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재자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우리가 늘 독송하는 ‘반야심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기에서 ‘오온개공’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오온이란 뭘까? 불교를 오래 공부해도 오온을 이해하고 설명하기는 쉽지 않은데, 간단하게 몸과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색은 몸(물질), 수상행식은 정신을 뜻한다.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몸과 마음인데, 인격은 이 몸과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인격이 훌륭하다는 것은 마음을 넓게 쓰는 것을 말하고, 넓게 쓴다는 것은 중생을 배려 이해하고, 중생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하여 나와 남을 행복하게
‘쭌다경(Cunda-sutta)’(AN6:46)은 제목 그대로 마하쭌다(Mahācunda)라는 존자가 동료 비구들에게 설한 법문이다. 이처럼 초기경전에는 붓다의 설법이 아닌 제자들의 설법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 필자가 이 경에 주목하는 까닭은 마하쭌다 존자가 붓다의 뛰어난 제자도 아니면서 승가 내부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마하쭌다 존자는 쭌다 혹은 쭌다까 존자로 불렸으며, 쭌다 사미로도 불렸다. 그는 사리뿟따 존자의 동생이었으며 구족계를 받은 후에도 사미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는 한때 세존의 시자
2020년이 한 달만 남겨두고 있다. 갑작스런 코로나19로 우리의 삶은 올해를 기점으로 전혀 다르게 변화되어 버렸다. 언택트가 모든 생활에 적용이 되었고 우리도 어느덧 적응이 되어버렸다. 또한 휴일이나 휴가라고 해도 어느 한 곳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없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스스로 기피하게 되었다. 한 해 동안 우리의 모든 삶이 변해버린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대해 더 이상 안타까워만 할 수도 없이 어느새 한 해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한 해 동안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놓쳤고 성취하지
도선율사의 ‘사분율행사초’ 제잡요행편에는 복덕과 지혜의 관점을 가지고 출가자가 의지해야 하는 긴요한 일들을 설명하고 있다. ‘대지도론’에서 “지혜는 해탈의 인이 되기 때문에 출가자는 주로 지혜를 닦고, 복덕은 즐거움의 인연이 되기 때문에 세속인은 주로 복덕을 닦아야 한다”고 말한다. 출가자와 세속인은 복과 지혜를 다르게 닦는다. 이렇게 둘이 나눠지는 차이를 이치적으로 알아야 하고, 서로의 공통점과 차이점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복과 지혜 둘이 차이가 있어서 도속(道俗)이 다르게 수행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세속은 얽힌 것이
2004년 8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민족음악 학술세미나에 참가했다. 행사가 시작되는 날 왕자의 축사가 있어 이른 아침부터 전통 예복을 차려입은 궁녀들이 줄지어 꿇어앉아 의전 준비를 하는데 어쩜 그리도 허리가 잘록하고 가슴과 엉덩이가 볼록한지 자꾸만 눈길이 갔다. 만약 필자가 남자였다면 엉큼하다고 주변에서 꽤 흉보았을 것이다. 세미나 일정을 마치고 씨엠립으로 가기 위해 비행장에 당도하니 프로펠러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비행기를 타는 기쁨도 잠시, 프로펠러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를 막아야 했고, 창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기설(對機說)이라 한다. 여기서 기(機)를 조건이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큰 잘못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근기, 가르침을 내릴 때의 상황 등에 맞춰서 설해진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구체적인 상황을 말하기 전의 근본적인 조건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이라는 조건인 것이다. 부처님도 그 근본 조건이라는 제약을 무시할 수 없었고, 그 근본조건에 맞게 말씀하셨기에,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부처님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조건에 대
전염병의 기세가 오래도록 꺾이지 않고 점점 심해져 간다. 그로 인해 겪게 되는 직접 간접적인 고통이 세상을 무겁게 덮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종교에서 위안과 안식을 찾고 삶의 희망을 얻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종교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실망을 넘어 절망을 느낄 정도로 한심하다. 사회적 고통을 키우기도 하고 고통에 눈감기도 한다. 사람들이 겪는 현실의 고통에 대해서 참된 종교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최근 개신교의 선각자들이 기독교의 절망을 통감하고 적나라하게 교계의 현실을 비판함과 동시에 스스로 잘못을
