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여하여 체가 현묘하게 되면 우뚝하여 (만가지의 인)연을 잊는다.(一如體玄 兀爾妄緣)만법을 평등하게 보게 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萬法齊觀 歸復自然)일여라는 진리의 본체는 유현해서 이로써 음미하게 되면, 견문각지상에서 구속받는 어떤 것도 없다.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는 것처럼 절대 방해되고 걸리는 것이 없음을 뜻한다. 앞 절에서 만 가지 존재는 일여하여 차별이 없다고 하였고, 이번에는 이러한 평등한 세계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세상사에 걸림 없는 참된 자아의 실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만법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대승불교의 입장이다.‘올이’는 ‘부동’의 뜻. ‘망연’은 ‘손쓸 틈이 없는 것’을 말한다. 『백장광록』에는 ‘삼조가 말하되,’라고 하여 ‘마음, 목석과 같이’라고 하여 예를
미혹하기 때문에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달으면 좋고 싫음이 없다.(迷生寂亂 悟無好惡)모든 것에 대한 두 변은 헛되이 스스로 짐작함에서 생긴다.(一切二邊 浪自斟酌)미혹한 마음이므로 언제나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겨 한없이 환영을 따르지만, 모든 존재는 정해진 모습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 좋고 싫을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본래의 마음을 잃게 되면 이원적 대립이 생기지만 깨달으면 그 대립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이원적 대립은 자신이 분별하여 헤아리는 것에 의해 일어나는 것. ‘짐작’은 본래 ‘술을 대작한다.’라는 뜻이다. 즉 ‘사정을 생각해서 정도껏 잘 배려하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자아의 분별을 의미한다. 대립된 분별은 자아의 망상에서 만들어져 나온 환상(幻想)이라는 것이다.꿈과 환상, 헛된
Q : 돈오(頓悟)란 무엇입니까? A : 돈오는 ‘즉시 깨달음’을 말합니다. 대주스님은 돈오에 대해 설명하길 ‘돈(頓)이란 단번에 망념을 없애는 것이요, 오(悟)란 얻을 바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頓者頓除妄念 悟者悟無所得)’라고 말하였습니다. 돈(頓)이란 즉시, 단박, 일순간, 단번이라는 의미입니다. 깨달음은 단계를 밟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깨달을 때는 어느 한 순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오(頓悟)’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대주스님은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에 대하여 ‘얻을 바 없음을 깨닫는 것(悟無所得)’이라고 확고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즉, 깨달음은 특이한 어떤 것을 얻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 적인 것이든 개념적인
좋아하지 않으면 정신이 피곤하나니 어찌 (도에)소원함과 친근함이 있을까?(不好勞神 何用疎親)일승을 얻고자 한다면 육진을 싫어해서는 안 된다.(欲趣一乘 勿惡六塵)참다운 수행이란 무엇일까? 다만 좌선만에 집착하게 되면 의식이 혼침해서 정신마저 지쳐 오히려 좌선수행조차 수고로울 뿐임을 강조한다. ‘본래면목’이 도인데 달리 수행을 통해 도에 가까이해야 한다든가 성글어진다던가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것이다. 친·소는 자아의 분별일 뿐 일승의 가르침을 체득하려고 한다면, 육진 즉 육경(六境)을 싫어하고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육진은 육근에 대한 객관으로써 ‘본래심’의 거울을 덮었을 때 그것은 티끌이다. 다시 말해서 육진을 싫어하여 마음을 청정히 하고자 좌선에 집착하다 보면 일종의 선에 대한 친·소가 생겨 도리어
대도는 체가 넓어서 쉽다거나 어렵다거나 하는 것이 없다.(大道體寬 無易無難)소견은 여우처럼 의심이 일어나 급하게 서두르면 더욱 늦어진다.(小見狐疑 轉急轉遲)장승업의 송하노송도(19세기)대도는 그 자체가 넓어 쉽게 가거나 어렵게 간다는 구별이 없는데, 다만 자아의 소견이 생겨나 급하게 서두르면 서둘수록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늦어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당대 방거사는 어느 날 토굴에서 좌선하고 있는 도중,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어렵고 어렵고 정말 어렵구나, 열섬의 깨가 나무 끝에서 격류하고 있구나.” 이번에는 방거사 부인이 “쉽구나 쉽구나 정말 쉽구나, 침상에서 내려와 땅을 밟는 것처럼.” 이를 듣고 딸, 영조가 말했다.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백가지 초목의 맨 끝머리, 조사의 뜻이다.” 대
경(객관)은 능(주관)에 의한 경이며 능은 경에 의한 능이다.(境由能境 能由境能)양단을 알게 되면 본래 이것은 (동일한)하나의 공이다.(欲知兩段 元是一空)최북의 관수삼매도(18세기)분별이 없고 집착이 없는 ‘일심불생’의 경계에서는 그 지반이 ‘일공(一空)’임을 밝힌다. 능은 주관이라고 하는 일심이며 경은 객관이라고 하는 환경이다. 『수능엄경』에 “소(所), 이미 망(妄)에 서면 그대가 망, 능이 따라 일어난다.”라고 한다. 능과 경, 주관과 객관의 상호성과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진여의 세계는 무법(無法)이며 무심이다. 무심 즉 무법의 세계는 지도(至道)가 현성한다. 심 즉 능이 없어지면 경도 사라지는 세계이며 경이 사라지면 능 즉 심도 사라진다. 이 둘이 사라진 곳에 이를 참된 공이라고 한다.
