신들의 종교적 실천을 위한 준거로 삼았다. 바라문교를 뒤이은 오늘날의 힌두교 또한 베다를 가장 권위 있는 성전으로 받들면서 ‘인간에 의해 전승된 가르침’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베다는 자연의 신비에 대한 고대인들의 경외감과 찬탄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그들은 우주의 혼돈과 무질서를 넘어 그것 이면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본질적인 무엇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자연현
현존하는 불교 전통을 지역별로 나눈다면 어떠한 형태가 될까. 크게 남방불교와 북방불교라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남방불교는 스리랑카·미얀마·태국 등에서 전해 내려온 불교이다. 반면에 북방불교는 중국·한국·일본 등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불교를 가리키며, 여기에 티베트와 몽골 등의 불교를 포함시킬 수 있다. 남방불교는 스스로에 대해 상좌불교 혹은 빨리불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며, 북방불교에서는 대승불교라는 이름을 더욱 선호한다. 이처럼 상이한 명칭들은 특정한 지역과 시대 그리고 문화적 배경의 차이를 포함한다. 세계의 종교사에서 불교만큼 고유의 색채를 흩트리지 않으면서 다른 이질적인 문화를 탄력성 있게 수용·발전해 온 종교란 찾기 힘들다. 이것은 붓다 당시부터 상대방의 됨됨이에 따라 거기에 걸맞은 가르
초기불교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또한 초기불교와 그 이후 형성된 불교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붓다에 의해 직접 주도된 불교를 두고 우리는 흔히 초기불교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근본불교라는 이름을 더 선호한다. 또 다른 일부에서는 원시불교, 소승불교, 상좌불교, 빨리불교 등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명칭들은 제각기 나름의 이유와 근거를 지닌다. 근본불교란 모든 불교적 가르침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표현이다. 이 명칭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부파불교, 대승불교 등의 역사적 흐름이 근본불교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 초점을 모은다. 그들은 근본불교의 시대적 범위를 붓다와 그의 직제자들에 의해 남겨진 불교로 한정한다. 그런데 근본불교라는 명칭에는 그 이외의 다른 불교는 근본적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은 어떠했을까. 그는 스스로의 임종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또한 어떤 자세로 임하였을까. 우리는 붓다의 마지막 모습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며, 그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할까. 붓다의 최후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붓다의 열반은 그가 가르친 무상(無常)의 진리처럼 육신의 덧없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참된 진리란 결코 단절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우기도 한다. 우리는 이천오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대반열반경’은 3개월에 걸친 붓다의 마지막 행적을 소상하게 전한다. 벨루와가마라는 곳에서 위중한 병에 걸려 고통을 겪던 붓다는 “비구 승가에게 알리지도 않고 반열반에 드는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
붓다의 최초 설법은 어떠했을까. 항상 모든 사람들을 감복시키는 탁월함을 보였을까. 붓다의 전법은 깨달음을 얻은 이후 여든의 나이로 입멸에 들 때까지 쉼 없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문헌에 따르면 그의 최초 설법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그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만한 첫 번째 인물들로 한때 자신에게 요가를 가르쳐 주었던 알라라깔라마와 웃다까라마뿟따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들은 연로하여 이미 죽고 없었다. 그러자 그는 한 동안 도반으로서 함께 고행을 닦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을 생각해 낸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기 위해 먼 전법 여행에 나선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었던 곳과 다섯 수행자들이 머물던 지역은 상당히 떨어진 거리였다. 그는 그곳으로 가던 도중 어떤 외도 수행자를 만나 가르침을 설
붓다는 무엇을 가르쳤을까. 그의 가르침은 과연 어떠한 특징을 지닐까.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의 게송을 읊었다.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 왜 내가 가르쳐야 하는가. 탐욕과 분노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깨닫기 어렵네. 흐름을 거슬러가고 오묘하고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를 보기 어렵네. 어둠에 싸여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 이것을 읊고 나서 붓다는 전법(傳法)을 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그의 가르침이 다른 사람들에게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우려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또 다른 상처와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였다. 붓다는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요인으로 탐욕과 분노를 꼽고 있다. 이점은 그의 깨달음이 단순히 이
붓다는 과연 무엇을 깨달았을까. 우리는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한다. 또한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깨달음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에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할 때 올바른 실천에 전념할 수 있다. 물론 깨달음의 문제를 놓고서 입으로만 왈가왈부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면 바른 실천이란 아예 존재할 수 없다. 붓다는 스스로의 깨달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진적 과정으로 언급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완전한 지혜(aññā)의 성취가 단번에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와 반대로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
붓다의 출가와 수행 여정은 어떠했는가. 유년기의 붓다는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로 묘사된다. 그는 유복한 환경 속에서 살았지만 감각적 쾌락에 매몰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의 덧없음과 권태로움에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그가 살던 도시의 네 성문 밖으로 나가 인간의 생로병사를 차례대로 목격했다고 한다. 동문에서는 나이 든 노인을, 남문에서는 병들어 괴로워하는 환자를, 서문에서는 싸늘히 죽은 시체를, 북문에서는 출가 생활을 하는 사문을. 이러한 경험은 인간의 삶이 괴로움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자각을 일깨웠고 또한 먼 훗날 출가를 선택하게 된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붓다의 전기는 그의 인격적 성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기질적으로 그는 세속적 성공이나 출세를
붓다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는가. 우리는 붓다의 행적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또한 거기에서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붓다의 초상은 보는 이의 눈높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그려질 수 있다. 일부에서는 불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교주로 부른다. 다른 일부에서는 해박하고 냉철한 사상가 혹은 철학자 정도로 이해한다. 또 다른 일부에서는 초능력자 혹은 신(神)적 존재로까지 묘사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상담가·명상가·심리치료가 등의 여러 수식어들이 뒤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다채로운 그의 행적은 어느 특정한 명칭만으로 그의 삶전체를 드러내는 데에 부족함을 느끼게 만든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붓다는 샤캬족 출신으로서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오늘날의 네팔과 인도 국경 부근에서 왕족 계급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진리란 무엇인가. 인류 역사상 무수한 종교가 혹은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제각기 진리를 역설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오직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그들 중에서 어느 하나가 옳다면 필시 다른 나머지는 저절로 거짓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가르침을 참된 진리로 받들어야 할까. 도대체 진리와 진리 아닌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무수한 제각기의 진리들을 보면서 오히려 당혹해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방향을 가늠해야 할까. 과연 무엇에 의지하여 거칠고 험난한 인생길을 헤쳐 나가야 할까. 붓다는 이와 같은 문제를 첨예하게 의식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까지 전해져 내려온 여러 유형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정통해 있었다. 최초로 결집된 경전인 ‘범망경
▲초기불교 순례 초기불교는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역사적 사실만을 말하자면 2500년 전쯤 인도에서 시작되었으며,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인물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주도된 개혁적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남방의 상좌부에서는 바로 이것만을 순수한 불교로 간주하고서 그 이외의 가르침들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불교라는 흐름이 시작된 최초의 발원지로만 여기고서 오히려 그 이후에 성립된 가르침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한편 더욱 후대의 밀교 등에서는 초기불교의 역사성에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석가모니 부처님 또한 비로자나불의 한 화신(化身)으로 간주할 뿐이다. 세계의 종교사를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