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스님 시 정신 이어 사찰 전답 소작인 분배 ‘신앙이 곧 시’ 강조 ‘나도 푯말되어 너랑같이 살고 싶다/ 별 총총 밤이 드면 노래하고 춤도 추랴/ 철 따라 멧새랑같이 골속골속 울어도 보고.…’(나도 푯말되어 살고 싶다 中) 지금으로부터 꼭 14년 전인 1989년 8월 31일은 불교계 원로이자 한국시조문학계의 큰별이었던 철운 조종현(1904∼1989) 스님이 입적한 날이다. 스님은 구한말 격동기에 태어나 불교와 시를 등불 삼아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치며 시처럼 살다가 극락정토로 떠난 것이다. 가람 이병기, 노산 이은상 선생의 뒤를 이어 현대시조의 중흥에 있어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종현 스님은 승가교육과 경전 번역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190
85년 9월 비구니회 출범 1985년 9월 5일 울산 울주군 가지산 석남산에 승가는 물론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한국불교전래 1600여 만에 명실상부한 비구니회가 본격 출범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60년대 말 몇몇 비구니 스님들에 의해 ‘우담바라회’가 구성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덧 활동은 유야무야해진 상태였다. 이날 모임의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이가 바로 가야산 보현암 혜춘 스님(慧春, 1919∼1998). 평소 비구니의 사표로 칭송받던 스님이 회장으로 추대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푸대접 받던 비구니들에게 늘 용기와 희망이 되어 주었던 까닭이다. 초대 회장을 맡은 혜춘 스님은 비구니들의 정체성의 확립과 종단내 위상을 높이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75년 9월 9일 입적 지난 8월 31일 서울 남산에 위치한 대원사에서는 고 장경호(1899~1975) 거사를 뜻을 기리기 위한 작은 추모행사가 열렸다. 입적 28주기를 맞아 가족들과 후학들이 함께 한 이날 행사에서 송석구 전 동국대 총장은 “거사님은 재가불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위대한 선지식”이라며 장경호 거사를 회상했다. 장 거사는 일제 암흑기를 살며 역경에 굴하지 않고 동국제강 등 기업을 통해 한국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대원회와 대한불교진흥원을 비롯해 오늘날 불교방송이 있도록 토대를 마련한 입지적인 인물이다. 1899년 9월 10일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17세 때 동생의 죽음을 지켜보며 불교에 귀의했다는 그는 한 평생 재가수행자로의 삶을 일관되게 살
85년 9월 16일 입적 백봉 김기추(1908~1985) 거사는 한국의 유마거사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50세를 훨씬 넘어 불교에 입문했지만 용맹정진으로 큰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20여 년간을 후학지도와 중생교화에 힘쓴 위대한 선지식이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등 격동의 세월을 살아야 했던 사람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마는 백봉 거사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던 이도 드물다. 1908년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1923년 부산제2상업학교에 입학, 뒤늦게 설립한 일본계 학교를 ‘부산제1상업학교’라고 하는데 반발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하며 수난의 세월은 시작된다. 20세 때 부산청년동맹의 3대 위원장직을 맡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1년 형무소에 수감되고, 만기출소 후
1961년 9월 28일 입적 고봉(1890∼1961) 스님은 현대 한국 선불교를 대표한다. 평소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한 고봉 스님은 근대 선불교를 이끈 선지식이며, 쇠망하는 국운을 만회하려 애썼던 위대한 독립투사로 그 명성이 드높다. 고봉 스님은 1890년 9월 29일(음력) 대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 자손으로 태어나 여러 학문을 두루 접한 고봉 스님은 당시 젊은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사회적 혼란을 평정할 독립운동가가 되기를 마음먹는다. 그리고 독립운동으로 인해 행여 집안에 누를 끼칠 것을 염려해 혈족과의 인연을 끊을 수 있는 출가를 결심한다. 1911년 9월 고봉 스님은 양산 통도사에서 혜봉 선사와의 만남으로 불가(佛家)와의 인연을 맺는다. 그러나 혜봉 선사와의 만남으로 그의 입산
1927년 10월 12일 입적 “그대의 일찍 가심은 그대의 앞날을 위하여 애통함을 금할 수 없거니와, 황폐한 우리 불교계를 위하여 더욱이 비탄을 억제할 수 없구나. 석원(釋苑)에 가을이 늦어 불일(佛日)이 스러지려할 때 그대조차 입적하니, 등을 이을 자 그 누구며 빛을 돌이킬 자 그 누구냐.”(재일본 조선불교청년회) 범란 이영재(1900~1927) 스님이 스리랑카의 한 사찰에서 운명을 달리했을 때 조선의 불교계는 비탄에 빠졌다.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물론 국내외 조선불교청년회들은 고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추모법회가 잇따라 개최했으며, 좥불교좦 좥금강저좦 좥조선불교좦 등 불교지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특집 글들이 게재됐다.