지홍 박봉수(智弘 朴奉洙, 1916~1991) 화백을 언급할 때면 항상 ‘경주출신’이라는 말이 따라 붙는다. 경주출신, 그러니까 경주에서 태어난 사람이야 많겠지만, 누구 앞에 “경주출신”이라는 칭호가 붙는다는 것은 그만큼 경주를 빛낸 인물이라는 뜻으로서 일종의 훈장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경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었다고 하는데, 그때의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일찍부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경주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서는 어린 나이에도 본격적으로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1929년, 그러니까 그의 13세 때 그린
한때 공산주의를 동경했던 버트런드 러셀이 20세기 초반 신생 소비에트연방을 방문하고 돌아와 한 이야기가 있다. 유물론자임을 자처하던 공산주의자는 날마다 “강한 의지, 애국심, 충성심으로 소비에트 낙원을 건설하자”며 지극히 유심론적인 요소만 떠들고 있었다. 반면에 공산주의자가 유심론자(관념론자)라고 조롱했던 영국인은 재화의 생산과 돈밖에 모르는 유물론자처럼 살고 있었다. ‘이념’이라는 상(相)이 만들어낸 아이러니컬한 모습을 목도한 후의 소감이었다.유물론을 추구하는 공산사회에서 왜 사회의 문제를 물질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신의
철학, 종교, 사상 그리고 예술의 공통점은 ‘삶’을 주제로 한다는 것이다.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묵시적으로 한편에 ‘죽음’을 놓아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종교는 삶과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룬다면, 철학과 사상은 삶의 문제를 해석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반면 예술은 삶과 죽음의 문제 중 어느 하나를, 혹은 그 모두를 동시에 표현한다. 예술가는 어떤 종교인이나 철학자 못지않은 통찰력으로 고뇌의 시간을 보낸다.프란츠 슈베르트는 슈베르티아데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가곡과 피아노곡, 실내악곡들을 주로 작곡하면서 활동했지만, 내적갈등은 점점
양변을 여의는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중도는 철학적으로 ‘자주(自主)’의 의미를 갖는다. 양변도 아니고 중간도 아닌 새로운 합일로서의 자주이다. 자주는 자유와는 다르다. 자유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함이라면, 자주는 가장 바른 것을 선택함을 말한다. 모든 것이 연기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면서, 그 관계에서 가장 바른 것을 선택하는 중정(中正)의 선택이 자주이다.‘스스로 주인이 된다[自主]’고 함은 중도중정의 주체가 됨을 의미한다. 중도중정을 벗어나서는 오롯이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없다. 역
2019년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한 고사리박사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은 장르는 판타지이지만 우리 사회 현실과 삶의 희로애락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웹툰은 비가 오는 날마다 합정역에서 당산역으로 가는 지하철 2호선에 귀신이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당산역 귀신’은 자신을 보는 인간에게 다가가 ‘낭만 고양이’를 불러달라고 할 뿐 이렇다 할 해코지는 않는다. 당산역 귀신의 소식을 듣고서 지옥을 관장하는 지장보살을 협시하는 도명존자가 무작정 인간세계로 향한다. 당산역 귀신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이다. 도명
현재 미국에 사는 60대 여성 불자님이다. 불자님은 본래 개신교 모태 신앙이었다. 불교를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했다. 시어머님은 불자였다. 시어머님 따라서 처음으로 절에 가보았다.절에 갈 때마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경을 따라 읽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짜증나고 너무 싫었다.“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왜 읽고 있지?”그러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이십년 만에 만났다. 동창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동창이 선물로 한 개에 60분짜리 카세트 테이프 8개를 선
