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 가지 ‘믿음이 은산철벽’ ‘일미진중함시방’ 문구는 꾸준하고 성실한 염불수행의 뼈대가 됐다. ‘나무아미타불이 팔만대장경이다’는 내용도 알아차리는 연결통로가 되었다.‘나무아미타불’ 염불수행의 신묘함을 알리고 싶다. 48대원을 성취하시어 서방극락정토를 주관하시는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수지·칭명하며 늘 생각하는 염불수행에 대해 일반인들은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토행자의 입장에서는 ‘나무아미타불’ 한마디가 온 우주를 덮고 있는 아미타부처님 48대원의 참 뜻과 성불의 과보를 모두 온전히 포함하고 있는 완벽한 성어(聖語)다. 아울러
어린시절 어머니는 시간이 나실 때마다 양산 통도사 등 고즈넉한 사찰을 주로 다녀오시곤 했다. 친할머니는 가족들을 위해 항상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이셨다. 자연스레 부처님은 내게 수호자이자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시고 도움을 주시는 분으로 각인됐다.중학교 2학년이던 어느날 어머니께서 양산 통도사에 다녀오셨다며 한 권의 책과 붓글씨로 된 서예 1점, 염주 등 몇 가지 불교 용품을 보여주셨다. 어머니는 밝은 표정으로 통도사 가는 길에 우연히 노보살 두 분을 만나 함께 극락암 경봉 스님을 친견했고, 스님께서 책과 직접 쓰신 서예
오직 바른 스승과의 인연과 선지식의 높은 안목만이 나에게 맞는 공부를 단계별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로 늘 의심과 회의가 앞서니 여기저기 발만 담그거나 조금 하다 말면 늘 그 자리에 머물러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각산 스님께서도 언제나 강조하셨지만 수행은 늘 ‘조견오온’하는 것이다. 항상 내 몸과 마음을 살펴 반조해 보며 경전을 읽거나 수행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되돌려 써야한다. 누구나 그러하듯 일상의 곳곳에서 우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이 절에 가면 이년이
신심 깊은 불교집안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절에 나간 것도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스스로를 불자라고 생각했다. 원래 부처라는 말과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수평적 개념이 수직적인 기독교 신앙보다 월등한 진리체계로 보였기 때문이다.결혼 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당시 나는 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았음에도 문득 마루바닥에 고요히 앉아있는 나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표현 할 수 없는 내면의 외침을 따라 불교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이러한 인연의 법칙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귀국 후 돌아와서 절에 나갔으나 일상적인 법회만 왔다갔다 하며 절
물론 여전히 나는 탐행자, 진행자, 치행자다. 골고루 다 갖추었다. 욕심도 많고 화도 잘 낸다. 종종 어리바리하게 행동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욕심낼 때, 화낼 때, 어리바리할 때도 참주인공인 나는 항상 같다는 것을 예전엔 몰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은, 조금만 고민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선원에서 공부하기 전에는 몰랐다. 화를 내기 전의 나, 화를 내는 나도 결국 같은 나다. 그 ‘나’가 목종 스님이 강의시간에 내게 가르쳐주신 ‘참나’ ‘진여자성’ 임을 믿고 이해하며 조금씩 느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심한다. 이
무수한 인연으로 이어져 지금 여기 내가 있다. 나는 어떤 인연으로 불자(佛子)가 되었을까. 지난 기억의 자락들이 파노라마가 되어 온다. 이 생에 태어나서 잘한 것 중 첫 번째가 불교와의 인연임을 당당하게 밝힌다. 어린시절, 관세음보살님은 나의 해결사였다. 조금이라도 어렵고 힘들면 그저 ‘관세음보살’을 염하곤 했는데 그것은 순전히 할머니의 지극한 불심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불교와 만날 수 있었으니, 할머니의 손녀로 태어난 것에 감사를 드린다. 사실 불교는 30대까지 그저 그랬다. 어려울 때만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최후의 도피처 같은
수행을 시작한 지 2년 10개월만에 대비주 10만독을 성취했다.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는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했다. 많은 대중 앞에서 당당하게 수행기를 발표했으며 영상인터뷰도 해냈다. 그리고 법명 지안(智安)을 받음으로써 전에 있던 나를 버리고 새롭게 태어났다. ‘덕양선원’ 다음카페 수행일기 게시판에 처음으로 댓글 쓰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썼다가 지우고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 모습은 마치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려고 부리로 수없이 껍질을 쪼는 것 같았다. 그러던 내가 이제는 수행일기도 쓰고 법문 필사도 한다. 도전하는 힘을 수행으
