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의 가을.쌍계사 새벽예불을 마치고 육조정상탑전(六祖頂相塔殿)이 봉안돼 있는 금당(金堂)으로 향했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도량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금당까지 길게 놓인 돌길! 성스러웠다. 중국 남종선(南宗禪)을 이끈 육조 혜능 스님에게 연결된 태고(太古)의 탯줄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참배 때마다 마주했지만 이토록 압도적으로 느껴보는 건 처음이다. 돌바닥에 그대로 엎드려 연거푸 일곱 번의 절을 올렸다. 고개를 들었다. 기둥에 걸린 육조 혜능 선사의 선시가 새겨진 주련이 시야에 명징하게 잡혔다. 菩提本無樹(보리
2020년 9월3일 새벽 2시 태풍 마이삭(MAYSAK)이 부산·경남에 상륙했다. 해발 1189m의 재약산(載藥山) 깊은 골짜기까지 휘몰아친 폭풍은 산사 일주문 앞 거목들의 뿌리를 뽑아내고는 전각, 삼문(三門), 담 등을 파훼시켜 갔다. 무자비한 바람에 도량 내 45개 건물 중 30여개가 대파됐다. 4일 오전 10시 대웅전 앞에 섰다. 전면에 보이는 범종루는 운판, 목어, 법고, 범종의 소리들을 삭이며 숨죽이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용마루에서 처마에 이르는 지붕 대부분이 파손돼 있었다. 작은 담과 함께 산내의 공간을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삼계도사(三界導師) 사생자부(四生慈父) 시아본사(是我本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해인사 대중의 새벽예불 소리가 가야산을 휘돌았다. 어제 갓 입산한 청년도 대적광전 한 구석에서 절을 올렸다. 예불은 태어나 처음이었기에 스님들이 절 할 때마다 곁눈으로 보아가며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었다. 어색한 몸짓의 연속이었지만 불보살을 향한 수행자들의 찬탄 소리가 깊어질수록 환희로운 경이감에 사로잡혀 갔다. 학창시절, 서울 성수동 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의 건국대 부속중학교에 가려면 ‘일감호(一鑑湖)’를 지나야 했다
‘푸른빛 나는 보석이 박힌 보관을 쓰고, 목걸이를 하고, 허리와 목을 꺾은 삼곡(三曲) 자세를 취해 부처님을 시봉하고, 왼쪽 팔뚝에는 끈을 묶어 고귀함을 상징하고, 오른쪽 손에는 하얀 연꽃을 들고 아래를 그윽하게 내려다보시는 보살의 시선은 거룩한 침묵 속에서, 온 중생들을 연민해 마지않는 대비(大悲)의 모습 그 자체이다.’(각전 스님 저서 ‘인도 네팔 순례기’ 중)‘인도 서부 아우랑가바드(Aurangabad)의 아잔타 석굴(Ajanta Caves)에 들어섰다. 가로 35.7m, 세로 27.6m 규모의 제1굴. 중앙광장을 둘러싼 20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본부장 월우 스님, 이하 민추본)가 4월18일까지 부처님 자비정신을 바탕으로 남북의 평화와 통일, 민족화해의 서원을 담은 ‘평화통일발원문’ 공모전을 실시한다.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누구나 참여 가능한 이번 공모전은 발원문 또는 기도문을 출품하면 되고, 형식은 자유다. 원고분량은 200자 원고지 8~10매 내외로 글씨크기 14포인트(바탕체, 줄간격 160%) 기준 A4용지 2장 분량이다.주제는 △남북 간 평화와 통일, 화합과 협력을 서원하고 공존·상생의 메시지를 담은 내용 △남북 간 평화와 화합을 위한 남북불
오산(鼇山)에서 떠오른 달이 휘어진 섬진강을 넘어가려 한다. 밤새 내려앉은 11월의 달빛에 암자의 새벽은 더 깊어진다. 멀리 내다보이는 산하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완전함과 온전함 사이의 간극을 체득한 때부터 시작됐다.1998년 태국으로 떠났다. 선방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완벽한 낯섦에 자신을 떨어트려 거기서 이는 파문을 안아보고 싶어 떠난 길이었다. 정한 곳은 없다. 발 닿은 데로 가고 싶었던 곳이다. 날 것 그대로 보고 싶어 큰 사원을 지나 산속 깊
