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오 스님 “사랑하는 부처님! 인간은 말한 마디에도 흔들리는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기분 나쁜 소리를 들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말로써 시비를 가리고자 할 것 같으면 더 큰 시비만을 불러들일 뿐 시비는 끝없이 이어진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미워하는 마음으로 내가 더 괴롭게 되고 미움은 오직 용서와 사랑으로만 끝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세상이 나를 욕하고 비방해도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겠습니다. 내 마음 속에는 오직 태양처럼 빛나는 지혜와 모든 것을 용서하는 사랑만을 담아 놓겠습니다. 그물에 걸리
▲ 정관 스님 오늘 법문의 주제는 우상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불교를 우상 숭배의 종교라고 하는데, 과연 어떤 것이 우상인지를 정확히 알게 되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우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만약 어떤 물건을 보고 우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물건을 적재적소에 쓸 수 없기 때문에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물건을 지혜롭게 쓸 줄 안다면 우상이 아니라 소중하고 귀한 물건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지가 우상입니다. 밖으로 따로 우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남의 말만 믿고 따르는 것이 우상입니다. 남의
▲ 용타 스님 법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생각해 봅시다. 불교란 무엇일까요.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고 오계(五戒)를 받아 열심히 삼학(三學)을 닦아서 성불(成佛)한 다음 중생을 제도하는 것. 간단히 정리하면 불교의 대의는 이렇습니다. 이곳 증심사의 본찰인 송광사는 보조 국사의 정신을 이어오는 곳입니다. 우리는 보조 스님이 한국에서 태어나신 것만으로도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보조 스님은 ‘수심결(修心訣)’ 하나만 가지고도 넉넉히 밥값은 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은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안거를 떠나시면서 도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속에 얼씬거리는 번뇌가 하나 있는데 이 번뇌가 얼씬거릴 때마다 집안에 꼭
▲ 붓다빠라 스님 불교가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요. 보리밥집, 국수집처럼 불교 또한 이미지가 선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교를 소비하고 사용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소비하고 사용하고 누린다는 것은 이것을 통해서 만족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화를 냅니다. 그런데 그 화의 생산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자신입니다. 또 소비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자신입니다. 화, 욕망 등은 생산자도 소비자도 나입니다. 그렇다면 2차 소비자는 누구입니까. 화가 나면 옆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비록 1차 소비자는 나이지만, 그로인한 2차, 3차 소비자가 계속 만들어집니다. 문제는 화에 대한 통제 수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화가 마음속에
▲ 방송인 이상벽 거사. 지금 하고 있는 ‘일’ 만족해야 일상에서도 행복 느낄 수 있어 저는 오늘 인생 50세를 기점으로 인생 이모작을 해야 한다, 이런 제안을 드리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나라는 남한만의 면적을 이야기할 것 같으면 미국 텍사스 주의 20분의 1 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이 작은 나라에서 세계시장 점유율이 1등을 한 것만도 300여 종류가 넘습니다. 또 200개가 넘는 나라들 가운데 무역으로 7위를 한 나라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나라이지 않나요. 현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준점에 해당하는 나이가 바로 50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평균 수명이 100세에 가까울 정도로 장수 국가입니다
▲도영 스님 멀리 창밖을 바라보니, 곳곳마다 ‘주인’이 나투어 계십니다. 여러분들 역시 ‘주인’입니다. 주인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임제 선사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수처작주(隨處作主)요, 입처개진(立處皆眞)입니다. 어느 곳을 가든 내가 주인이어야 합니다. 남의 정신에, 남의 행동에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닌 내가 주인으로서 거듭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1961년에 출가한 소납 역시 늘 화두처럼 생각한 것은 ‘도대체 깨달음을 얻는 삶은 어떤 삶인가’에 관한 자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상좌들에게는 ‘깨닫기 전에 먼저 참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조석(朝夕)으로 일렀고 그러한 믿음이 확고하였기에 ‘참 진’(眞) 자를 넣어 제자들의 법명
