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어린이 날과 어버이 날, 그리고 스승의 날이 있는 가정의 달인 동시에 청소년의 달이다. 해마다 이때가 되면 이에 관련된 여러가지 행사가 있어왔고 금년에도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과연 밝고 건전하게 자라고 있는가. 이를 위해 부모는 제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사회 또한 제도적 틀을 제대로 갖추고 기능하게 하고 있는가. 이렇게 자문해 볼 때 여러가지 점에서 부정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비통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게 된다. 무엇이 이토록 비통하게 하고 있는가. 자녀가 부모에게 폭행하는 사례가 증가해 가고 있는가 하면 부모살해의 예 또한 점차 잦아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아직도 부모로부터 학대받고 있는 어린이의 수는 상식의 수준을 넘어설 정도인 것으로 보
올해의 부처님오신날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종단내부의 부끄러운 상처를 보이면서까지 불교개혁의 돛을 올린지 1년이 지난 뒤에 맞는 부처님 오신날이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조계종단은 과거의 폐해와 구태를 혁신하려는 몸짓을 보이려 무던히 애써왔다. 비불교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제도적 모순을 고쳤고 불교를 빙자한 각종 사이비적 행태를 수습해 나왔다. 이러한 노력은 모두 정법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편이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을 닮자'는 실천운동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해마다 부처님 오신날을 비롯한 4대명절을 성대히 봉행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처럼 삭기위한 중생들의 염원에서이다. 불교의 개혁은 이 점에 근거해 추진돼야 하고 부처님 오신날 행사 역시 이러한 원칙하에서 전개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들으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오히려 늦게 깨닫는 것이 두렵다” 고 하였고 또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어질 것이다”했으며 또 “생각은 일체의 경계를 반연하는데 마음은 분별을 아주 끊는다”했다. 이런 말은 모두 깨달음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검고 흰 것을 잘 분별하고 이익 되는 것과 손해 되는 것을 살펴서 목적지에 이르면 큰 성취를 이루는 바다. 즉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생사(生死)라 한다. 생사에 다달아서 모름지기 힘을 다해 화두를 들어라. 화두가 순일(純一)해지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어질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는 것을 고요함[寂]이라 하고, 고요함 속에서 화두가 없어진 것을 무기(無記)라 하고,
신분보장 및 지위향상 끝교계의 종사자라면 거의 현재 일터를 평생직장으로 여기는 경우가 드물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 도태될지 모르는 두려움, 열악한 근무조건 등이 이러한 인식을 늘 동반하고 있다. 더군다나 신분보장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마저 마련돼 있지 않아 미래에 대한 우려는 더욱 크다. 사람에 대한 `내치기'는 한국불교의 장자 조계종단에서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진다. 오래전부터 `잘못된 관행'으로 굳어진 `내치기'는 오늘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은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난해 말 조계종단분규로 인해 자리를 비워주어야 했던 3명의 기관지 불교신문 기자들. 자기편에 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률적 구제 방법까지도 아예 차단시킨 채 매몰차게 몰아냈다. 정치적 판단과 선택 속에서는 그간 공들여
불교TV가 존폐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은행 등 금융권에 진 빚이 무려 70억원을 넘고 있는데다가 벌써 여러차례 이자마저 갚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은행권의 차압위협을 받고 있다는 절박한 상황이란 것이다. 이런 처지인데도 불교TV의 운영권을 담당하고 있는 사장 이하 이사진은 이 문제에 적극 대처하지 못하고 일주일 내내 회사를 비우고 있고 직원들도 새로운 프로그램의 제작에 전혀 손을 대지 못한 채 우왕좌왕 배회하며 시간을 떼우고 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지경에 빠진 불교TV의 현실을 방치하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 우리 불교계의 무력감이다. 불교TV의운영주체로 가장 큰 지분을 지니고 있는 통도사측이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는 것도 딱한 일
한국불교의 대표종단인 조계종의 종회가 겉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회기도 마치지 않고 유야무야로 끝나는 일이 관례가 되어 종도들의 심한 질책과 지탄을 받고 있다. 새삼 물을 것도 없이 종회의 기능은 종단에 필요한 법률의 제정과 개^폐등 입법활동을 비롯해서 종단행정의 감독, 그리고 종단의 제반 불사를 합리적이고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협조하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매번 열린 종회는 충분히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뿐 아니라 회의를 하는 둥 마는둥 하다가 회기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채 도중에서 유회하기 일쑤여서 종단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그 원인이 종회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종회 밖에서 작용하는힘 때문이라는 지적이 유력하고, 이 외부의 힘 때문에 안건
