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대 호국사는 저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제가 1989년 당시 군승단장을 맡고 있을 때 여러 우여곡절 끝에 계룡대 호국사가 지금의 늠름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됐지요. 오늘 이 곳 호국사를 찾은 여러분들께 저는 불교의 핵심사상인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을 전할 생각입니다.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입니다. 인연법 자각, 실천이 지혜로운 삶 지혜와 자비는 풍진 세상을 굽어보며 훨훨 하늘을 날고 있는 새의 양 날개에 비유할 수 있지요. 지혜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며, 자비는 열반과 해탈을 목표로 수행하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동력과 같은 것이지요. 지혜와 자비 실천을 위해서는 인연법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설하신 불이법과 원융무애한 동체대비의 자비사
우리는 하루 세끼 밥을 지어 먹습니다. 요즘은 주방 시설이 좋아졌지만 예전 시골에서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법을 지었습니다. 솥에 쌀을 안치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열을 가해서 밥을 짓는 것입니다. 솥 안에 쌀을 안쳐 놓았다 해서 밥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불을 때서 열이 가해져서 솥 밑을 뜨겁게 데워야 밥이 된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생설계를 갖고 있습니다. 나름의 사고방식,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는데 자신의 설계, 인생관에 따른 여러 계획들이 이뤄지도록 정성을 다하며 잘되기를 바라는 원력을 갖지 않으면 계획이 아무리 좋았다 하더라도 잘 안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누가 얼마만큼 정성을 기울이느냐, 즉 정성의 도수가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적
오늘의 강의 주제는 ‘공부를 왜 하는가’입니다. 저는 사물을 바로보기 위해,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바로보기 위해서 공부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달이 밝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달이 밝은 것이 아니라 해가 밝게 비추는 것입니다. 수 없이 달을 보면서도 햇빛이 밝게 비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달이 밝다는 생각만 합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해가 달을 비추는 것임을 쉽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생각을 하면서 봐야 사물을 바르게 알 수 있지 단순히 눈으로 본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사물 바로 보기위해 공부해야 살아있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은 물론이며 동물, 식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박테리아도 있습니다. 밖에 나무가 하나
신심은 절에만 다닌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불법을 깨닫고 부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에도 부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있는가 하면 오랜 시간이 흘러도 부처님 가까이 갈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신심이라는 것은 절에 일찍 와서 오래 믿었다고 해서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의 눈이 넓고 깊어져서 지혜로운 눈으로 거듭났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지혜로운 모습으로 거듭났을 때 신심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눈 닦아야 신심있는 것 그런 신심을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깊은 신심을 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런 수행을 하기 위한 전 단계로서 부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배우고 알아야 하며 특히
기독교와 불교는 우리나라의 양대 주류종교입니다. 수는 불자들이 더 많지만 기독교인들은 신자라는 정체성과 응집력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어서 사회적 영향력이 불교보다 더 크게 보이기도 합니다. 두 종교가 이렇게 막상막하의 세력을 갖고 하나의 사회 속에 공존하는 모습은 그 어느 나라에도 없습니다. 매우 희귀한 상태이고 우리 사회가 갖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저는 두 종교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이 두 종교가 보다 심층적이고 창조적으로 만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종교는 역사를 통해 계속 발전하고 변화해 왔습니다. 다양한 사상, 이질적인 사상이 만나면 오히려 역사적으로는 창조적인 사상, 세계를 주도할 만한 사상이 나오곤 했는데 우리는 차이만 보고, 대립만 보고 피상적인 이해만 하다 보니 그런 것이 나오질 못하
부처님 진신사리를 친견하는 이 뜻 깊고 역사적인 자리에 이처럼 많은 분들이 함께하셨으니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미륵사지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는 유구한 역사의 성지입니다. 그럼에도 이곳에 봉안돼 있던 진신사리가 1370여 년 동안 발굴되지 않고 이제야 그 장엄한 진신을 드러냈으니 참으로 희유하고 감격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국 서안에서 병마용이 발굴될 당시 세계가 흥분했듯이 오랜 세월의 풍파와 시련을 무사히 이겨낸 문화유산이 그 모습을 드러낼 때면 늘 세계인이 함께 기뻐하곤 합니다. 이곳 미륵사지에서 사리와 장엄구가 출연했을 때에도 전 국민이 기뻐했으며 세계가 그 장엄함에 감동했습니다. 사리는 부처님 유골이자 제일의 복전 사리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며 남기신 법신입니다.
