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실수한다. 하지만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그는 구름에서 나온 달처럼 능히 세상을 비춘다.’(‘법구경’) 묵원(黙圓) 스님은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산과 바다 같아도 참회하면 소멸한다’는 ‘계초심학인문’의 일언을 품고 온 마음을 다해 올려온 기도다. 1980~90년대 태고종 발전의 기틀을 다진 운산 스님은 총무원장 재임 중 비리 의혹을 받아 2009년 8월 끝내 사임했다. 당시 총무·재무 소임을 보았던 묵원 스님에게도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그러나 공사(公私)에 관한 한 늘 분명했던 묵원 스
‘유신헌법·긴급조치’가 관통한 1970년대는 암울한 시대였다. ‘…보이지 않는 공포와 가장 강력한 경멸의 뒤범벅을 우리는 오늘날 삶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그 공포와 경멸을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하하. 그러니 그 삶이라는 것에 손이 닿자마자 손은 썩기 시작하고 그 삶이라는 것 속에 발을 들이밀자마자 발은 썩어 버린다. … 그리고 더 많은 거짓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술보다 더 지독한 痲藥이 필요하다.’(정현종 시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노트 1975’)
개안수면(開眼睡眠). 봉선사 회주 밀운(密耘) 스님의 주석처에 걸려있는 편액이다. ‘눈을 뜨고 잠에 드노라!’ 조계종 현대사의 격동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1962년부터 1986년까지 24년간 무려 25명의 총무원장이 교체됐다는 사실이다. 의현 원장의 취임(1986) 후 다소 안정세를 보이는 듯했으나 강북 조계사에 이어 강남 봉은사에 또 하나의 총무원 현판이 걸리며 강남·북 양 총무원 시대가 열렸다.(1988) 당시 봉은사 주지는 밀운 스님이었다. 이듬해 주지 소임을 내려놓고 봉선사에 방 한 칸 얻어 칩거에 들어갔다.(1
파도는 발아래서 출렁이고 갯바위에 부딪힌 ‘철썩∼’ 소리 청명하게 들려온다. 푸른 바다 위를 걸어 고색창연한 절로 들어서는 것 같다. 바다 위에 처음 절을 세운 스님은 고려의 고승 나옹 혜근(懶翁 慧勤·1320∼1376)이다. 해안가의 비경을 마주한 나옹 선사는 ‘뒤는 산이요 앞은 물이니, 아침에 불공 올리면 저녁에 복 받을 곳(背山臨水 朝誠暮福地)’이라 했다. 길지임을 확신한 나옹 선사는 토굴을 짓고 정진에 들어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전화로 소실되었다가 1930년대 초 통도사 운강 스님이 보문사로 중창한 바 있고, 1970년대
역경(譯經) 대원칙 하나. ‘이해 못 하면 번역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오역은 만 사람의 사상을 왜곡시킬 수 있다. 원전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파악, 그에 따른 통찰이 이뤄졌을 때라야 한 문장 써 내려갈 수 있는 것이다. 운악산 봉선사는 한국 역경사에 한 획을 그은 두 선지식을 품었다. “번역할 때 원전에 있는 말을 빼지도 말고, 없는 말을 보태지도 말라!” 했던 운허(耘虛·1892∼1980) 스님과 ‘한글대장경’ 완간의 주축이었던 제자 월운(月雲·1929∼현재) 스님이 주석한 도량이다.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은 다경실(茶經室)에
‘좌(坐)는 몸도 마음도 그 자리에 앉는 것, 선(禪)은 마음을 조절해서 잘 쓸 수 있는 작용!’한 문장에 한 호흡 가다듬을 때가 있다. 좀 더 깊은 사유 속으로 초대하기 때문이다. 무각(無覺) 스님의 저서 ‘선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다’에서 본 저 한 문장을 마주했을 때 그러했다. ‘좌(坐)는 일상생활에서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경계를 보면서, 그 많은 현상이 다 공한 것이고 연기에 의해서 인연하여 잠시 일어나는 것임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어야 제대로 앉는 것입니다.’무작정 앉는 게 아
