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비중 있게 다루던 사안이었지만, 앞으론 가급적 다루지 않기로 한 기사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한가지를 거론해볼까 합니다. 새 정부가 출범하거나 전면적인 개각을 할 경우, 발탁된 내각의 각료 중에 불자가 너무 적어서 종교인구 대비로 견주어볼 때 종교형평 원칙을 벗어난 편향적 인사라는 유형의 기사 말이지요. 이런 기사는 불자들에게 피해의식만 길러줄 뿐이고, 더 급한 것은 불자인재를 양성하는 시스템의 구축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정부가 단행한 첫 조각에서도 이런 시비는 어김없이 재연됐습니다. 선거운동 중에는 그렇게 종교형평을 외치더니 이렇게 됐다는 식의 푸념이 교계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요. 그 때 정부측이 보인 반응은 대개 이런 것이었습니다. ‘종교 편향적 인사를 한 게 아니다.
무릇 종교는 말 그대로 으뜸 되는 가르침이다. 본디 종(宗)으로 한역된 범어 또한 궁극에 이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일까. 불교의 가르침은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깨우침을 준다. 일할 권리 요구할 근거 일각에서는 불교가 새로운 문명의 반석이 될 것이라는 풀이도 나오고 있다. 일찌기 아놀드 토인비가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을 현대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꼽은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에서 선(禪)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곰비임비 늘어나고 있다. 자연은 물론 사회와 사람을 두루 황폐화시킨 현대 문명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평을 서양인들 스스로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사회의 부익부빈익빈을
‘김태복’이란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김태복 장군’이라고 하면 기억을 되살리는데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래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분을 위해 간단한 설명을 한다면, 6년 전 교회(6개소)와 성당(1개소)만 있는 부대에 ‘호국 백일사’라는 법당을 지었다는 이유로 기독교 신자인 부하의 거짓된 진술로 의해 억울하게 군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불자장군입니다. 며칠 전 인사동의 한 막걸리 집에서 김 장군을 만났습니다. 그 동안 월 1∼2차례 안부와 근황을 살펴온 터라 답답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긴 했지만 불자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진지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만큼 직접 그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그 의연한 자세는 여전했지만, 눈가에 스치는 서운함, 또 고통스러움의 기운까지는 사단
교계청소년 단체들이 청소년 포교를 목적으로 앞다투어 만든 인터넷 사이트. 요즘 그 사이트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먼저 든다. 사이트를 처음 개설할 때 가졌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제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교계 단체들은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하면 청소년들이 좀더 적극적인 신행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인터넷이라는 특성상 멀리 떨어져서도 다양한 신행 활동을 공유, 체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불교관련 지식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청소년들이 당면한 신행문제 상담과 그에 대한 답변이 이루어지는 ‘인터넷 신행지도’도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처음에는 서울에 있는 청소년과 부산에 있는 청
요즘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사람은 히딩크감독일 것이다. 한국축구의 세계 4강진출 신화를 이룩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기껏 16강을 염원해온 우리나라가 4강진출의 위업을 달성하자 그의 축구경영을 연구해서 기업에 원용하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소위 ‘히딩크식 경영’이 그것이다. 히딩크식 경영은 쉽게 말해서 기본에 충실하고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는 선수선발에 있어 학연, 지연 등 한국의 고질적인 병폐인 연고주의를 완전히 배제하고 선수조련, 팀 운영 등에서 과학적인 축구를 시현했다. 적(유럽팀)과 비교해 떨어지는 체력을 보강하고 선수를 적재적소에 제때 선발해 뛰게하는 용병술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리더십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중국 춘추시대의 손자병법을 원용했다
