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생의 네 가지 근본적인 고통 즉 사고(四苦)에 대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사고는 생로병사(生老病死)입니다. 모든 생명은 인(因)과 연(緣)에 의해 태어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수정이 되면서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달을 있다가 아주 좁은 문을 통해 세상의 빛을 봅니다. 그러나 태어나는 과정이 고통입니다. 일단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기도 하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과정의 시작이기에 고통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고통인 생고(生苦)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한 번 봅시다. 어머니 태속의 양수와 함께 있을 때는 울 수가 없지만 일단 태어나면 소리를 한번 질러야 합니다. 인간이나 축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우는 아이들도 있지만 울지 않는
여러분이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계를 받아야 합니다. 특히 교단적 입장에서 본다면 계를 받고 불명을 받아야만 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를 받으면 그날부터 그 불명을 자랑스럽게 쓰고 계를 받을 때 약속한 것을 잘 지키는 것이 불자로서 잘 사 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계를 실천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불교에서도 계를 실천하도록 권고하는 방법의 하나로 ‘열심히 계를 실천하면 좋은 대가가 있다’고 제시하게 됩니다. 그것이 업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한 사람에게는 선의 과보가 주어지고 악행을 한 사라에게는 악의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을 틀림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응보라고 표현 합니다. 죽어도 끝나지 않는 것이 인과율 문제는 원인으로서의 선행이 선의 과보를 받을 때
새해 들어 가장 신명나는 일은 뭐니 뭐니 해도 동계올림픽에 참석한 우리선수들의 금메달소식이었습니다. 메달을 따고 좋은 성적을 낸 선수들에게는 잘했다는 칭찬과 격려가 이어졌지만 선수들 중에는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도 있습니다. 그런 선수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에는 안타까움이 적지 않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끝내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을 보면서 운이 없거나 복이 부족했다며 위로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불자들은 복을 어떻게 보아야 하고 복을 쌓는 것, 복스럽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오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아흔 아홉석 갖고도 불행한 부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다섯 가지 복, 즉 오복을 최고의 복으로 여겼습니다. 그 가운데 제일 큰
마음을 비워라, 욕심을 버리라는 말을 흔히들 합니다. 마음을 비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물그릇 비우듯이 비우는 것인가. 저는 그것이 마음의 힘 빼기라고 쉽게 설명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고정된 시각, 즉 개개인이 갖고 있는 사회적 지위, 환경, 교육, 습득된 정보 등에 의해 사물을 보고 판단을 내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저에 대해 ‘현 정권에 쓴 소리를 거침없이 하는 스님’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고정관념을 갖고 저를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뇌리 속에 저는 그렇게 입력돼 있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실망하곤 합니다. 저는 이러한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선입견의 문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입견에 대한 집착. 이명박 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 또한 내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그
오늘은 『육조단경』에 설해져 있는 복과 공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복은 닦고 도는 닦지 않으면서 복을 닦음이 곧 도라고 말한다. 보시 공양하는 복이 끈이 없으나 마음 속 삼업은 원래대로 남아 있도다. 만약 복을 닦아 죄를 없애고자 하여도 뒷세상에 복은 얻으나 죄가 따르지 않으리오. 만약 마음속에서 죄의 반연 없앨 줄 안다면 저마다 자기 성품 속의 참된 참회니라. 만약 대승의 참된 참회를 깨치면 삿됨을 없애고 바름을 행하여 죄 없어지리. 도를 배우는 사람이 능히 스스로 보면 곧 깨친 사람과 더불어 같도다.…” 『육조단경』 ‘멸죄송(滅罪頌)’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살펴보면 복을 지으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복을 받기 위해 비는 것은 기복입니다. 거듭 말씀드렸지만 복은
오늘은 입춘입니다. 입춘, 동지, 설, 대보름 등은 우리 민족문화의 중요한 세시풍속 행사입니다. 이런 세시풍속을 불교가 끌어들여 의미를 새롭게 부여했습니다. 때에 맞추어 기도 정진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법회와 연결시켜 입춘 법회를 하고 있습니다. 미풍양속을 소홀히 하지 않고 여기에 맞는 법회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이런 법회의 진정한 의미와 뜻이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정법(正法)을 드러내지 못하고 삿된 쪽으로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입춘의 불교적 의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삼재팔난을 막는 입춘대길 부적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또 이것을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부적 걸어 놓아도 삼재 극복 못해 ‘입춘’하면 잘 알려진 것이 입춘부(立春