5월의 햇살이 유난히 따가웠던 날, 청주 혜은사 관세음보살 입상 점안식이 봉행됐다.(1992) 증명법사는 당대 선지식 청화(1924∼2003) 스님. 사자좌에 올라 법문 내리려는 순간 관세음보살상의 머리 위로 무지개처럼 영롱한 반원형의 띠가 나타났다. 야단법석에 운집한 300여명의 사부대중이 합장한 채 술렁였다. ‘저 반원형의 빛 또한 허상’임을 직시하고 있던 덕산(德山) 스님이었지만 차오르는 환희를 억누를 길은 없었다.군 제대 직후 시골에서 농사일을 돕고 있을 때 극심한 오한을 동반한 부종이 생겨 진료를 받았다. 신증후군(Neph
‘가을 풀숲에는 지난 왕조의 절(秋草前朝寺)/ 남은 비석에는 한림학사의 글(殘碑學士文)/ 천 년 동안 물은 흘러가고(千年有流水)/ 해질녘 돌아가는 구름을 보네(落日見歸雲)’(백광훈(1537∼1582)의 시 ‘홍경사’)고려의 왕자 안종(安宗·?∼996)은 불법의 대의를 전하고자 큰 절 하나를 세우려 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목숨을 다했다. 그 꿈, 아들 현종이 실현시켰다. 거란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으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판각 불사를 일으킨 고려의 8대 왕인 그 현종(顯宗·재위 1009∼1031)이다.충남 직산에서 가까운
중국 시안(西安)에서 황허(黃河)의 서북쪽 고비사막을 지나 험준한 톈산산맥(天山山脈) 줄기를 넘어 로마까지 이어지는 7000㎞ 길. 고대의 동서문명을 이은 실크로드의 관문은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사막의 동쪽 끝자락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오아시스 도시’ 둔황(敦煌)이다.거친 모래바람을 뚫어가며 힘겹게 걸음을 내딛다 닿은 오아시스. 생의 끝자락일 것만 같았던 그곳에서 마신 한 모금의 물이 타들어가는 목마름을 적신다. 비단과 도자기를 싣고 가던 대상(隊商),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난 모험가 모두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는 흙산 절벽에 구멍을
一光東照八千土 (일광동조팔천토) 大地山河如杲日 (대지산하여고일) 即是如來微妙法 (즉시여래미묘법) 不須向外謾尋覓 (불수향외만심멱)한 줄기 빛으로 팔천토 비추니 대지산하가 해처럼 밝아지네. 이것이 여래의 미묘한 법이니 모름지기 밖에서 찾지 말라.하동 쌍계사 화엄전에 걸린 주련이다. 직역은 쉬우나 뜻을 새기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앞의 두 구와 뒤의 두 구가 문맥상 맞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일광(一光)·미묘법(微妙法)을 간파하지 않고는 100년을 들여다보아도 그 깊은 뜻 꿰뚫지 못할 것이다. 법보신문에 연재 중인 ‘법상 스님의
8월26일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들이 입국했다. 명법사 주지 화정 스님은 이 소식을 들은 직후 1000만 원을 기탁했다. 생명의 위협 속에 흔들린 마음을 추스르고 삶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달라는 당부의 뜻일 것이다. 아울러 그들도 우리의 이웃이자 친구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는데 이것은 일부 종교단체들에 의해 퍼져가고 있는 ‘난민 포비아’를 극복하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최근 명법사에 작은 변화가 일었다. 지난한 과정 끝에 2007년 설립한 명법사 복지재단을 지원법인에서 운영법인으로 바꿨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사회의 그늘진 곳 더
하얀 암석 덩어리 하나 자체가 산으로 우뚝 서 있는 백암산(白巖山) 백학봉(白鶴峰)은 압도적이다. 산 아래 펼쳐진 산사와 쌍계루, 계곡과 숲이 어우러지며 계절마다 빚어내는 풍광 또한 절경이다. 하여 옛 시인들도 ‘백암의 풍경은 그림으로도 그리기 어렵다’며 ‘천인(天人)의 솜씨’라 감탄했고, ‘남녘에서 또 다시 금강산을 구경한다’며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불렀다.특히 물 위에 떠 있는 백학봉을 품은 쌍계루(雙溪樓)가 자아내는 운치는 ‘백암 12경’ 중에서도 묘경(妙境)으로 꼽힌다. 그 풍취에 한 번만이라도 젖어 본 사람들은 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