여러분은 사후를 아십니까. 죽는 과정, 그리고 태어나는 과정을 아십니까. 여러분이나 저나 어차피 죽습니다.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죽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죽어서 끝날 문제 같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끝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 생전예수재가 있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되면 요즘은 대부분 병원에 입원을 합니다. 그 후 몸이 점점 더 쇠약해져서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되는데 그것을 흙의 요소가 무너졌다고 합니다. 우리 몸은 흙, 물, 불, 바람, 허공, 이 오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흙은 뼈나 피부, 내부의 장기를 구성하는 요소이고 물은 피나 침 같은 체액, 불은 체온, 바람은 기운의 요소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요소입니다. 허공의 요소는 몸이
오늘은 말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왜 말을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말을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입이 있으니까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심심하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말을 왜 하느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분분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을 하는 목적, 말을 하는 취지의 본질은 의사소통일 것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하는 어떤 목적이 뚜렷하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른 언어를 통해 상대방에게 전달되어야 그 말에 대한 반응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말은 소통과 교류의 매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사회적 관계는 이 말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지속되고, 유지된
귀로 듣고 눈으로 본다고 하지만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보는 놈이 눈이 아니고 듣는 놈이 귀가 아닙니다. 그러면 보고 듣는 이놈은 누구입니까. 누구긴요, 마음이지요. 그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일념으로 찾아 들어가는 것을 참선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이렇게 큰 도량이 문을 열고 법화산림의 법석이 마련되어 여러분이 모인 것을 보니 여러분 모두가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법화경에서 설하고 있는 말씀도 여러분이 곧 부처라는 점입니다. 너도 부처고 나도 부처입니다. 그것이 법화경의 내용입니다.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 즉 이 몸이 부처라는 말입니다. 법화경에서는 ‘너희도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고 이해하고 행하면 부처의 길을 간다고 했습니다. 법화경의 정확한 명칭은 묘법연화
많은 분들이 법화경을 공부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법화경을 공부하시면서 왜 그렇게 이름 지어졌을까하고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부처님 당시의 언어 산스크리트어로 법화경은 ‘묘한 백년의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중국 사람들이 ‘묘법연화경’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부처님의 경전은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연꽃을 상징해서 제목으로 쓴 경전은 흔치 않습니다. 연꽃에 어떤 의미가 있어서 ‘묘법연화경’이라 했을까요. 아마도 여러분들이 이 뜻을 아시면 ‘아, 법화경에 이런 의미가 있구나’하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연꽃은 반드시 진흙 속에서 핍니다. 연꽃이 진흙 속에서 피어 이파리를 붙인 후에 꽃이 올라오는데, 흙탕물이나 더러운 물 하나도 용납하지 않아 물이
오늘 원심원사에서 열리고 있는 이 법회는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귀한 자리입니다. 금강경, 열반경, 법화경 등 여러 경전에 나오는 많은 법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법문만을 덕 높으신 스님들이 법석에 올라 설해주시는 인연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역사가 깊고 그 영험 또한 높기로 유명한 고찰 원심원사를 복원하겠다는 주지 스님의 원력에 여러 대중들이 그 뜻을 함께 모으고 있으니 이 보다 더 귀한 법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법회는 선망부모와 무주유주의 모든 영가들을 위해 봉행되고 있는 천도재 가운데 마련된 것이기에 많은 영가들도 이 법문을 듣겠지만, 이 자리에 동참하신 모든 분들도 마음으로 새기고 실천으로 옮기는데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영가를 위해 재를 올리면 그 공덕의 7분의 1만이
‘제법종연생 제법종연멸(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이라.’ 모든 법은 인연에 따라 이뤄지고 인연이 다 되면 흩어집니다. 부처님 말씀에 소매 끝만 스쳐도 500생의 인연이라 했으니 같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인연이겠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인연으로 만났으니 서로 돕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인연을 다 놓아버리면 고요하고, 인연에 자유로우면 해탈입니다. 해탈하고자 하면 깨우쳐야 하고 깨우치려면 그릇이 커야 합니다. 허공을 담고, 우주를 담을 수 있을 만큼 큰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우주는 다 못 담더라도 지구는 삼킬 수 있을 만큼 큰 그릇이 된다면 사상과 이념,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고 해서 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큰 그릇을 만드는가. 믿음이 있어야
부처님이나 스님들이 하시는 말씀을 법문이라고 합니다. 이 법문이란 글자에는 ‘글월 문(文)’이나 ‘들을 문(聞)’을 쓰지 않고 ‘문 문(門)’자를 씁니다. 이것은 이 말씀이 읽을꺼리나 들을꺼리가 아닌 법으로 향해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귀로 들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글로 써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직접 걸어 들어가야 되는 문입니다. 또 그 문은 반드시 스스로 통과해야 하는 실천의 문이기 때문에 ‘법 법(法)’자에 ‘문 문(門)’자를 써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임을 뜻합니다. 어느 집에나 다 문이 있고 또 그 문으로 들어갈 때는 노크를 한다거나 인사를 한다거나 인기척을 하는 등의 적당한 예절과 절차가 있듯이 절에 오시기 위해 절문을 통과할 때에도 여러분이
이렇게 모두 한자리에 모여 법을 나눌 수 있어 무척이나 기쁩니다. 여러분들로부터 ‘현대인의 삶과 선’이라는 제목으로 법문을 요청 받았을 때, 저의 스승이신 숭산 대선사께서라면 법문을 어떻게 하셨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숭산 스님께서 하시던 방법으로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법상을 한번 치고) 이 지점은 모양이 공이고 공이 모양입니다. 이 세상은 너무도 무상합니다. 그래서 이 순간을 우리는 이분법적인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가 이분법적인 세상에 살고 있으며 그것에 젖어서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은 강이고 강은 산입니다. (다시 법상을 치고) 이 지점은 모양도 없고 공함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정적이고 모든 것이 없는 공한 상태인 것입니다.
