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 스님은 그렇게, 당신이 그토록 간절하게 지키고자 원했던 강가에서 혼자 가셨다. 전태일 열사처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대중 앞에서의 외침도 시위도 없었다. 그리고 많은 제자들과 내외신 기자들이 보는 앞에 몸에 불을 붙이고 조금의 미동도 없이 소신공양을 한 틱광득 스님처럼 장엄한 의식 절차도 없었다. 그렇다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법정 스님의 경우처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유서를 남긴 것도 아니다. 문수 스님이 남기신 70여자 남짓한 짧은 유서는 선술집 벽에 아무렇게나 갈겨 쓴 듯한 낙서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스님의 행위를 폄하하려는 사회 일각의 사람들은 순진한 수행승의 ‘치기’ 정도로 보려는 경향이 있고 불교계 내부에서조차도 스님의 결행을 두고 소신공양이 아니라 분신
며칠 전 보살님 한 분이 찾아 오셨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보살님인지라 차담을 하게 되었는데 보살님께선 두 가지 꿈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그 의미를 잘 풀이해 달라고 하시는 겁니다. 꿈의 내용인 즉 이러했습니다. “스님, 얼마 전 정말 좋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커다란 금덩이를 세 덩어리나 주웠는데 어찌나 생생하던지 꿈을 꾸면서 신이 나 어쩔 줄 몰라 기뻐했지 뭡니까. 그 꿈을 꾸고 나서 꼭 일주일이 지났는데 이번엔 뱀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습니다. 어찌나 큰 뱀이었던지 꿈이었지만 오금이 저려 도망갈 수도 없었습니다. 금덩이를 주웠을 때는 그리 마음이 흡족하고 기뻤는데 무서운 뱀 꿈을 꾸고 나니 어찌나 마음이 산란하고 불안한지 이렇게 스님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의
5월은 부처님오신날이 있는 싱그러운 신록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가정의 달이기도 한 5월, 가슴 아픈 소식이 있었다. 결혼 혼수를 적게 해 갔다고 해서 시집 식구들에게 시달리던 어떤 애기엄마가 스스로 저 세상으로 갔다는 것이다. 친정살림이 어려워 열등감과 무시당한다는 마음에 비관해왔다고 한다. 남편도 그 아픔을 공감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믿어지지 않는 소식이었다. 한 지인은 “돈이 원수라니까요”라고 한다. 그러나 원수가 정말 돈인가. 돈은 물질일 뿐이다. 돈에 대한 인간들의 잘못된 집착과 망상, 탐진치가 원수라면 원수일 것이다. 소중한 사람보다 돈을 우위에 두고 함부로 사람을 차별하는 무서운 분별심이 정말 원수같다. 부처님은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부유한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진리의 길을 가셨
이해관계. 어떤 사안을 바라볼 때 누구나 지니는 경계다. 비평을 업으로 삼아온 나도 고백하거니와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판단한다. 문제는 특정인의 편견 여부가 아니라 특정인이 얼마나 자신의 편견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느냐에 있다. 자신만은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자부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누군가를 비평할 때 그 비평의 칼끝에서 자신도 예외로 둘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기실 밖으로의 비평은 자신 안에 있는 편견을 지며리 깎아가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이해관계나 감정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 있는 사람에게 옳고 그름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다. 언론인으로 살아오며, 또 언론비평을 해오며, 나는 불교의 가르침에 크게 빚져왔다. 가령 팔정도에는 정견(正見)이 있다. 사전적 풀이로는 “사제(四諦)의
전지구적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하고 있는 엘 고어의 저서와 다큐멘터리가 『불편한 진실』이란 번역으로 소개 된 이후 ‘불편한 진실’이란 말은 우리의 일상에서 생활용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원제가 의미하는 바는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 싫고 피하고 싶은 일 또는 사실” 정도의 뜻일 것이다. 이러한 뜻을 가진 ‘불편한 진실’이란 용어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한국사회의 한 단면이 잘 드러난다. 최근 언론을 타고 있는 ‘스폰서 검사’라든가 ‘연예인 성접대’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한국 성인들은 ‘상식’처럼 알고 있던 그러나 또 그래서 ‘불편한’ 진실들이었다. ‘스폰서’를 가지고 있는 직업이 어디 검사뿐이겠는가? 우리 사회에 ‘스폰서’라는 권력 관계가 물고물리는 먹이 사슬처럼 얽혀있다는 것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떠오릅니다. 봄이 왔는데도 봄 같지가 않다는 뜻입니다. 시절 인연 또한 그렇습니다. 자연도 이러한 인연을 잘 알아서일까요, 우리는 올 봄 그 어느 해보다 추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곳 마곡사의 봄꽃과 나물들도 잔뜩 움츠린 모습이 역력합니다. 추운 날씨도 그렇지만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사건사고들도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천안함 침몰과 이로 인한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그로 인한 죽음들 그리고, 스폰서 검사 파문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마음을 안타깝고 슬프게 하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 국민들이 어디에 의지해 이와 같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지 막막할 뿐입니다. 국민들 사이에 슬픔과 고통, 분노, 좌절 등 부정적인 기운들이 고정적으로 자
