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둘로 쪼개져 있는 것 같다. 남북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그렇다. 세종시 문제를 둘러싼 첨예한 의견대립과 최근 일련의 재판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러하다. 우선 세종시의 경우 한쪽은 ‘국민과의 신뢰’가 중요하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국가 백년대계’를 이야기한다. ‘신뢰’도 중요한 가치이고 ‘백년대계’도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다. 국민들은 대단히 혼란스럽다. 불교적 시각으로 보자면 이런 식의 이분법은 ‘말장난’이다. 양쪽 모두 부분적 진실을 전체적 진실인양 포장하고 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통령과 집권여당이 선거 기간 수없이 반복해서 한 약속이니 만큼 지켜야한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현대정치사를 통해 정치인이 약속을 뒤집는 경우를 수없이 경험한 국민들로서는 ‘약속과 신뢰’의 강조
지금으로부터 144년 전인 1866년 고종3년, 프랑스 함대가 우리나라 강화도에 침입, 이른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프랑스 군인들은 이 때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보존되어 있던 어람용 의궤(御覽用 儀軌) 191종 297권을 약탈해 갔고, 나머지 귀중한 책과 문화재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100여년이 흐른 1975년, 프랑스 도서관에 근무하던 한국인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도서관 별관 창고에서 중국책으로 분류된 채 100여 년 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우리나라의 보물, 외규장각 도서들을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92년 우리정부는 약탈당한 귀중한 우리의 문화재 외규장각 도서들을 반환해 달라고 프랑스 정부에 정식 요청했고, 뒤이어 1993년 9월 고속철 ‘떼제베’를 팔아먹기 위해 우리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 했든가요. 우주 만물이 불성을 지닌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일체의 생명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며 살아가고 있다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네 인간 역시 그렇습니다. 날숨 들숨을 쉴 때도, 숲속을 거닐 때도, 잠을 잘 때도, 수행을 할 때도 우리는 대자연을 이루고 있는 일체 만물에 혹은 이웃들에 폐를 끼치며 살아갑니다. 홀로 존재할 수 없기에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리가 이러하기에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지구는 하나의 ‘인드라망’입니다. 모두가 함께 호흡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어울리며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경인년 새해의 첫 해를 맞이한 지도 벌써 20여일이 지났습니다. 희망과 긍정의 에너지를 충
1등하면 누구나 좋아한다. 기왕이면 세계 1위라면 더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새해에는 제발 우리나라가 국제사회 1등에서 물러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있다. 바로 자살률 세계 1위이다. 경제위상을 자랑하는 OECD 국가 중 여전히 자살률 1위이다. 매일 하루 평균 40여명, 1주일이면 280명에 달한다. 한 달이면 1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사망사유에 자살로 처리되지 않는 경우까지 합한다면 아마 더 많을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숫자의 한국인들이 살아갈 의지를 잃고 생을 포기하고 있는 이 상황이 국민마음의 IMF사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더 큰 문제는 자살의 결과는 절대 본인에서 그치지 않는다. 상담을 하다보면 뼈저리게 느낀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겪는 충격과 고통, 슬픔은 상상을
온 나라가 세종시 문제로 시끄럽다. 세종시 건설은 엄청난 사업이므로 논란이 활발한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세종시 논란이 건설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세종시 건설을 원안대로 해야 하느냐 수정해야 하느냐가 논란의 핵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종시가 자리하고 있는 충청도민들의 생각이 어떠하냐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국가균형발전의 관점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가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세종시 건설은 서울-지방의 심각한 격차와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정책의 하나이다. 손바닥만한 서울에 인구의 4분의 1이 몰려 산다. 서울을 감싸고 있는 수도권까지 따지면 인구의 절반이 몰려 있다. 서울이 비대해지다 보니 환경 파괴, 교통체증, 교육문제, 주택난, 범죄 등 온갖 사회문제가 일어난다. 더 심각한 것은
“경인년 새해, 우리는 행복을 참구하는 내면의 간절한 발원을 바탕으로 나와 우리, 나와 사회, 그리고 세상을 향해 소통하고 화합하는 성숙된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조계종 총무원장의 신년사다. 기실 내면의 발원을 밑절미로 세상과 소통하는 게 오늘의 불교인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불자는 아무도 없을 성 싶다. 자승 스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단한 삶의 연속”이지만 “또한 희망과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세상”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단성무이(丹誠無二)의 마음으로 그 꿈을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면서 명토 박았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다만 그걸 실행하려면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짚을 필요가 있다. 본디 불교는 말과 이론이 아니라 수행과 실천을 중시하는 가르침이기에 더
