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이 너무도 적은데다 해마다 출가자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는 것은 분명 조계종 종단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종교 일반으로 말하면 교단의 중심축이 되어야 할 사제계층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니, 정말 교단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분명하게 숫자로 보이지는 않지만, 조계종 나아가 불교 전체의 위기를 낳고 있는 또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불자들의 현실적 삶을 이끌고 갈 불교의 계율이 실종되고 있다는 것이다.우리 현실의 불자들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당신은 불자로서 가지는 어떤 구체적 삶의
대통령이 해외 순방길에서 무심코 발화한 비속어가 국내외적으로 큰 물의를 빚고 있다. ‘이 XX들’과 ‘○팔려서’란 듣기 거북한 단어를 대통령의 육성으로 들어야 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심정은 솔직히 벌레라도 씹은 기분이다. 위압적인 태도와 건들건들하는 걸음걸이는 뭐 그렇다고 치더라도 설마 대통령이 국제외교 무대에서 상스러운 말까지 내뱉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후에 일어나고 있는 광경은 점입가경(漸入佳境) 꼴불견의 연속이다. 욕설 자체가 없었다고 강변하는 여당 의원들까지 등장했다. 다음에는 유엔에 간 적도 없다고 할 판이다. 이
근래에 나는 직접선거와 간접선거를 모두 경험했다. 직접선거는 비구니회장 선출선거였고, 간접선거는 비구니종회의원 선거였다. 순전히 자발적으로 선거가 진행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와 결과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반가운 소식은 새로 당선된 진우 스님이 비구니계를 방문해 비구니스님들이 당면한 현안문제에 관심을 갖고 경청했다는 것이다. 비구니의 한사람으로 종단과 비구니계가 긴밀하게 현안을 공유하고 고심하는 자리가 만들어졌음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의례적인 방문과 지지로만 끝나지 말고
최근 법보신문이 제기한 가톨릭의 무분별한 역사유적지 확대에 대한 우려의 기사들을 보면서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조선이 가톨릭 국가였나” “서울시, 로마 ‘바티칸 시티’ 조성하려는가?” “박해·순교 역사에만 매달리는 ‘회상 종교’ 벗어나야” 등 다소 분노가 서린 기사들이 불교계의 위기감을 표출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공공의 장소를 한 종교 일변도의 성지로 포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가톨릭 내부는 물론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가지지 못한 위정자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따라서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한반도에 불교
2020년 수십 년 만에 민간정부가 들어섰던 미얀마에서 1년 만에 쿠데타로 군부가 다시 권력을 휘두르게 되면서 국민들이 다시 고통을 겪게 된지 1년 반이 넘었다. 그러나 미얀마 사람들은 젊은이와 노인, 남자와 여자를 가릴 것 없이 군부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고 있다.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뒤 이토록 오래도록 국민들이 저항을 계속하는 것은 세계 역사에서 드문 일일 것이다. 미얀마 국민들이 잘못된 권력의 횡포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을 이어가는 모습을 볼 적마다 놀랄 뿐 아니라, 그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
대한불교조계종은 누가 뭐라 해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이다. 그렇기에 조계종의 위상은 그대로 한국불교의 위상과 연결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수승하다 한들, 현실의 불교 위상이 떨어지면 그 가르침의 가치 또한 평가절하 될 수밖에 없다. 현실에 있어서 우리 불교가 한국을 이끌어가는 대표적 종교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힘들다. 그것은 바로 조계종을 비롯한 현실 불교 종단의 위상이 그만큼 떨어져 있음을 말해주며, 그 지표가 되는 것이 바로 조계종 종단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불자들이 조계종의 행보에 관심을 집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가 막 지났다. 예부터 처서에는 왱왱대던 모기의 입이 돌아가고, 쑥쑥 자라던 풀도 갑자기 성장하기를 멈춘다고 했다. 갑자기 서늘해진 기운에 모기와 풀도 깜짝 놀란다는 비유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날씨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거짓말처럼 체감온도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가까이 있던 하늘도 저만큼 높아졌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음을 깨닫는다. 절기(節氣)의 법문은 이렇게 미묘하기만 하다. 꼬박 보름 동안 집수리에 매달렸다. 하필이면 가장 더울 때였다. 낯선 사람들이 제집처럼 들락거리며 집안 곳곳을
여성장애인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권익 쪽과는 다르게 종합사회복지관에서는 주로 발달장애인과 자폐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지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여가와 재활, 심리치료와 행동치료 등 사회적응 훈련을 지원하고 있다.지적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그들의 어려움에 공감하기도 하고, 상당 부분 배울점도 많다.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삶도 되돌아보게 된다. 비장애인의 경우 감정들을 주고받을 때 가끔 감정을 숨기기도 하고, 속이기기도 한다. 그러나 발달장애인들은 미세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좋고 싫은 감정들을 주로 크게 드러낸다. 요즘 장안에 화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야만의 상태에 있었다. 먹고 먹히는 인간관계가 그나마 ‘휴전’을 선포한 것은 시나브로 법의 등장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함무라비 법전, 로마의 법률, 법가(法家)들의 치세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법은 통치의 기술을 제공하기도 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법은 현대사회에서 삶을 실질적으로 조율하는 필요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그렇다고 법이 인간의 모든 갈등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오히려 법에 의존함으로써 더 많은 함정에 빠지고 있지는 않을까. 식민지, 전쟁, 군사정권, 민주화, 노동운동의 역사를 거치면서 마침내 귀결
법보신문 7월22일자 ‘실리콘밸리 명상문화는 생산성 위한 정신적 해킹’이라는 제하의 보도는 한국 불교계에도 숙제를 안겨준다. 이 기사는 캐롤린 첸이라는 미국인 교수가 신간 ‘워크 프레이 코드(Work Pray Code)’에서 “‘기업들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영적인 방법으로 직원들을 깊숙한 내면부터 기업을 사랑하고 헌신하도록 유도한다’면서 결국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명상을 [왜곡] 재포장하였다’고 주장한다”고 소개하였다.꽤 오래 전부터 미국과 유럽 등 비불교권 국가의 백인들 사이에서 명상 붐이 일어나고 자연스레 불교 인구
이제는 꽤 세월이 지난 이야기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방송에서 검사들과 직접 토론을 벌였던 일이 있다. 그 당시 필자는 이 일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상당히 우려하기도 하였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말 그대로 국가원수의 위치이다. 그런 사람이 곧바로 대중매체에서 여과 없는 토론을 한다는 것은 원수라는 지위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다는 생각이었다. 그 자리는 최종결정을 하는 자리이고 권력의 정점이기에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큰 영향을 미치는 자리이다. 그리고 어떤 결정이 혹 잘못되었다면 책임지고 그것을 바로잡아야 할 마지막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노는 즐거움을 만끽할 때가 있다. 나의 혼자 놀기는 다른 사람의 바지 끝을 눈여겨봤다가 내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재미있어하는 일이다. 한동안 우리나라 남성들의 바짓단 길이가 조금만 더 짧았으면 좋겠다고 상상한 적이 있다. 쓸데없고 우스꽝스러운 관심사였다고나 할까. 바지는 길면 답답하고 짧으면 경망스럽다. 20대부터 다른 사람들에 비해 바지를 짧게 입고 다녔다. 발목의 복숭아뼈가 살짝 보이도록 입어야 깔끔하고 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유난 떤다고 언짢은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 바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