두 견해에 집착해서도 안되며 추구해서도 안된다.(二見不住 愼莫追尋)조금이라도 시비가 나타나면 어지러이 본심을 잃게 된다.(才見是非 紛然失心)두 견해는 간택, 증애, 순역, 위순, 등의 이원적인 분별이다. 이러한 견해의 집착은 ‘양변에 걸리는 것’이 된다. 또한 분별의 견해로 추구해서는 더욱 안 된다는 것이다. 상대적인 판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본심 즉 ‘신심’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동산록』에 이런 일화가 있다. 동산스님이 행각하고 있을 때, 관리 한사람을 만났다. 그는 지식인이면서 불자였다. 스님에게 “제자는 3조선사의 『신심명』의 주석을 쓰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스님은 “『신심명』에는 ‘조금이라도 시비가 있으면 어지러이 본심을 잃는다’고 했는데, 그대는 어떻게 주석한다고 하는 것인가”라고 한다
마음이 움직임에서 그침으로 돌아가면 그침은 다시 미동한다.(心動歸止 止更彌動)오직 양변에 걸려 있으니 어찌 한 모양을 알까.(唯滯兩邊 寧知一種)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하면 할수록 본심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우두법융은 『심명』에서 “마음의 움직임을 그치게 하면 도리어 흩어진다”고 하였고, 『종경록』에서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만 깨달음이 늦어지는 것을 우려해야 한다”고 하였다. 움직임·그침, 진·망, 유·무의 양변의 세계에 걸려 있다면 일종(一種)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한 모양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모두 공력을 잃고(一種不通 兩處失功),있음을 버리려 하면 있음에 떨어지고 공에 따르려 하면 공과 등진다.(遣有沒有 從空背空)일종을 통달하지 못하면 양변 자체의 공력을 잃게 된다는
Q: 돌아가신 분이나 멀리 떨어진 친지를 위해서 염불을 많이 하면, 그들이 극락왕생할 수 있을까요? A: 염불로부터 벌어지는 공덕의 회향은 참으로 볼 만 합니다. 비록 지금은 몸으로 만나지는 않지만, 생명의 질긴 인연으로 맺어진 그분들과 우리는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염불 속에서 한생명이 되어, 윤회를 그치고 자신의 참생명인 아미타불 즉 무한생명이고 무한광명인 자리를 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자면, 자기가 익숙했던 인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펄떡이는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육신으로 드러난 모습으로만 고정시켜 버렸으니까 말입니다. 그럼 극락왕생이란 무엇일까요?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하지만, 한 마디로 현생에서 내생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긋남이라던가 순리라던가 하는 대립의 마음, 이는 심병이다.(違順相爭 是爲心病) 심오한 현지를 알지 못하면, 공연히 염정만에 힘쓸 뿐이다.(不識玄旨 徒勞念靜) ‘어긋남’ ‘순리’라고 하는 것은 자아의 분별이며 이것이야말로 ‘마음의 병’이다. 선가에서의 ‘심병’은, 대립된 마음을 벗어나려는 것에 의해 그것이 잘못 공허하게 되어 버리는 것으로 즉 ‘공에 집착하는 선병(禪病)’을 말한다. 『이입사행론』에 “지혜로운 자는 (무일물의)물에 맡기지 (조작하는)자신에게 맡기지 않는다. 취사(取捨)도 없고 위순(違順)도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조주록』에는 “공왕(空王)을 위한 제자가 되려 한다면 마음에 병이 들어서는 안된다. 참으로 낫기 어렵다.”고 하였다. 다음, ‘불식현지 도로념정’은 『신심명』 앞머리의 ‘지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을 꺼릴 뿐이다. (至道無難 唯嫌揀擇) 좋고 싫음마저 없다면 완전하여 (모든 것이) 투명하다. (但莫憎愛 洞然明白) 털끝만큼이라도 차가 있다면 하늘과 땅만큼 사이가 벌어진다. (毫釐有差 天地懸隔) 지금 바로 체득하고 싶다면 순과 역을 두어서는 안된다. (欲得現前 莫存順逆) ‘지도(至道)’는 유가의 말이지만 깨달음으로서 사용된 것이다. 혜가스님이 보리달마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지도’이지만 그것은 구극의 실재(이입)와 규범(행입)의 양 뜻을 나타냈다. 『신심명』은, 지도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임제가 황벽의 불법이 ‘무다자(無多子. 복잡다단함이 없다)라고 말한 것이 또한 이것이다.시비-분별 떠나면 ‘지극한 도’도는 달리 있는 것이 아닌 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