‘몸을 풀어서/ 누에는 아름다운 비단을 짓고// 몸을 풀어서/ 거미는 하늘 벼랑에 그물을 친다.// 몸을 풀어서,/ 몸을 풀어서,/ 나는 세상에 무얼 남기나.// 오늘도 나를 자빠뜨리고 달아난 해는/ 서해바다 물결치는 수평선 끝에/ 넋 놓고 붉은 피로 지고 있는데.’ (이수익 시 ‘오체투지’ 전문)인도의 오월은 뜨거웠다. 들이킨 숨 내 뱉기도 버겁다. 그렇다해도 오체투지 10만 배만은 멈출 수 없었다. 서울 서소문 지방검찰청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 통근버스 안 법원 여직원들의 담소를 들으며 광덕 스님(光德·1927∼1999) 존재를
2020년 동짓날, 극락세계에서 법을 설하는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도량에 서 있는 지장보살상의 품을 지나 허름한 계단을 오른 찬바람이 무량수전을 밝히는 촛불에 닿았다. 흔들리는 촛불 사이로 ‘말 없는 말’이 흘렀다.“21년 지장기도를 지금 시작합니다!”세납 6살 때 아버지는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공양주를 자처한 어머니를 따라 대전의 한 작은 절에 들어서고는 그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가슴은 늘 먹먹했다. 가난해서 먹먹했고, 절에만 머무는 것도 먹먹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는 자괴감에 분노도 일었다.어느
고요했던 고운사에 선풍(禪風)이 휘몰아 쳤다.(1980) 통도사 극락선원, 묘관음사 길상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해 온 현봉근일(玄峰勤日) 스님(현 고운사 조실)이 주석하며 승가는 물론 재가불자들에게도 참선의 길을 열어 보였는데, 월말이면 어김없이 참선법회를 열어 철야정진으로 이끌었다. 안동대 미술학과에 입학(1979)해 불교학생회에 가입한 청년은 2학년 때 고운사를 찾아 큰스님을 처음 친견했다. 선기 충만한 세납 40대의 근일 스님 위모(威貌)는 고산 속 설원을 활보하는 호랑이를 보는 듯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이뭣고’ 화두를 받
근세의 선지식 향곡(香谷) 선사는 주장자(拄杖子) 하나 걸어 두고 부산 묘관음사에서 눈 푸른 납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한 자루 지팡이를 청산에 걸어 두었나니(一條拄杖掛靑山)/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또한 물건도 아니네(非心非佛亦非物)/ 그대 이 속을 뚫고 지나간다면(有人這裡透過)/ 기나긴 세월 가도 언제나 깨어 있으리(塵劫圓明長不昧).’ (석지현 역)법원(法遠) 스님이 그 앞에 섰다. 절을 올리고 게송(偈頌)을 내보였다.‘이 주장자 이 진리 몇 사람이나 알겠는가(這箇拄杖幾人會)/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알지 못하누나(三世諸佛總
‘…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은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 (이원규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에서)산사 풍광에 매료됐거나 산중의 스님들을 동경해서가 아니었다. ‘책 한 번 실컷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 챙겨 지리산으로 걸음했었다. 매월 초삼일이면 어머니와 함께 손전등으로 어두운 길을 밝히며 고성암을 올랐던 게 불연의 전부였다. 강진
‘모난 돌이 바다로 가려면모난 곳이 다 닳아서둥글어져야 한답니다.누군가의 흉허물이 보이십니까?아직 바다는 멀었습니다.’2017년 12월 부산 지하철에 게시된 글판 ‘풍경소리’에 실린 범일 스님의 ‘모난 돌’이다. 김형중 전 동대부여중 교장(문학박사)은 법보신문에 연재한 ‘내가 사랑한 불교 시’에서 선적 품격을 유감없이 드러냈다며 이 글을 ‘시’로 채택하고 감상평을 내놓았다.‘처음부터 성자는 없다. 누구나 흉허물이 있다.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사람, 고질적인 자신의 허물을 수행으로 극복하는 수행자는 언젠가 청정한 마하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