출세간 불교보다 입세간 불교를,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의 삶을 돌보는 불교를, 초세간 정신으로 세간 속의 인간을 돌보며 세간을 완성시키는 불교를, 모든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정토로 구현해내는 인간불교를 불러 내보자. 그 인간불교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어떤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서원을 발하며 앞서 나간 사람이 대만 불광산사(佛光山寺)의 성운(星雲) 대사이다.성운은 1927년 중국 장쑤(江蘇)성에서 태어났다. 12세 때인 1938년 난징(南京) 치샤산(棲霞山) 대각사(大覺寺)로 출가해 임제종 48대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그의 출
부처님 당시 인도인들 중에는 극심한 고행을 통해 어떤 수행의 목적을 이루고자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비단 수행만이 아니라 우리는 다양한 목적을 이루고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어떤 목적을 갖고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목적하는 바가 성취되었을 때 우리는 만족감을 경험하며 흡족해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슬픔에 빠지거나 분노하거나, 때로는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비하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목적이 이루어지는 경우보다는 그렇지
75장은 “‘선(禪)’을 배우는 자가 만일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밝히지 못하면 우뚝 솟은 ‘현관(玄關)’을 무엇으로부터 투과하겠는가? 흔히 ‘단멸공(斷滅空)’을 ‘선’이라고 하고, ‘무기공(無記空)’을 ‘도’라고 해서, 일체가 모두 ‘무’인 것으로 높은 ‘견지’를 삼는다. 이것은 ‘공’을 고집하는 것으로 ‘병’이 깊은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 ‘선’을 말하는 자는 흔히 이 ‘병’에 걸려 앉아 있다”이다.중국에서 ‘선’의 어원은 ‘사기·위장군전’과 ‘속한서·제사지’에서 ‘왕위계승을 위해 하늘에 지내는 제사의식’이다. 안세고(148~
승이 운문에게 물었다.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말씀이란 어떤 것입니까.” 운문이 말했다. “호떡이다.”본 문답은 질문한 승의 깜냥에 대하여 답한 운문의 기략이 잘 드러나 있다. 먼저 승이 자신의 역량을 기울여서 부처도 초월하고 조사도 초월한다는 이치를 알고 있다고 전제한다. 승은 이미 자신이 답변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의기양양하여 자칫 운문의 역량을 가늠해보려는 제스처로 질문한다. 그러나 운문은 그렇게 얄팍한 기량에 속지 않는 뛰어난 선지식인 노고추(老古錐)이다. 승이 하는 질문이란 바로 제 딴에 제법 풍부한 지식을 가
‘화엄경’의 제7권이며 세 번째 품인 ‘보현삼매품’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습니다.“그 때에 보현보살마하살이 여래 앞에서 연화장 사자좌에 앉아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삼매에 들어갔다. 이 삼매는 이름이 일체제불비로자나여래장신이었다.”‘화엄경’의 설법은 대체로 여래의 방광에 의한 광명설법이고 그 광명소리를 대표되는 보살들이 삼매에 들었다가 일어나서 음성소리로 다시 설합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은 광명으로 설법주(說法主. 또는 說主, 法主)이심을 보이고, 보살이 설주가 됨은 삼매에 들어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서 이루어집니다. ‘보현삼
경전을 가리키는 산스끄리뜨는 실이나 끈을 의미하는 쑤뜨라(sūtra)이므로 한문으로는 끈으로 종이를 묶어놓은 모습을 본뜬 상형자인 책(冊)에 해당하는데, 한문번역어로는 경(經)이 사용된다. 경(經)이란 날줄이 걸린 베틀[巠] 곁에 실[糸]을 쌓아둔 모습이다. 베를 짤 때는 베틀에 이미 걸려있는 날줄에 맞춰 씨줄을 어떻게 먹이느냐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문양의 온갖 천이 짜여지듯이, 쑤뜨라인 경전도 성인이 말씀해놓으신 것을 어떤 근기에서 어떤 시각으로 읽어내느냐에 따라 그 해석에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경전에 대한 갖가지 해석
우리는 연민 수행을 통해 자기 내면의 싸움과 슬픔을 견뎌내는 방법을 찾을 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고통이나 슬픔과 연결되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만나는 모든 대상을 애정 어린 보살핌으로 대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격렬한 고통을 겪는 동안에도 연민은 내면에 있는 자비의 천사처럼 힘겨운 상황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줍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연민은 우리의 참된 본성 중에서도 기본적인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기에 우리는 어떤 조건에서도 연민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이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지금 이 순간’에 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