지난해는 참으로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미국에서 불어온 금융위기는 전 세계를 휩쓸었으며, 우리나라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계적인 자동차회사였던 GM이 도산 위기를 맞았고, 세계적인 보험회사가 파산처지에 이르러 구제 금융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무엇을 믿어야 하고, 누구를 의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실업자는 쏟아지고, 어떤 나라는 국가가 부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번만큼 “세계는 하나다”라고 하는 것을 실감하기는 처음이었다. 이를 두고 부처님께서는 온 우주는 하나이며, 한 송이의 연꽃이라고 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지난 연초에 화두를 소욕지족(少欲知足)으로 정하였다. 모든 신도들에게나 만나는 사람마다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자”고 역설하였다. 나 자신도 되도록
용산참사, 그리고 이어진 길고긴 공방. 연말에 전해진 용산참사 타결 소식에 대하여 아직 평가를 내리기는 이를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들이 평안한 영면에 들고, 유가족들에게 평안이 찾아오기를 기원하고 기도 드릴 뿐입니다. 2009년 1월 20일에 벌어진 여섯 분의 희생을 전 국민이 방송으로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장례식도 치루지 못하고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되지 못한 채 1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동안 깊어진 감정의 골들이 용서로써 진정하게 치유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1971년 8월 서울 남산 주변의 철거민들이 모여 살던 경기도 광주 대단지에서 주민들이 생존권 투쟁을 전개한 이래 철거와 이에 반발하는 주민들의 봉기는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1978년 발표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
중국의 남전 스님이 귀종, 지견 스님과 행각을 하던 중 산길에서 호랑이를 만났다.남전 스님이 귀종 스님에게 물었다. “좀 전에 본 호랑이가 무엇으로 보였는가?” 이에 귀종 스님은 “고양이 같았다”고 말했다. 귀종 스님은 지견 스님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지견 스님은 “개 같았다”고 답했다. 귀종 스님은 다시 남전 스님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물었다. 이에 남전 스님은 “내가 본 것은 대충(大蟲)이었다”고 말했다. 남전은 호랑이를 보고 고양이도, 개도 아닌 ‘큰 벌레’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큰 벌레’라는 대충(大蟲)은 호랑이의 별칭이다. 따라서 귀종이 고양이로 보였다 하고, 지견이 개로 보였다 했을 때 남전 선사는 ‘호랑이’였다고 말한 것이다. 세 사람이 똑 같이 호랑이를 보았는데 각자의 견
2010년 경인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설악산과 동해안에는 새해의 첫 일출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밤잠을 설치며 여러 시간을 달려왔음에도 그들의 표정은 다른 때와 달리 피곤함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이 이들의 얼굴에서 피곤함을 밀어냈을까. 그것은 아마도 ‘초발심’이 지닌 설렘과 강렬함 그리고, 다른 그 무엇에 비할 바 없는 엄숙함 때문일 것이다. 매일 뜨는 해인데도 불구하고 새해의 첫 일출은 매해 새로운 일출이다. 시간을 초월해 살아가야 하는 수행자도 새해의 첫 일출에 새삼 숙연해지는 것을 감출 수 없는데, 매일 매일 새로운 일상과 마주쳐야 하는 일반인들에게는 그 숙연함이 몇 배 더 간절할 것이다. 초발심(初發心)이란 말은 우리 불교가 대중화 시킨 소중하고 아름다운 말들 중 하나이
근자에 불교계에서는 다양한 형식과 주제로 심도 있는 논의의 장이 마련되어 많은 불자들의 기대와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8월 실상사에서 개최한 ‘정법불교를 모색하는 지리산 야단법석’에 이어, 이달 12일에는 밝은사람들연구소의 8회 학술연찬회 ‘몸, 마음공부의 기반인가 장애인가?’와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13번째 화엄광장 ‘신대승불교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가 진행되었다. 한편 조계종은 몇 해 전부터 중앙종무기관 직속으로 다양한 위원회를 신설하여 분야별로 정책의 전문화를 꾀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불교계가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긍정적 신호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전개과정과 결과물을 살펴보면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은데 한마디로 효과적인 문제해결기법의 부재라 할 수 있다. 시대에 조응하는 정체성에
송구영신 덕담을 나눌 때다. 하지만 그럴 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세밑의 세속 풍경이 녹록하지 않다. 살천스럽다. 인권운동을 지며리 펴온 활동가들이 발표한 ‘2009년 10대 인권뉴스’가 그 ‘증거’다. 10대 인권뉴스의 머리는 단연 서울 용산참사다. 더러는 또 그 이야기냐고 눈 흘길 지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그게 누군가의 노림수는 아닐까. 용산 참사의 진상을 가리거나 진저리치게 만드는 여론조작이 한 해 내내 이어졌다. 그 결과다. 참사는 시나브로 잊혀가고 있다. 철거민만이 아니다. 쌍용자동차의 일방적 해고에 맞선 노동자들도 가혹하게 탄압받았다. 그뿐인가. 미디어법도 날치기 처리했다. 시국선언 교사와 공무원 노조를 징계하겠다는 이명박 정권의 서슬은 새삼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톺아보게 한다.저들은 말끝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