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종교를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태어난 환경도 영향을 미치지만 삶의 고난과 역경이 닥쳐올 때 단순히 의지하고 싶다거나 삶에 대한 의미, 목적을 발견하고자 종교를 찾게 되는 것 같다. 청소년기에 일타 큰스님의 일대기를 읽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근이 송연해지는 경험을 한 후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나는 '한 번 사는 인생, 제대로 살아보자'며 스님이 될 결심을 했다. 부지런히 새벽예불을 올리던 어머니를 삼남매가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다닌 경험과 불교에 대한 탐구열로 가득했던 아버지 아래서 자라서인지 깨달음을 얻고 나면
지금의 나는 10년 전과 많이 다르다. 짜증이나 화가 나면 꾹 참고 혼자 삼켜버렸기에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앓이 할 때가 많았다. 혼자 울거나 기도하며 울분을 토해내기도 했다.이전에는 상대방의 화가 내 가슴 깊이 들어왔지만, 꾸준히 마음을 다스리며 참선 수행한 결과 그 화들이 내 마음과 거리두기를 한다. 참선을 통해 찾아온 마음의 고요함이 화를 막는 방패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참불선원에서 동안거 100일 수행을 회향하며 누군가 내게 쏜 화살이 내 앞에서 멈추고 떨어지게 할 수 있게 됐다. 이 염력은 바로 자비심이다. 누군가 내게
외국에서 가톨릭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탓에 절에 다닐 기회가 없었다. 가끔 새벽에 ‘천수경’을 독송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유일한 불교 기억이다. 부처님을 처음 마주한 건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다. 집에 있던 어느 책 속에서 발견한 석굴암 본존 석가여래 엽서. 온화하고도 평온한 미소를 짓고 계신 부처님이 인상 깊었다. 하지만 당시엔 불심이 생기지 않았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고민이 있을 때 가끔 부처님 엽서가 떠오를 뿐이었다.대학 진학을 위해 한국에 돌아와서야 불교에 관심이 생겼다. 집안과 연이 있던 한 암자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절에 다
평소 사찰을 좋아해 가끔 절에 놀러 가곤 했다. 그러다 친구의 권유로 불교에 입문하고 도심포교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새벽기도, 사시기도 등에 꾸준히 참석하며 경전 읽는 법을 배웠다. 시간만 나면 도반들과 이절 저절 기도하러 다니며 기도하는 법도 배웠다. 혼자서도 매일 날이 새기도 전에 절 앞에 가서 기다리다 기도하고 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반들과 순천 금전산 금강암에 방문했다. 꼭두새벽부터 출발해 산을 타기 시작했다. 금강암까지 가는 길은 가파르고 험해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온몸이 쑤셨지만 부처님을 보러 간다는 기쁜 마음
12년 전, 김열권 법사를 처음 뵜을 때 위빠사나 수행법에 대해 알지 못했다. 지도를 받으며 수행하던 중 명상에 몰입해 몸이 사라지는 듯한 현상을 체험했다. “아, 알아차리려 하니 이런 현상도 오는구나”일상 속에서 오온을 관찰하는 습관이 들도록 노력했다. 오랫동안 수행에 집중해 오온의 현상을 알아차리니 이때까지 내 몸이라고 했던 것들은 6근(눈·귀·코·혀·몸·마음)을 통해 들어오는 마음 작용에 불과했고 지, 수, 화, 풍의 요소들이 몸의 곳곳에서 단단하고 거칠고 무겁고 부드럽고 매끄럽고 가볍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의
스무살 무렵 어머니를 따라 구인사에 가게 됐다. 당시 충청북도 제천에서 단양 구인사까지 가려면 배에 버스를 싣고 강을 건너가야 했으나 그날은 한겨울 추위에 강이 얼어붙어 배를 운행하지 않아 밤새 걸어가야만 했다. 너무 힘 들고 추웠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가벼웠다. 힙겹게 구인사 일주문에 들어서자 갑자기 무거웠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며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런 경험을 하자 불교에 관심이 생겨났고,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불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불일암에 계셨던 법정 스님을 찾아가 스님께서 주신 차를 마시기도, 어머니와 같