모임, 단체, 협회…이런 데서는 이런 데를 주도하고 운영해 나가는 몇 사람이 있고, 그 몇 사람 중에 우두머리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런 몇 사람과 그 우두머리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영리를 추구하는 데 있는 것이다. 사회의 그늘진 곳을 향해 헌신하는 고마운 단체들은 제외하고서 말이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들은 그들의 속성상 더 많은 영리를 추구하게 되고, 그러기 위해선 어차피 무리가 생기게 마련이다. 십 원을 챙겨야 마땅하고, 십 원으로도 충분히 먹고, 마시고 자고 할 수 있음에도, 그들은 백 원을 탐낸다. 이런 행태 때문에 이 사회는 망가지고 이들이 내뿜는 악취와 이들이 쏟아내는 오물 때문에 병들고 피폐해진다. 따라서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이들의 꽁무니를
작년 한 해에 북한을 이탈하여 우리 나라에 입국한 사람이 1141명이나 된다. 예년에 비해 엄청나게 증가한 숫자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한국에 입국을 희망하는 북한이탈주민이 적게는 3만 명(정부추정)에서 많게는 30만 명(민간단체추정)이라는 것이다. 북한이탈주민이 증가한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 보면, 북한붕괴의 전주곡이며, 신호탄일 수도 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정책개발과 함께 그들의 성공적 정착을 위해 사회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접근방식이 사회복지 차원의 인간적·동포애·삶의 질 추구의 맥락이 아니라 남북관계 내지 통일정책의 시각에서 집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광의적 법해석학적 입장에서
우리 인류가 겪은 두 가지 큰 변화는 농경시대에서 산업화시대로 가는 산업혁명과 산업화 시대에서 정보화시대로 가는 정보혁명이다. 정보혁명에 의한 환경변화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보화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인 변화이고 여기에서 파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세계화와 인간화이다. 이 세 가지 변화는 세 가지 죽음을 가져오고 있다. 정보화는 거리가 죽는 시대이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도 즉각적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1:1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제 생산자에게는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을 파악하여 만들어 줄 수 있는 경영이 요구된다. 불교계도 정보화에 박차를 가하여 신도 및 국민들과 인터넷을 통해서 접점관리를 강화해 나가야 할뿐만 아
6월 15일 경기도 북한산 관통도로 건설로 인한 환경파괴를 막기 위해 스님과 불자들이 농성 중인 송추 철마선원에 법정 스님이 방문했다. 승려로 위장한 폭력배들의 난입을 겪은 뒤라 세간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스님의 방문은 현장에 있는 불자들에게 큰 힘이 됐다. 이날 스님의 송추 철마선원 방문은 농성을 이끌고 있는 불교환경연대 대표 수경 스님의 간곡한 부탁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법정 스님의 송추 농성장 방문을 계기로 조계종 총무원의 일간지 사대주의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조계종 기획실이 무슨 비밀스런 작전이라도 펼치듯이 스님의 방문을 일간지에만 알리고 불자들과 교계 신문에는 전혀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보를 전담했던 기획실 관계자는 교계 기자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매체
10월 11일 미국 의회는 무력사용을 반대하는 국제여론에도 불구하고 1964년 베트남 전쟁수행을 위한 '통킨만 결의'보다 막강한 이라크에 대한 포괄적인 전쟁권을 부시 대통령에게 부여하였다. 베트남 전쟁에서 팍스 아메리카나는 미국의 건국정신과 위배된다 하여 세계 젊은 학생들의 저항을 받아 상처를 입었다. 이제 9·11 테러 이후 아프간 전쟁에 이어 미국은 발리섬의 테러공포 와중에서 두 번째 전쟁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세계질서)는 또 한 번의 시험대를 맞이하고 있다. 본래 그들이 추구한 신세계의 꿈은 영토확장과 결부되어 19세기까지 대서양과 태평양에 걸친 대영제국과는 다른 양양국가(兩洋國家)가 되었다. 특히 1865년 노예해방의 남북전쟁은 미국국민의