참선을 하다보면 선열(禪悅)이 생깁니다. 보통 세상에서는 희열(喜悅)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비슷한 말입니다. 세상에는 희열이 있지만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법열(法悅)이 있고, 선(禪)을 하는 사람에게는 선열이라는 즐거움의 세계가 있습니다. 세속에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해서 부부간에 만나는 그런 즐거움도 있습니다. 이런 즐거움이 지극하여 아내가 없거나 남편이 없으면 ‘팥 없는 찐빵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속에서는 이런 남녀의 만남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차원이 달라지면 또 다른 즐거움의 세계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욕계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욕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욕계를 넘어서면 색계가 있고, 또 무색계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사선팔정(四禪八定)이라고 하
오늘은 「전심법요(傳心法要)」라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짧은 책을 갖고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전심법요」는 제가 송광사 선방에서 한 철 난 후 지대방엘 갔을 때 만난 책입니다. 그곳에는 「법륜」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그 잡지 중간에 「전심법요」가 번역 돼 실려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다가 너무 좋아서 그 「법륜」이라는 책에서 이 「전심법요」 뜯어 갖고는 집게로 집어서 겉장까지 만들어 한 10년을 걸망 안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보았던 책입니다. 이 「전심법요」는 내용이 아주 간명하고 쉽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활과 같다면 이 황벽 희운 선사의 「전심법요」는 활줄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부처님 법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일러주신, 부처님 법의 요결이라고 저는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정법 의
부산 관음사에 다녀 간지도 벌써 2년이 됐습니다. 그 때 티베트의 라닥 스님 여섯 분을 모시고 법회를 했습니다. 그 스님들과 함께 통도사와 범어사, 멀리는 송광사뿐만 아니라 해인사, 동화사도 갔습니다. 인도로 돌아가기 전 저는 한국에서 무엇이 제일 좋았는지 물었습니다. 스님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용두산 공원의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본 부산시 야경을 떠올렸습니다. 80세가 넘은 스님들이 한결같이 “여기가 극락”이라며 찬사를 보냈습니다. 전깃불을 보고는 ‘꽃’이라며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습니다. 당신들의 말을 빌리면 한국은 분명 극락입니다. 그러나 정작 극락 같은 한국에서 불만과 불신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보통 삶의 결과는 모습에 드러납니다. 대표적인 것이 얼굴입니다. 얼굴은 우리 삶의 결과물입니다
기독교는 선교의 종교인데 불교는 수행의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이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견해입니다. 불교야말로 전법의 종교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식으로 무력이라도 앞세워, 총칼로 자신의 종교 신앙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종교와 불교는 분명 다르며 그것과 다르다고 해서 전법의 종교가 아니라는 견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불교야말로 평화적이며 타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면서 법을 전하고자 하는 전법의 가르침을 갖고 있습니다. 6년 수행, 45년 전법한 붓다 그것을 부처님은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45년간을 전법하셨습니다. 부처님은 6년을 수행하고 45년을 전법하신 것입니다. 깨닫는 것이 어렵지만 그것이 6년 만에 마칠 수 있는 일이라면, 전법은 목숨이
이 자리에 오른 것은 제가 어떻게 수행을 했는지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경험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불교학을 공부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1985년 한국에 왔을 때 가톨릭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였습니다. 한국어를 3년 동안 배우면서 문화도 꼭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국의 종교 중에서 서양에 비교적 덜 알려진 한국 불교를 택했습니다. 불교 공부를 시작한 곳은 인도입니다. 불교를 이해하려면 인도의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향했는데 지금 저도 입문자들에게 꼭 인도에 갈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중요한 순례지를 돌아본 뒤 열흘 동안 위빠사나 수행에 몰두했습니다. 그것은 제 인생을 완전히 바꾸는 체험이었습니다. 각(覺)을 이루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약인정좌 일수유 (若人靜坐 一須臾)승조항사 칠보탑 (勝造恒沙 七寶塔)보탑필경 쇄위진 (寶塔畢竟 碎爲塵 )일념정심 성정각 (一念淨心 成正覺 ) 만약 어떤 사람이 정좌하여 선정 삼매에 들것 같으면 우주법계에 칠보보배를 갖고 보탑을 짓는 공덕보다 수승하니 보탑은 부서져 필경에는 티끌 한줌으로 돌아가지만 한 생각 바른 마음을 깨달으면 정각을 이루기 때문이니라.참선하라는 말입니다. 출가의 목적이 오직 도를 깨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서산대사의 게송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수많은 수행 중에 참선이 제일이니 천천만만생에 부처님 방에 앉음이 되느니라.’ 참선해야 도를 깨치기 때문입니다. 『지도론』에도 ‘계를 삼천겁을 지키고 부처님 말씀을 팔만세를 읽어도 밥 한 그릇 먹을 사이에 앉아서 실상을 생각함만 같지 못하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 현상을 볼 때면 탄소를 배출시키는 지금까지의 경제성장방식을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됩니다. 특히 특정지역의 환경오염이 지구 반대편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세계가 하나의 목표를 갖고 협력하지 않으면, 탄소 배출을 줄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되었음을 실감합니다.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려면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세계화의 흐름에 발맞추고 때로는 더 큰 고난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잘못된 비전은 생명파괴 불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까 합니다. 군대에 경상도 출신 소대장이 있었습니다. 적군과의 총격전이 벌어지자 소대장이 부하군인들에게 외쳤습니다. “퍼뜩 쑤그리!” 그러자 이 말을 알아들은 경상도