대비주 7일7야 기도가 있을 때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용맹정진하는 7일7야 기도에 꼭 한 번 동참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마침 손가락 결절종 수술로 병가를 내 4일간 동참할 수 있었다. 관세음보살님 앞에 바짝 붙어 앉아 기도했다. ‘관세음보살님. 이 기도를 꼭 회향하고 싶습니다.’ 저녁 기도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데 직장 상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수술 부위가 다 아물지 않았을 테니 며칠 더 쉬어도 괜찮다는 내용이었다. 그때의 기쁨이 지금도 생생하다. 관세음보살님이 나를 늘 지켜보시고 도와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안정되니 생활
어린 시절, 시골 작은 마을 교회 권사님이던 동생 친구의 어머니가 일요일마다 동생과 나를 교회로 데려갔다.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하기 힘들어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다녔다. 그러다 1992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휴거 사건 덕분에 교회에 가지 않을 수 있었다. 이후에는 어머니를 따라 몇 차례 절을 찾아다녔다. 2003년 학업을 마치고 취업을 위해 상경했다. 여러 직업을 거쳐 서울 시내 대형호텔의 연회부에서 일하게 됐다. 서비스직이 성향에 잘 맞는 듯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갈등이 일어나고 직접
지금 돌이켜 보면 ‘그 고통스런 마음에서 무척이나 벗어나고 싶었지 않았던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말을 듣고 생각난 가장 미운 사람은 엄마랑 막내오빠였다.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그들을 용서하기 위해 108배 참회를 계속했지만 참된 인간의 삶을 흉내내는 듯했다. 하루 이틀 회사를 마치면 서둘러 귀가해 저녁 참회기도를 이어가던 어느 날, 상대의 잘못보다 나의 잘못이 떠오르기 시작하며 끝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런 체험을 하고나니 머리를 깎지 않아도 부처님 말씀을 따르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도, 공양, 중생제도가 삶의
경상북도 경산 남산면 시골마을. 오빠 셋에 막내딸로 태어난 나는 가족사항이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 뒤에 대답으로 옛 표현에 “양념딸 막내로 귀염 많이 받으며 컸겠구나”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하지만 ‘내가 귀하게 컸는가’ 싶을 정도로 아들 셋을 둔 우리 집의 분위기는 무서웠다. 유난히 엄격한 부모님과 거친 아들들의 반항 덕에 사건 사고가 끝없이 계속됐다. 한철에 한두번 와야 할 태풍 같은 아버지의 불호령은 반복되는 일상의 태풍이었기에 나는 해가 지면 ‘오늘은 또 무슨 사건사고가 일어날까?’라는 걱정 속에 있곤 했다. 귀여움 받는 건
스님께서 “전생에 아미타 부처님과 인연이 깊어 그런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기 전까지 내게 아미타 부처님의 이미지는 ‘천수경’의 '나무본사아미타불' 여덟 글자가 다였다. 스님의 말씀 후에야 ‘원력이 크고 위대한 부처님이구나’하고 생각했다. 그것을 인지한 후 몇년 동안 나를 고통스럽게 한 통증이 사라졌다. 어릴적부터 척추가 온전하지 못한것과 더불어 외부에서 온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다. 척추와 허리 통증이 너무나 컸기에 일을 제대로 못해 회사로부터 권고 휴직을 받기도 했다. 집에서도 화장실 갈 때 때로는 기어서, 때로는 문
나와 부처님의 인연은 어머니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불심이 깊으셨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사하셨다. 1년에 몇 번 예쁘고 깔끔한 옷차림으로 외출을 하는 날이 있었는데, 그중 하루가 부처님오신날이었다. 어린 시절엔 교회에서 여름 성경학교를 다녔다. 그곳에 가면 군것질거리를 주기에 나는 간식을 먹는 즐거움에 동네 천막교회에 가 앉아있다가 몇 번이나 어머니에게 야단 맞으며 끌려 나오곤 했다.불교와의 인연을 정식으로 맺은 건 20대에 어머니가 정토사라는 작은 암자로 나를 데리고 가신 것이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법당에 가서 절하는 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