어느 커다란 섬에 일정한 수의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자. 그리고 그 섬은 목초지가 잘 발달되어 있고 기후가 맞아 목축업을 하기에 적당하고, 그래서 섬에 사는 사람 모두가 목축업을 한다고 하자. 이 때 어떻게 하면 그들 전체가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 이는 게임 이론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문제이다.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되도록 많은 동물을 키우는 것이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이 점점 더 많은 동물을 키우게 되면, 섬의 크기가 무한하지 않은 한 목초지가 고갈되게 되고 결국에는 모든 동물이 어느 날 같이 죽게 된다. 경제적으로만 보더라도 이익의 정도가 점점 증가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파산에 이르게 된다. 어떤 집단이 있다고 할 때, 개인의 이익이 전체의
온 나라가 도로건설 때문에 들끓고 있다. 서울에서는 북한산 관통도로 때문에 사부대중 100여명이 3보1배를 하면서 급기야 수경 스님과 성타 스님이 탈진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부산에서는 경부고속도로의 천성산·금정산 터널통과 때문에 내원사 비구니 스님들의 3보1배가 부산시청광장에 계획되고 있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현실을 볼 때 모든 도로가 다 산을 우회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2000여 년의 자연과 문화를 가진 북한산 국립공원이나, 20여 개의 고산늪지와 희귀 동식물이 있고 원효 스님의 역사가 숨쉬는 천성산, 부산의 진산 역할을 하는 금정산의 가치를 어떻게 몇 십 여분의 빠름과 바꿀 수 있겠는가? 몇 십 여분만 늦어진다면 이 모든 것들을 손상시키지 않고 우리가
교계 인터넷 사이트의 게시판이 불교와 스님을 비방하는 글과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추문 등으로 얼룩지고 있다. 모든 글이 그렇지는 않지만 일부 교계 사이트 게시판에는 명예 훼손성 글에서부터 특정인이나 단체를 아무런 근거 없이 공격하는 글, 불교를 맹목적으로 비방하는 '막 글'이 올라 네티즌 불자들에게 '저질 사이트'란 이미지를 심고 있다. 이처럼 인터넷 게시판이 '저질 글'로 도배되는 것은 '익명성' 때문이다.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다'는 강점이 마구잡이로 글을 써 대는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교계 한 사이트 게시판의 경우 별다른 이유 없이 '스님은 사기를 쳐도 되느냐, 이 ×놈아'라는 글이 여과 없이 게재돼 있는가 하면 한 종단의 게시판에는 7개월 째 이 종단 중진급 스님의 사생활을 들추는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아함경]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만일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톱날로 어떤 도둑이나 악한들이 나의 사지를 끊는다 할지라도 그 때에 그 마음이 어지럽고 성낸다면 이것은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아니다. 비구는 이와 같이 나에게 어떠한 비난과 모욕의 말을 더하는 사람이 있을 지라도 그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우며 이와 같이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넓고 끝없는 사랑과 성냄이 없는 마음으로 채우기를 수련해야 한다. 수행자 신분 박탈 안될 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말한 이 톱날의 비유를 늘 생각하여라. 그것은 길이 그대들에게 이익과 행복을 가져오리라.”‘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마치 서양 종교의 전매 특허인 듯이 오해되고 있지
기독교 국가인 독일에서 교회와 성당이 텅텅 비어가고 있는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소식이 아닙니다. ‘서구에 선불교가 전해진 것이 20세기의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언급한 아놀드 토인비의 말이 아니더라도 유럽에서의 불교바람은 엄청난 위력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서구에서 기독교, 그러니까 전통적인 종교가 쇠퇴하는 주된 이유는 ‘에조테릭(Esoteric, 비밀스러운 의식)’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형태의 ‘유사종교’(독일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와 영적 체험을 제공하는 ‘대체종교’들이 대중의 욕구에 부합하지 못해온 전통종교의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 최근 한 시사주간지는 개점휴업 중인 독일의 전통교회를 다룬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이 보도에 따르면, 현재 독일에서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사람들