사람이 사는데 있어 행복하게 살고자하는 바람은 모두가 같을 것입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부처님의 답도 바로 ‘행복하게 산다’ 즉 ‘이고득락’이었습니다. 그럼 행복하게 살기위해서 여러분은 지금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중 상당수는 아마도 그 답을 얻고자 이 법당에 오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여러분은 우선 대장경을 더듬게 되지요. 팔만대장경이라 함은 그 속에 팔만가지나 되는 가르침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다 섭렵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읽어가다 마음을 때리는 구절이 있으면 그것을 골라 여러분 삶의 기준으로 채택 할 것입니다. 그렇게 택해진 답들이 여러분의 현찰입니다. 그리고 그 답에 약간의 힌트를 더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근본
가사정대경진겁(假使頂戴經塵劫) 신위상좌변삼천(身爲狀座遍三千) 약불전법도중생(若不傳法度衆生) 필경무능보은자(畢竟無能報恩者).가령 부처님의 말씀을 머리에 이고 모시기를 미진수겁을 지나고, 내 몸을 바꾸어 의자를 만들어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부처님을 모신다 해도, 만약 부처님 법을 전해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필경에는 부처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네. 우리가 보살이 되기 위하여 공덕을 쌓고 경전을 배워 지혜를 닦는 이유는 오직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산림법회에 동참하여 복을 쌓고 지혜를 닦는 불제자라 하더라고 여러분의 가족과 형제, 그리고 이웃에게 이러한 법석에 함께할 것을 권해야만 비로소 부처님의 은혜를 갚게 되는 것입니다. 『화엄경』을 배우는 목적은 오직 중생교화에 있습니다. 보살이 중
이렇게 많은 불자님들을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이곳 시선원에 와보니 참으로 수행하기 좋은 곳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환경을 갖지 못한 곳들도 많이 있음을 불자님들께서는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좋은 수행환경에서 정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불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불교의 전통에 대해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선불교는 우리 인간의 생과 사, 모든 인생에 큰 가르침을 주는 높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 길을 따르라고 강요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 길을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할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야할 곳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따라서 가야할 정도의 길
오늘은 우리나라에 테라와다 수행 공동체가 정식으로 탄생하는 날입니다. 그동안 테라와다를 수행하는 스님들의 수가 많지도 않았고 특별하게 조직을 구성해 이끈 것도 아니었는데 짧은 시간 동안에 이렇게 모임을 구성하게 되어 무척이나 기쁩니다. 저는 국내에 테라와다 불교가 소개되기 전에 해인사에 살면서 운 좋게 테라와다 불교정신과 위빠사나 수행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분들을 통해서도 우리나라에 테라와다 불교와 수행법이 전해졌지만 그 발단은 한국을 대표하는 율사이셨던 자운 스님이 주석하고 계셨던 해인사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테라와다 가사를 입은 시기는 1969년 자운 스님께서 스리랑카를 다녀오시며 가사 한 벌을 가져오신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저는 해인사 선방에 있었는데 편수
오늘은 제가 33년 동안 수행자로 살아오면서 수행하고 배운 것을 여러분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티베트 불교의 정수를 담고 있는 『람림(보리도차제대론)』입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어떤 단계를 밟으며 수행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가야할 길을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팔만사천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가 아주 간명하게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불법을 수행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제대로 된 스승과 올바른 관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스승은 대승의 수행자이고 모든 경전을 두루 섭렵하고 불교 가르침의 요체를 깊이 통찰한 수행자여야 합니다. 또한 스승의 삶의 방식이 그 가르침과 괘를 같이해야 합니다. 스승의 마음에는 부를
오늘의 강연 주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입니다.불교는 세계의 어느 학문, 철학과도 달리 개념적인 지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흔히 ‘알음알이’라고 하는 개념적 지식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개념적인 지식보다는 직관적으로 아는 것을 중요시여깁니다. 개념이라는 것은 내가 생각해서 아는 것입니다. 대학에 배우는 것들이 주로 개념적인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세존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불교는 직관지라고 해서 눈을 뜨자마자 아는 것, 세상이 알게 해 주는 것들을 중시여깁니다. 예를 들어 높다 낮다, 있다 없다, 길다 짧다, 이런 것들입니다. 높다 낮다, 있다 없다, 길다 짧다는 것은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음력 칠월 보름은 우란분절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란분절은 목련존자가 무간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 시방의 스님들께 공양을 베풀어 어머님을 천도하고 나아가 조상을 천도했다는데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악업을 지은 사람이 죽어 받는 고통도 크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겪게 되는 고통도 적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고통이 있지만 누구나 최후에 겪는 고통인 죽음의 고통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고통은 태어났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나고 죽음의 고통을 여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목적은 이고득락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600년경에 마명 보살님께서 부처님의 말씀 중 불법의 진리를 그대로 드러낸 100권의 경전에서 그 중요한 뜻을 간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