행복한 감정의 공통점은 좋은 느낌 행복 주체는 ‘나’ 아닌 ‘우리’돼야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말뿐이 아닌 참다운 세상의 주인이 되고 만물의 영장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과 행동거지를 가져야 할까요. 그냥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영장이라는 호칭에 상응하는 역할과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들은 부처님께서 주신 가르침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육도 윤회(六道輪廻)의 사슬을 끊고,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길을 일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한 방편들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윤회가 없는 적멸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이 필요
밥 먹을 때 밥 먹고, 잠 잘 땐 잘 뿐지금 일에 몰입 하는 게 잘 사는 법 성불(成佛)은 행불(行佛)로 부터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주인이 되어 완전 연소하자. 아는 만큼 전하고, 가진 만큼 베풀자. 행불 합시다. 오늘 여러분들께 삼보에 대한 명상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삼보에 대한 명상은 초기경전에 나오는 말씀인데 삼보에 대한 명상을 읽고, 진실에 맹세를 하면 초월적인 힘이 생긴다고 합니다. 신통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초월적인 힘이냐. 지구촌이 재앙이 줄어들어 마침내 소멸할 수 있는 힘입니다. 최근 재앙이 엄청나게 많이 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지진, 쓰나미에 이어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능 유출까지. 또 우리나라는 구제역, 조
잡스의 어법은 선사 화법과 닮아생각·권위 파괴, 고정관념 타파 단순함과 간결함은 선(禪)을 하는 미국의 CEO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빌게이츠의 프레젠테이션을 비교하면 잡스는 주로 사진을 이용한 간결한 스타일을 사용합니다. 이런 잡스의 방식은 선과 너무나도 닮아있습니다. 간결하고 여백이 많습니다. 그는 1983년 위기에 처한 애플을 구하기 위해 새로운 경영자를 영입하게 됩니다. 그 인물은 펩시의 최연소 사장 존 스컬리인데 그는 컴퓨터에 대해 잘 모르고 급여도 받을 만큼 받고 있기 때문에 굳이 옮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잡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계속 설탕물이나 팔면서 남은 삶을 보내고 싶으십니까
▲명상코칭가 김범진 여러분과 오늘 여행할 주제는 ‘통찰력의 비밀, 스티브 잡스와 선(禪)’입니다. 우선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만약 이 자리에 있다고 가정하고 그에게 “당신의 경영과 생산한 제품이 선과 관련이 있습니까”하고 묻는다면 그가 어떤 대답을 할까요. 아마도 질문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입니다. 관련이 있냐고 물으면 없다고 할 것이고, 없냐고 물으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바로 선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처음 썼던 책이 ‘행복한 CEO는 명상을 한다’입니다. 책을 쓰면서 미국의 성공한 많은 CEO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CEO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스티브 잡스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최초의 스마트
순수하게 집중된 상태가 늘 때행복이 밖 아닌 안에 있음 알아 몇해 전 문화부에서 외국인들의 한국관광과 관련해서 통계를 낸 적이 있습니다.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인데 한국에서 가장 좋았던 일에 대해 대략 70%정도의 사람들이 사찰에서의 선(禪) 체험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다시 한국을 찾는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이것 또한 좀 더 깊은 선 체험이라는 대답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 체험이란 무엇일까요. 선은 상당히 넓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깊은 선 체험을 말한다면 바로 깨달음이 되겠지요. 선이라는 것이 때로는 깨달음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선은 경중의 차
반갑습니다. 함께 수계 받고 함께 수행했던 봉은사 주지 스님과의 인연으로 오늘 법석에 오르게 됐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준비해 온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으로 법문을 대신할까 합니다. 먼저 불자라면 ‘나는 누구인가’를 항상 고민 해야 합니다. 여러분, 나는 누구일까요. 지금 보이는 이 몸이 나일까요. 아니지요. 진정한 나라면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몸은 항상 변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실체가 없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하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이니라. 무릇 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거기에 얽매이지 않으면 여래를 본다는 말입니다.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