최근 들어 불교계 각 종단의 행보가 원융화합의 정신을 상실한 채 ‘이전투구’에 휘말리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태고종이 지난해 선출한 송종연 총무원장의 자격여부를 놓고 시비를 가리다 결국 분열상을 보이며 1종단 2총무원장 체제를 만든 것을 비롯해 대한법화종, 일붕선교종, 원효종, 진언종 등이 각각의 속내를 밖으로 표출하며 내홍을 겪고 있다. 대한법화종은 총무원장 선거과정에서 있었던 금품수수 사건으로 인해 당선자가 자진사퇴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 이를 언론사 등 외부에 익명의 문서를 보내는 것으로 종단의 내홍을 드러내고 있다. 또 진언종도 재산문제로 종정과 종리원장이 거취를 옮기게 됐고, 일붕선교종은 ‘재단법인’명칭을 둘러싸고 시작된 내분이 2개의 총무원과 총무원장을 두는 결과를 낳고 있다. 여기
라다크리슈난(Radha Krishnan)은 그의 [인도철학사]에서 인도 원주민을 정복한 아리안(Aryans)의 종교는 처음부터 광범하고 자기발전적이며 관대하여 성장해감에 따라 그가 만나는 새로운 힘들은 자기 안으로 융화시키고, 보다 낮은 종교를 무시하거나 그 존재를 말살하기 위하여 싸우거나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불교왜곡 논의할 가치 없어 즉 그들의 것만이 유일하고 참된 종교라는 광신은 없었다는 것이다. 아리안의 인도 정복 후 근 천년 이후에 나타난 석가 역시 당시의 서로 대립·충돌하는 수많은 사상체계내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논쟁에 까어든 적이 없었다.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논의는 진실한 실천적 인식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실하게 살아가는 길과
태고종이라고 하는 큰 종단의 현직 총무원장 스님이 불교의 전통적 수행법이 아닌 가야산 근방의 한 마음수련단체에서 공부를 한 전력을 두고 종단에 분규가 일어날 정도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그를 비난하는 쪽은 사교집단에 심취한 자는 총무원장 자격이 없다는 것이고, 총무원장은 마음공부를 위해 경험을 한 것이지 거기에 심취한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의 의견이든 일정부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단체의 이념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인데도 거기에 심취했다면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나, 부처님을 따르는 수행자가 마음 공부를 위해 이런저런 수행법을 접하고 경험해보는 것을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고 몰아 세워선 곤란하다는 주장은 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태
봄이 되면 우리 불교계에서는 연례행사처럼 방생법회를 마련하고 있다. 이제 3월도 중순을 넘기고 있으니 머지 않아 크고 작은 방생법회가 열리게 될 것이다. 방생(放生)은 말 그대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자는 것이니, 방생법회 그 자체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교의 십계(十戒) 가운데 그 첫째가 불살생(不殺生), “생명을 죽이지 말라”이고 보면 산 목숨을 죽이지 않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방생이야말로 생명 사랑의 으뜸이라 할 것이다. ‘생명사랑’ 저버린 악행일 뿐 그런데 생명을 살리자는 방생이 자칫하면 생명을 죽이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훼손하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필자가 두 번째 부처님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는 내용을 주제로 다룬 책자가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했지만 우리 사회는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되레 사소한 문제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사소한 것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소한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본질적인 것이 그르쳐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선거 때마다 후보의 정치적 자질을 선택기준으로 삼지 않고 보다 부차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 출신지역이나 학벌, 종교 등을 지지자 선택의 절대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실제로 허다하지 않습니까. 국민의 정부 출범 직후에 터진 세칭 ‘옷 로비 사건’도 그렇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지리하게 정치적 공방을 벌인 결과는 결국 정권초기, 그러니까 정권이 힘이 있을 때 추진했어야할 각종 개혁들을 지지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