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 대승보살의 결정적 중요성은 이타(利他)로써 자리(自利)하는 삶, 다른 이들을 치유함으로써 스스로 치유하는 삶의 등장이다. ‘바즈라드흐바자(Vajradhvaja)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보살은 (다음과 같이) 결심한다: 모든 고(苦)의 짐을 내가 짊어지겠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견뎌낼 것이다 … 그리고 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모든 존재의 짐들을 짊어져야 한다 … 나는 이 세상 만물을 생로병사 윤회의 공포로부터 구출해야만 한다. [‘Conze et. al. trans’, 19
사람이 태어나면, 태어나는 그 자체로 존귀하다. 그런데 이렇게 태어난 ‘자연인’이 사회의 한 구성원인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 교육을 하는 과정이 초중등교육이다. 나아가 전문적인 직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소위 고등교육과 대학교육을 받는다. 승려사회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마을공동체 즉 ‘가(家)’를 떠나 출가공동체 즉 ‘승가(僧伽)’ 속으로 들어간다. 역시 승가의 일원으로 수행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이 필요하다.현재 조계종의 경우를 보면 우선 ‘사미(니)’ 생활을 4년 하게 된다. 이 4년간의 교육을 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식탁에서 어른이 숟가락을 들기 전에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애들이 사진을 찍어야, 부모도 먹을 수 있는 시절이 됐다. 사진 찍기 전에 먹다가 음식이 흐트러지면, 자녀에게 한 소리 듣는 것이 낯설지 않은 희한한 세상이다.개인적으로 음식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분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직접 만든 음식이라면, 당연히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식당의 음식이란, 누구나 가능한 전혀 나만의 특별함이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 아니 어떤 면에서는 음식값을 지불하면서, 식당의 홍보
‘영원할 것’ 같았던 이승만 정권이 1960년 4월 4‧19혁명으로 무너졌다. 1년 뒤에는 육군 소장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이 물러나고, 군인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를 통제하는 ‘군사독재 시대’를 맞았다. 이런 상황 변화는 그때까지 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개신교인들을 통한 개신교의 정치 참여 전략에 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그 첫 번째 배경은 1951년 초부터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에만 특혜를 주며 시행된 ‘군종장교(군목과 군신부) 제도’에 있었다. 5‧16쿠데타
불가에서 전해오는 흥미로운 얘기가 있다. 신라 말에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강릉에서 평창으로 생필품을 팔아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다. 어느 날 대관령을 넘어 평창으로 향하는데 고개 중턱 길가의 숲속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노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청년은 호기심이 일어 물었다.“스님, 이런 곳에 앉아 무엇을 하십니까?” “중생들에게 공양하고 있다네.”청년은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다.“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내 옷 속의 이와 벼룩이 피를 먹고 산다네. 내가 움직이면 그놈들이 음식을 못 먹을 게 아닌가?”그 말에 깊은 감동을 받은
가을장마가 진다하더니 비가 온다. 잠시 비가 그친 틈을 타서 밖으로 나선다. 봉은사 경내의 풀숲에서 풀벌레가 울고 아직 지지 않은 연꽃잎에도 젖은 가을빛이 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지 간에 계절은 제 할 일을 해야겠다고 뚜벅뚜벅 순환의 걸음을 걷고 있다. 우리도 그래야 하지만 얽히고설킨 세상살이에서 그리 안 되는 것이 사실이다.예상보다 절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갔고 백중기도 회향을 준비하는 모습들이 분주하다. 전각마다 걸음을 멈춰 문밖에 서서 반 배로 삼배를 드리며 경내를 한 바퀴 돌았다. 굳게 닫힌 판전 문 앞에는 비둘기 한 마리
울산에 살고 있는 어느 거사님이 최근 사업에서 큰 손해를 입고, 공장을 폐쇄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모든 어려움이 자신의 업이 두터워 일어난 것이라 생각하고, 한달 전부터 자비도량참법 100회 독송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지만, 혼자서 기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여러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신통하다’는 기도 종류를 계속 추가하다 보니, 여러 가지가 뒤섞인 기도는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무속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그의 절박함은 오히려 번뇌가 되었고, 생활은 허공에 뜬 것처럼
헌법 제20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제2항은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이다.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에 대한 간결한 조항임에도 인류의 전 역사를 관통하는 경험이 녹아 있다. 과거 종교의 국가 지배나 종교간의 갈등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정교분리 조항으로 종교의 정치활동은 제약받는가. 아니 종교는 정치에 이미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불교, 개신교, 가톨릭의 인구가 국민 전체의 반에 해당하는 상황 자체가 이미 정치와 종교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준다.불교는 한반도에 들어올 때부터
개학을 앞두고 책장을 정리하다가 노란 표지의 자그마한 책 하나를 잡고서 다시 보고 있다. 1973년 봄 ‘신동아’ 논픽션 공모에 당선된 글을 ‘여시아문’에서 2000년에 출판한 책으로 지허(知虛) 스님의 ‘선방일기’이다. 이 책은 서울대 출신의 지허 스님이 오대산 상원사 선방에서 동안거 기간에 경험하고 느낀 점을 일기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36명의 선객들이 음력 10월15일에서 1월15일까지 3개월 동안 어떻게 참선하고, 어떻게 생활하고, 또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솔직 담백하게 잘 그려져 있다.10월25일 ‘선객의 운명’이란
Q. 저는 5년 전에 퇴직한 65세 남성입니다. 평생 아끼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 대학 보내고 결혼할 때 전셋집을 얻어주니 남은 건 지금 살고 있는 집 한 채와 모아둔 돈 조금뿐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큰아들이 사업을 하겠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그만한 여유가 없다고 얘기했지만 오히려 아내와 둘이 지내는 집을 줄이면 어떻겠냐고까지 하더군요. 물론 아들도 결혼하고 잘 살아보려 애쓰고, 이런 얘기를 하기까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 지금도 소일거리라도 찾으며 애쓰는데,
얼마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임종의 순간이 가까웠을 때 불필요한 의료적 처치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표명을 미리 해두는 것이다. 판단이 어려울 때를 대비하여 지금 미리 판단해두는 것은 필요하다. 죽음은 외면하고 있을 때에야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것.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죽음도 예의바른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올 것이다. 안락사는 팽팽한 논란의 주제다.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면 언제 죽는 것이 가장 최적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만약 판단한다면 기준은 무엇이 될까? 우리
승이 익주의 숭복지 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걸림이 없이 확 트인 말씀입니까.” 숭복지 화상이 말했다. “혀가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숭복지 선사는 숭복원지(崇福院志)로서 익주(益州)의 숭복원(崇福院)의 연교지(演敎志)를 가리킨다. 그 법계는 약산유엄-선자덕성–협산선회-반룡가문–숭복원지이다.본 문답에서 언급하고 있는 말씀이란 언설로 성취되어 있지만 일체를 포함하고 있는 법어를 가리킨다. 본래 선수행에서 언설이란 불립문자로 일종의 수단과 방편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언설이 그처럼 단순한 기능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