대비주수행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5년 전이다. 큰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담임이자 생활부장이었던 선생님 소개로 대비주수행을 만났다. 선생님은 당시 3학년인 아이의 문제로 상담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긴 상담 끝에 선생님은 내게 책 한 권을 주셨다. 그분은 교육현장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전법하는 수행사례로 ‘법보신문 무진등’에 소개된 조미경(수일) 선생님이다. 책은 일산 덕양선원 법상 스님의 법문 중 ‘대비주수행’에 관한 것들을 엮은 책이었다. 책에는 다양한 수행 사례들이 있었지만 모두 다 내 이야기 같았다. 책을
참회를 거듭하니, 모든 인연에 대한 감사함이 마음속에 가득 차올랐다. 나약한 존재로 여겼던 나에 대한 참회와 동시에 용기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커졌다. 염불하며 정진했던 천일동안의 기도는 지금껏 살아온 모든 날 중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스님과 함께 한 천일동안 자연스레 예불의식을 익혔고, 어려웠던 경구들도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천수경’의 ‘無爲心內起悲心 (함이 없는 마음 중에 자비심 내어)’과 ‘願我恒隨諸佛學 (부처님을 따라서 항상 배우며)’이라는 두 경구(經句)가 나의 원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경
모두 코로나로 힘들고 지쳐가는 가운데 나는 날마다 부처님의 은혜 속에서 살려지고 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 작지만 소중한 신심이 전해지길 바라본다. 한없이 부족한 내가 힘든 모든 이에게 희망과 용기를 드릴 수 있기를 매일 기도한다.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데면한 시어머니의 이끌림에, 마지못해 사찰을 방문했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나와 부처님과의 인연의 시작이 아닌가 생각한다. 시어머니 따라 절을 방문하게 된 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지내며 1년에 한두번, 스트레스가 심할 때마다 절에 갔다. 아
참선과 법문을 마치고 나면 10명 내외로 짜여진 조에서 도반들과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선원에 나오지 않는 나머지 날은 제일 조용한 방 안에서 최소 40분 정도를 앉았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시간표에 자율적으로 기록했다. 저녁에 일정이 있으면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잠시라도 한 점을 찍고 집중하려 했다. 몸이 너무 안 좋거나 피곤할 때는 방석이 아닌 의자에 앉아서라도 참선하려 했기에 나름 포기하지 않았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시간표를 채워나갔다. 그래서 몇 달 뒤, 기초반을 수료하던 날에는 무엇이라도 얻은 양 자신
즉금차처(卽今此處). 이 4자를 오롯이 이해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을까. 아니, 완벽하게 받아들이려면 몇 년이 더 걸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그 시간을 금강선원에서 혜거 스님, 참선반 및 청년반 도반들과 함께 보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보낼 시간이 힘들지 않을 것이라며 매번 감사하고 있다. 어릴 때는 어떤 종교에도 관심이 없었다. 부처님오신날처럼 공휴일이 주중에 걸리면 하루라도 더 놀 수 있길 기대하며 살았다. 그렇다보니 금강선원이 위치한 동네에서 30년 넘게 살았음에도 그 존재를 전혀 몰랐었다. 간혹 “금
참다운 수행이라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각산 스님의 ‘안반수의경’을 듣고나서다. 오랜세월 수행했지만 풀리지 않는 답답한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공부를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강의를 듣는데 용어가 낯설고 생소해 교학에 무지함이 부끄러웠다. 그후 참선법회에 참석해 지도에 따라 실참했지만 이상하게 숨이 가쁘고 불편했다. 스님은 “잘하려 하지 말고 숨쉬는 것을 알아치리기만 하라”고 말해주셨다. 어느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스님 글을 읽던 중 “마음의 드론 띄우고” 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글귀를 생각하며 내