Q : 법장비구가 발원하셨다는 48대원(四十八大願)을 독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그렇게 거룩하고 감사한 원은 언제 성취가 되는 것입니까? A :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법장보살은 자신이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무한성을 동시에 갖춘 아미타불이 되셨습니다. 이는 곧 아미타부처님이 되시기에 앞서서 법장비구가 발원한 48대원이 성취되었음을 증명합니다. 이는 적당히 넘어갈 사안이 아닙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막상 법장비구의 48원을 외우면서도, “법장비구야 위대하셔서 그런 대단한 성취를 이루셨겠지만 나 같이 못난 사람이 어떻게…”하면서 자신을 중생으로만 자리매김 하려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법장비구의 48원은 이미 성취되었기에, 앞으로
‘선지(禪旨)의 대요’라고 하는 『신심명』은 중국선종의 제3조 경지승찬(鏡智僧璨, ?∼606)스님의 찬술이다. 선불교가 아직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시대에서 심원한 선의 정신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146구의 운문으로 구성된 선철학의 시이다. 선의 근본적인 입장을 간명직절하게 설해 놓고 있으므로 교리마저 음미하게 될 뿐만이 아니라 종교적 정조에 잠기면서 선미에 젖게 한다.이 『신심명』의 요의는 ‘신심(信心)’두 자에 있다. ‘신심’의 심은 불심, 본래심이며 신은 결코 의심이 없는 신이다. 심을 대상적으로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 스스로가 살아가는 범부의 심이 그대로 불심임을 절대 의심함이 없이 이 몸이 바로 부처라고 확신하는 ‘신심’이다. 선불교는 달마와 혜가의 ‘안심문답’이래 심을 문제로 하고 불성
지금 생각하면 참 겁도 없었다. 법보신문의 요청을 받아들여 『천수경』에 대한 해설을 연재한 것이 1991년, 내 나이 서른 둘의 일이었다. 다시 그것을 민족사에서 『천수경이야기』라는 이름의 책으로 펴낸 것이 1992년이었다. 저술로서는 내 처녀작이었다. 그리고서 꼭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본말 속담에 “앗! 하는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라는 말이 있는데, 꼭 그와같다.30대초 처음 해설서 펴내혹시, 요즘 그 무렵의 세월을 살고 있는 제자가 있어서 경전을 강의한다고 나선다면 “좀 더 공부를 한 뒤에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가끔 사석에서 이러한 나의 소회(所懷)를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출발을 했으니까, 그 뒤의 공부가 진척된 것이 아닌가”라는 말을
Q :실로 마음이 갈팡질팡한 게 그리 믿음직스럽지 않습니다. 어느 때는 성인군자같이 넉넉하다가, 갑자기 돌변해서는 야차(夜叉)보다 더 잔인해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제 마음을 제가 모르겠습니다. A: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습(習)에 굴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힐 만큼 확연하지는 않지만, 엄청난 힘으로 일상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게 습의 정체입니다. 예를 들어 종이 자체에는 습이 존재하지 않지만, 한 번 돌돌 말아놓으면 펴놓아도 다시 돌돌 말리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프링은 본래 쭉 펴진 철사 줄이었지만, 둥근 모양을 짓고 나면 아무리 힘을 주어 눌러도 그 모양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게 습입니다.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익숙하다 보니까, 그것이 자신의 본성인 줄
내 얼굴은 거울에 비추어 볼 때 잘 보인다. 그런 것처럼 부처님 가르침 역시 다른 종교·철학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볼 때 더 잘 보이는 것은 아닐까. 힌두교의 성서,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라고 하는 텍스트는 지난 십 수년 동안 늘 『천수경』과 함께 내 사색의 실마리가 되어 주었다.힌두교 신앙과 유사힌두교 역시 해탈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해탈을 이루기 위한 길은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을까? 첫째, 스스로 완전자임을 깨달음으로 인하여 해탈을 이루는 방법이 있다. 이를 지혜의 길(갸냐 요가)이라고 하는데, “내가 곧 브라만이라” 말하는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내가 곧 부처라”고 말하는 선불교는 공히 이 범주에 해당된다. 이를 위해서는 명상이 강조되는데, 이에 대한 다른 의견이 제시된다