우주의 섭리대로 어김없이 가을 기운이 아침 저녁 소매 밑으로 스며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추석이다. 불경기의 주름살이 사회 곳곳에 드리워지긴 했으나 민족 대이동은 여전하고 일가 친척들을 만나려는 들뜬 박동은 전국토의 동맥에 넘쳐 흐른다. 더구나 선거가 있는 해의 추석에는 도시로부터 정성스럽게 싼 선물 꾸러미 말고도 볼우물 아래에다 고향에 가서 뿌려야 할이야기 보따리들을 가득 담아 떠나기 일수다. 아마 어떤 선물에 못지않게객지의 젊은이를 맞는 고향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애타게 기다릴지 모른다. 텔레비전과 신문 종류로 따지자면 선진국에 뒤질 것도 없을 것 같은 우리나라이긴 하지만 여전히 국민 절대다수가 정보에 굶주리고 있는 것은 특정신문을 빼고나면 알만한 거의의 신문들이 항상 여당
학문과 관련된 몇몇 분들을 제외하고는 스님들은 물론 불자들마저도 책(불서)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입이 아프도록 떠들어온 오래된 이야기다. 이제 또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면 내로라하는 스님들과 불교인들은 “매우 답답하고 딱한 사람”이라고 할 것같다. 하지만 끊임없이 흐르는 낙수(落水)가 언젠가는 바위를 뚫고 비경(秘景)의 폭포를 만들어 내듯이 나 또한 오늘도 무향공산(無響空山)을 향하여 외쳐 볼 작정이다. 지난해 정부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불교인은 약 1,000만여 명이라고 한다. 10년 전보다 줄어들기는 했지만 우리 불교는 그래도 여전히 가장 많은신자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한국 최대의 종교, 그러나 이 통계에 의하면 우리 불자들의 연간 독서량은 2명당 1권 정도로,
얼마전 모 방송에서는 `애국가의 작사자는 누구인가'를 주제로 3.1절 특집프로그램을 방송했다. 결국 이 프로그램에서도 작사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애국가 가사가 큰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알게됐다. 문제는 애국가 1절에 나오는 `하느님'이라는 용어가 어떤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느냐는 점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애국가의 작사자는 명확하지 않다. 일설에는 민영환이라고도 하고, 최병헌, 안창호, 김인식, 윤치호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들 중작사자일 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민영환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사람 모두가기독교인이다. 우리 나라 교육기관에서는 애국가의 `하느님'은 `하늘님'이라고 가르친다.곧 하느님은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평등해야 할 불교계가 오히려 남녀 차별의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기사는 충격적이었다. 삼라만상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로 어떻게 여성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도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지향하는 우리 나라에서 …. 당시 인도라는 억압된 사회에서 천민이 스님이 될 수 있었고, 경전에도여성이 당당히 깨달음을 얻는 존재로 나와 있다고 배웠다. 그런데 그런 가르침을 실천해야 할 불교계가 여성을 오히려 여성을 차별하고 있었다니 …. 그러나 지금의 차별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그리고 그것이 많은 우리 여성 불자들의 생각일 것이다. 불교계에 잔존한제도적, 관습적 불평등을 척결하는
신도시로 이사와서 몇 해를 보낸 불자다. 서울 시내보다 살기는 불편하지만 그런대로 정을 붙이며 살게 되었다. 거리와 건물이 눈에 익을 무렵 종교에 관련된 건축물이 한결 같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교마다 경쟁하듯높고 넓게 지었고 지금도 그 경쟁은 계속되고 있다. 건물에 대한 과다 투자현상은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도심 사찰과 포교당은 많은 이들이 모여 한꺼번에 법회를 치뤄야 하니 그렇다치지만중소도시나 산중사찰도 덩달아 대웅전과 요사를 크게 짓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알다시피 대부분의 절엔 10여명 안팎의 대중이 살뿐이다. 그런데 그렇게큰 건물이 왜 필요한 걸까? 연중 내내 큰 행사가 열려 많은 이들이 몰리는 것도 아닌데 식당, 요사,대웅전 등을 크게 짓는
대학생불교연합회 활동을 하고 있는 학생이다. 지난번 부적관련 기사를보고 불자로서 한마디 할까 한다. 한국불교의 맏형 격인 조계종의 포교원은 한국 불교의 정법을 수호하고다양한 형태의 신행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포교원에서 부적을 제공했다는 것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충격이 크다. 불과 수년 전만하더라도 부적하면 불교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느꼈고 부적을 사고 파는 사찰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수년이지난 지금은 어떤가. 부적을 구하기 위해 점집이나 무당을 찾았던 불자들이부적을 사기 위해 사찰이나 사찰 주위에 있는 불구상점을 찾고 있다. 부적만을 구하기 위해 사찰을 찾는 불자들도 문제겠지만 이를 바로 잡지 못하고안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