최근 김 길태 사건 등으로 인해서 강력범죄에 대한 법적인 대책들이 마련되고 있다. 물론 효과적인 법 제도는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제도의 개선만으로 소위 ‘범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범죄의 근본원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없는 한 결코 사회평화는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든 것의 근본은 마음”이라는 부처님 말씀처럼, 진짜 주범은 행동이 아니라 그 악한 행위를 하도록 하는 마음이다. 바로 범죄가 발생할 수 있는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대책을 사회적으로 강구해야 한다. 재소자들과 상담하다 보면, ‘사람은 소중하다’는 사실을 난생 처음 배우게 되었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 가정과 사회는 과연 얼마나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고 생명을 존중하고 있는가. 남이야 어찌 되든 경쟁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맺힌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4·19탑에 새겨진 글이다. 해마다 오는 사월이지만 2010년 올해는 더 뜻 깊다. 사월혁명 50돌을 맞아서만은 아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무장 뒷걸음질치고 있어서다. 당장 이명박 정권이 강행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을 톺아보라.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데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 국회에서 과반의석을 차지한 한나라당은 자신들의 의지가 곧 국민 다수의 뜻이라고 부르댄다. 그래서일까. 오만하고 거침없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한나라당 원내대표 안상수가 “강남 부자 절의 좌파 주지” 운운했다는 ‘증언’도 그 연장선이다. 전교조와
맑고 향기롭게. ‘맑은’ 것이 내면의 성품이라면 ‘향기로운’ 것은 주위를 감싸는 덕이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상징하던 법정 스님께서 입적하셨다. 현대한국불교에 있어 법정 스님만큼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를 가진 분도 드물었다. 법정 스님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주로 출판과 언론이라는 현대 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것들이다. 원래 출가자의 덕목인 ‘무소유’란 말은 불교적 의미망을 벗어나 거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불일암을 방문해 스님께서 거처하시는 방이나 부엌을 본 사람들은 ‘무소유’가 도덕일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미학적 완성을 보여주는 것임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남기신 유언, 그리고 그 유언에 따른 장례의식은 이러한 일상적 미학의 한 완결이었다. 법정 스님에 대한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봉선사로 갔다. 그 길로 허둥지둥 돌아왔다. 뜨거운 햇볕에 잎이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국민 모두의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했던 법정 스님이 무소유(無所有)를 깨달은 일화입니다. 3월 11일, 열반에 드신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사람들은 지심(至心)으로 귀의하며 스님의 삶을 칭송하고 그렇게 살기를 발원했습니다. 무소유로 가득한 세상, 지난 한 주 불자들은 물론 이 땅에 사는 국민 모두는 스님의 아름다운 회향에 동화되었습니다. 이 시대 최고의 권력인 대통령도, 이웃 종교의 성직자도, 팔순의 할머니도, 철부지 어린 아이도 무소유의 스승 법정 스님이 떠나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시며 바른 정진의 길을 보여주신 법정 스님께서 지난 11일 입적하셨다. 슬픔과 아쉬움이 너무도 크지만 스님의 책 제목처럼 ‘아름다운 마무리’로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감동을 남겨주신 삶의 교훈에 깊은 감사를 올린다. 스님의 법어를 다시 새겨보며 우리도 언젠가 이 생을 떠나는 그 날, 후회 없이 아름답게 마무리하게 되길 희망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일의 과정에서 길의 과정에서 잃어버린 초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초발심 때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생활과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얼마나 자주 그 마음을 잊어버리고 놓치고 살고 있는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자신의 마음을 바르고 아름답게 가꾸는 일을 게을리하곤 한다. 깨달음에의 발심과 열정, 정진의
대구. 불자들이 많은 곳이다. 얼마 전이다. 일선 공무원 대상으로 강연을 갔을 때다. 동대구역에 내려 강연장까지 택시를 탔다. 어느 지역이든 택시노동자―흔히 ‘택시기사’가 예의 갖춘 말이라고 한다. 이해할 수 있다. 나도 택시노동자와 대화할 때 ‘선생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글을 쓸 때는 아니다. 노동자가 ‘기사’보다 결코 낮춤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은 신성하지 않은가―와 대화를 나누면, 민심의 흐름을 조금은 짚을 수 있다. 일상으로 승객과 이야기하거나, 승객 사이의 대화를 자연스레 듣는 택시노동자의 말에는 한 개인의 의견보다 더 많은 사람의 생각이 담겨있다.50대 후반의 택시노동자에게 요즘 경기가 어떤가를 정중하게 물었다. 그 분은 아예 말하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앞만 보며 가다가 귀찮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