처음에 나는 ‘독송용 『천수경』’의 전체를 열 가지 범주로 나누었는데, 이를 천수십문(千手十門)이라 하였다. 『천수경이야기』에서 나는 전체를 열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보는 것 외에는 분류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신묘장구대다라니」만을 ‘독송용 『천수경』’의 본론으로 보면, 그 이후의 부분은 전부 유통분이 되고 만다. 그렇게 긴 유통분이 어디 있겠는가. 진언의 중심은 준제주『천수경이야기』 초판이 출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독송용 『천수경』’에 대해서도 서분·정종분·유통분의 삼분설 역시 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독송용 『천수경』’의 본론은 「신묘장구대다라니」만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하나의 편견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참회진언」 다음으로 나오는 “준제공덕 산과같으니” 부터
언어는 자비의 집이다. 『천수경이야기』에서 이미 이렇게 말한 바 있는데, 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언어 없이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나눌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 것이 언어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말을 잘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 한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언어를 자비 실천의 도구로 쓰지 못하는 모습이 나의 삶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대개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남을 비방하며…. 수많은 구업(口業)을 지으면서 말이다. 천수경은 진언 위한 경전이러한 현실이 나로 하여금 ‘독송용 『천수경』’을 새로 보게 하였다. 2000년 2월 13일, 인도 성지순례를 마치고 귀국하는 날 새벽의 일이었다. 바로 올바른, 진실한 언어생활
계율은 우리 삶과 수행의 뿌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우리는 계율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율은 우리의 욕망대로 우리가 행동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세속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불교 수행에는 계율을 그 기초로서 요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계율에 대한 의식의 정도에는 차이가 없지 않다. 예컨대, 선불교 안에서도 계와 선을 함께 닦자는 흐름이 있는가 하면 오직 선을 통한 깨달음만을 강조하는 흐름이 있고, 정토신앙에서도 오직 염불만 전수(專修)하자는 흐름이 있는가 하면 염불수행과 더불어 계율을 지녀야 한다고 보는 흐름이 있다. 회통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천수경』의 경우는 후자의 흐름을 취한다. 즉 계율의 준수/수행과 다라니의 독송을 함께 말하
‘원본 『천수경』’과 대비해서 볼 때 ‘독송용 『천수경』’이 갖는 특성 중의 하나는 참회의 강조에 있다. ‘원본 『천수경』’에서는 「신묘장구대다라니」 자체가 갖는 참회의 기능 외에 다시 참회 부분을 길게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회게」에서부터 「참회진언」까지는 모두 참회라는 주제 속에 포괄될 수 있는 부분이다.이 참회 부분 속에 이참과 사참이 모두 함께 설해져 있음은 앞에서 살펴본 그대로이다. 중국 천태종의 사명지례(四明知禮)는 바로 그러한 점에 주목하면서 그 스스로 『천수안대비심주행법』이라는 저술을 남기고 있었다. 이는 곧 천태학의 입장에서 『천수경』을 해석하고 포용하면서 새롭게 하나의 의례를 만들어서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의례는 일종의 예참(禮懺)의식이라고 평가된다.예참은 스스로 지은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