인도철학 대중화 견인 1986년 10월 14일 입적 혜안 서경수(1925∼1986) 박사는 긴 수염과 반짝이는 대머리의 외모만큼이나 학계에서는 당대의 기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국내 최초로 인도 네루대에서 5년 동안 한국의 언어, 역사, 문화 등 한국학을 가르쳤던 인도철학자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인도불교철학을 국내에 대중화시킨 장본인이었다. 또 종교간의 대화가 전혀 없던 70년대 후반 불교와 기독교간에 ‘종교대화’를 처음으로 시도함으로써 동서양 종교의 비교연구에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1925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난 서 박사는 나라 잃은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 늘 개탄하며 ‘우리 고유의 것을 지키겠다’는 민족 주체성을 가슴 한구석에 키우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일
88년 10월 17일 입적 평생을 병마와 싸우면서도 불교학의 끈을 놓지 않았던 병고(丙古) 고익진 교수는 한국불교학이 초기불교에 눈을 뜨게 한 선구자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초기불교에 대한 연구가 미천했던 1970년대 한국불교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학자 고익진은 그의 석사 논문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를 통해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불교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이후 그는 한국불교가 가지고 있는 병폐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새로운 대안을 제안함으로써 한국불교가 나아가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1934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53년 전남대 의과대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고 교수는 대학에서 갑작스럽게 발병
69년 11월 3일 입적 근·현대사를 거치는 동안 한국불교에 있어 지암 스님만큼 지대한 공헌을 한 스님도 별로 없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지암 스님은 현 조계종의 모체가 되는 조선불교 조계종 창립을 주도하는 등 종단의 중대사를 이끌었음에도 친일행적으로 역사적 평가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1884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난 지암 스님은 13세 되던 1896년 양양군 명주사에서 출가해 곧이어 월정사의 해천월운 스님을 시봉하며 월정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런 가운데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약탈을 강행하던 중 월정사 또한 수십만 정보의 땅을 모두 잃게 될 위기에 빠지자 당시 30세의 젊은
91년 11월 6일 입적 1991년 11월 6일, 법운 이종익 박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불교계에서는 수행과 포교의 모범이었던 선지식이 입적했다며 대단히 안타까워했다. 이 박사는 근대 한국불교학 제1세대로 보조지눌, 보우 스님 등을 비롯해 불교사의 그늘에 묻혀 있던 한국천태종의 역사를 양지로 끌어올렸으며, 종단개혁과 발전에도 헌신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50~60년대 이 박사와 함께 정화에 참여했던 조계종 전 총무원장 월주 스님은 훗날까지도 “법운 거사님은 실로 현대 한국불교사를 위해 큰일을 하셨고, 현대 한국불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셨다”며 “고인께선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정력으로 학문과 저술, 불교혁신운동과 포교, 대중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많은 일을 하셨다”고 평가했다.
이 땅에 나툰 구마라집 화신 80년 11월 17일 입적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유행가 가사가 아니더라도 사람의 향훈처럼 깊고 은은한 게 또 있을까. 특히 한평생 자신을 돌보기보다 다른 이를 위해 살았던 분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불천 운허(佛泉 耘虛) 스님은 상좌 월운 스님이 일컫듯이 ‘나라를 위해선 애국인, 후배를 위해선 교육인, 자신을 위해선 수행인, 고금을 통한 지식인으로 실로 우러르면 더욱 높고, 두드리면 더욱 깊으신 분’이었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조국이 일제에 의해 스러져감에 따라 분연히 일어났다. 그는 신혼의 단꿈을 뿌리치고 홀로 이역만리 만주벌판에서 대동청년단, 서로군정서, 광한당 등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해 투쟁을 벌였다. 또 역사를 바라보는 긴 안목으로
1946년 11월 13일 입적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선맥의 기운이 스러져가던 한국불교를 일으킨 사람이 경허 스님이라면 그의 제자 만공 스님은 스승의 선지를 계승해 선풍을 진작시키고 선종의 골격을 형성시킨 선지식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계율을 강조하고 선 수행을 진작시켜 한국불교 선종의 맥을 이어가면서도 일제에 맞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스님이기 때문이다. 1871년 전북 태안에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난 만공 스님은 83년 김제 금산사에 있는 불상을 처음보고 크게 감동하면서 불법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후 스님은 이듬해 공주 동학사를 찾은 경허 스님을 만나면서 서산 천강사에서 태허 스님을 은사로 경허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월면이라는 법명을 받게 된다. 이후 스님은 ‘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