바야흐로 봄입니다. 봄은 어디에서 옵니까. 이은상 작시, 홍난파 작곡의 ‘봄처녀’라는 노래에서처럼 봄은 저기 동구 밖 봄 처녀의 나물바구니에서부터 오지 않는가 싶습니다. 나물바구니에는 봄이, 희망이, 소박함이, 인정이, 자연이,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나물 캐는 아낙이 짜증을 낼리 없고 증오심을 품을 일이 없습니다. 나물 한 접시면 만족하는 소박함만이 담겨 있습니다. 소욕지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한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 보다 적은 것과 작은 것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소욕지족이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유형 물질만으로는 인간을 만족 시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소박한 바구니를 버리고 담고 담아도 채워지지 않으며 만족을 모르
불교의 모든 경전은 자기 수행위주로 돼 있습니다. 불교는 자기 수행의 종교이지 신앙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직 『법화경』이 있어 신앙의 근거를 딱 자리매김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법화경』이 없었다면 불교는 종교가 되기보다는 유교나 도교처럼 하나의 사상으로 남았을지도 모습니다. 또한 그 내용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사람들에게 적절하며 좋았는지 기독교 성경의 절반 이상이 『법화경』 내용 그대로입니다. 굳이 절반은 아니더라도 굵은 뼈대 대부분은 『법화경』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세중생을 향해 ‘내가 너희를 반드시 구제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법화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법계가 모두 불타서 진멸한다하더라도 내가 그 자리에 있어 너희를 안온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 것 또한 『법화경』입니다. 기독교
오늘 음력 2월 8일 부처님 출가재일입니다. 불교에는 5대 명절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으뜸인 부처님오신날, 그 다음이 성도재일, 출가재일, 열반재일이고 여기에 백중을 포함해 5대재일이라고 합니다. 특히 출가재일로부터 시작해서 열반재일에 까지 이르는 8일간을 불교도 정진 주간이라 하여 용맹으로 정진수행합니다.이 기간 동안 우리 절에서는 하루 108배 두 번하기, 하루 참선 한 시간 하기, 하루 신묘장구대다라니 7독하기, 포교 두 명하기가 숙제입니다.오늘은 출가재일을 맞아 출가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출가를 영어로 표현하자면 ‘becoming a monastic’이 가장 적당하고 생각됩니다. 수행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이 절에 온 것도 넓게 생각하면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출
오늘 열린 이 성스러운 법회에서는 관세음보살님과 나무아미타불의 은덕에 대한 법문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모든 스님들이 수행정진과 중생제도에 열심이시지만 각각의 스님들마다 생각이 다르고 말씀이 다르고 추구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다보니 능엄주, 대다라니, 금강경, 법화경, 지장경 등 각자가 좋다고 생각하시는 것들을 불자님들께 권해주십니다. 그러니 신도님들은 그 중에 과연 무엇이 가장 좋은지 헷갈리는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돈이라고 하면 동전도 돈이고 천 원짜리도 있고 만 원짜리도 있고 수표도 있지만, 바닥에 돈이 뿌려져 있어서 주울라치면 동전보다는 수표를 줍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팔만대장경 모든 말씀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고 좋고 덜 좋음에 차이가 없지만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돈을 줍기 위해서는 다섯
닦을 것 없는 당처 맞아야 눈 푸른 덕숭산 대중이라 태산같은 발심 대해같은 마음 그 속에 척하니 한 소식 있을 것 (법좌(法座)에 올라 양구(良久)한 후 주장자(拄杖子)를 들어 올려 법상(法床)을 세 번 내리치고 이르시길) 임술년이 가고 새 봄이 오는데, 해가 가고 해가 오는 이순간이 무슨 순간이냐? 이것을 도인(道人)이 말하기를 납월 삼십일(臘月 三十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년 열두 달이 다 지나서 마지막인 그 순간을 납월 삼십일이라고 하는데, 또 다른 납월 삼십일이 더 있어. 그것은 어떤 납월 삼십일이냐 하면, 내가 부모한테 이 몸을 받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러 가지 일을 당하다가 마침내 이 육신의 인연이 다해서 목숨을 마치는 그 순간이 또한 납월 삼십일이라고 표현을 했어
기축년 새해에 불자님들 가정 모두에 평안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새해를 맞으며 모두들 마음속에 새해에 이루고 실천할 계획과 소원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지난해 보다 좀 더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같이 경제가 어렵고 살기가 힘들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실 때는 더욱 이런 바람이 커지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과연 우리가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자신이 가장 부자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재물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만 몇 가지 안 되는 자신의 재물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시간이 날 때 마다 이것저것 자신의 재물들을 살펴보며 남모를 즐거움에 젖어들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