내가 불교를 만난 것은 돌아가신 시아버님 시신을 둘러 친 병풍 앞이었다. 2대 독자의 외며느리로 그것도 막내며느리가 된 나는 6개월 정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산 것 외에 크게 정을 느낄만한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보내드려야 하나’ 생각하던 중 누군가의 지장보살을 부르면 좋은 곳으로 간다던데라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나는 지장보살을 고성으로 부르고 있었다. 하루는 스님이 먼데서 매 재를 어떻게 오냐며 ‘금강경’을 한편씩 독송하라고 했다. 그래서 가족들을 앉혀놓고 재 때 마다 ‘금강경’ 한편을 읽었다. 막재를 지내고 온 날, 꿈에 시아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49가지’를 수행주제로 다루며 ‘MS버킷리스트 49’를 작성했다. 이중에 ‘시부모님께 애교 부리고 용돈 받아보기’가 있는데 시어머니의 기억이 희미해져서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도 진심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해 생신날 편지를 써 읽어드리니 곁에 있던 시누이가 어머님 대신이라며 용돈을 주었다. ‘리마인드 웨딩’도 잊지 못할 성취다. 전에는 남편 얼굴도 쳐다보기 싫었는데 지금은 그 마음이 다 녹고 더 편안하고 환하게 웃고 있다. 어느날 남편의 건강이 악화돼 수술을 해야했다. 사업이 악화되면서 남편에 대한 주변의 여러
일산 덕양선원을 찾은 것은 2015년 3월1일로 내 인생이 최상의 길로 들어선 날이다.일찍이 교직에 몸을 담고 평탄하게 사는가 싶었는데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고 시부모님이 번갈아가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면서 집안이 통째로 흔들렸다. 젊지 않은 나이에 0점도 아니고 마이너스에서 다시 시작하려니 경제적으로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비슷하게 시작한 주위의 동료들과 자꾸 비교되면서 속이 상하고 우울했다. 또 거리가 먼 학교로 발령 받아 장거리 통근, 살림, 병간호 등 많은 일을 해내야 하는 상황을 몸이 감당해내지 못해 결국 한동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완전한 믿음은 수다원이 성취될 때 생긴다. 왜냐하면 부처님 궁극의 가르침인 열반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열반을 경험하지 못한 일반 수행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믿을 수 없고 본인의 성취 수준으로만 믿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에 대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에 대해 더 많이 느낀다. 나도 처음 이 공부 시작할 때 가르침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부를 하면서 절실히 알았다. 불교의 믿음이란 맹목적 믿음이 아닌 가르침을 수행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머니께서 불자라 어릴 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절에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어머니와 절에 같이 가면 어머니는 “나와 관세음보살님이 인연이 많다”고 하시면서 불상에 절을 하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다른 종교에도 관심이 생겨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다.되돌아보니 내가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어릴 적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음이었다.답을 찾고자 한 이유는 엄격하셨던 부모님께서 바른 윤리에 대한 가르침을 자주 주셨기 때문이다. 내면 속
수행을 시작하고 힘들었던 것은 잠이다. 쏟아지는 잠이 대비주 수행을 방해했다. 수행 전에는 몸이 아파 누워지내니 그랬다지만 몸이 회복되고 나서도 야속하리만큼 잠이 쏟아졌다. 마음은 대비주 한 독이라도 더 하고 싶은데 잠이 나를 계속 재웠다. 또 다른 하나는 무력감이었다. 몸이 아프니 세상살이와 사람들이 싫어지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그룹상담을 받았는데 ‘무력증’이라고 했다. 대비주 수행을 하며 무력감의 원인을 알게됐다. 직장생활 당시 주변에 일을 잘하거나 승진하는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는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속마음엔 그 사람의 단점
“건희주 불자님, 깊은 잠재의식까지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 자성불 찾기 수련이 있어요.”2017년 7월 강화 보문사에서 봉사하며 인연이 된 도반으로부터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자성’이란 단어가 훅 들어 왔다.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는 불자로 살아온 지 20년이 넘었지만 현실도 마음도 무척 힘들었던 때였다. 2017년 7월 25일. 문자 한 통의 인연으로 덕양선원에 처음 방문한 날이다. ‘7일7야 자성불 수행’이 봉행되고 있었고 둘째 날이라고 했다. 오전 9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 수행하고 이후의 나머지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