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잠깐 세우지. 모두 주변에 가서 빵 있는 대로 사와. 여기가 프랑스 영향을 받아 빵이 맛있어.” 10여년 전, 캄보디아에 지구촌공생회가 설립한 학교를 방문하던 길. 월주 큰스님이 시장 가운데 차를 세우더니 주머니에서 돈을 한움큼씩 꺼내 일행에게 나눠줬다. 기자로 동참했던 필자도 몇 군데 빵집을 찾아 매점에 얼마 없는 빵 전부를 긁어왔다.학교에 도착하니 교실마다 발 디딜 틈 없이 아이들이 빼곡했다. 일행을 의전하러 나온 학교장, 코이카 단원과 지구촌공생회 파견 직원들에게 큰스님은 “의전은 됐으니,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달라”고 부
종교의 궁극적 가치는 뭘까? 또한 목적은 뭘까? 최근 캐나다에서 발생한 끔찍한 사건을 보면서 필자는 종교인의 한사람으로서 종교에 대한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지난 7월1일 AFP통신에 따르면 캐나다 원주민 단체인 ‘로어 쿠테네이 밴드’는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크랜브룩 근처에 있는 원주민 기숙학교 옛터에서 ‘표식 없는’ 무덤 182기를 찾아냈다. 지면 투과 레이더(GPR)를 통해 탐지해낸 이들 유해는 가톨릭 학교였던 이곳에서 19~20세기 사이에 교육을 받았던 7~15세의 원주민 어린이들 유해인 것으로 드러났다. 가톨릭이 운영한
코로나19 델타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이번 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가 더욱 강화되었다. 코로나19 이후 우리들의 일상에 수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 하나가 바로 ‘거리두기’이다. 의학과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21세기에 인류가 신종 바이러스에 대처하기 위한 처방으로 내놓은 것이 결국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소위 ‘거리두기’는 일상의 회복을 위한 임시적 조처인가, 아니면 인류 생존을 위해 ‘거리두기’ 속의 삶의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인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의 빠른 회복을
2021년 7월 여름. 대한민국은 UN회원국의 만장일치 합의로 명실상부한 선진국임을 인정받았다고 발표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한 것이다. 정부는 역사적 이정표라고 홍보에 분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차별이 만연화 된 사회구조에서 발생되는 인권 문제로 무거운 부채감 속에 여전히 살고 있다.뉴스에서는 연일 계층화된 사회에서 빈곤으로 인한 죽음이 보도되고, 군대에서조차 낮은 계급이나 소수자들이 인권유린을 감당하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리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물리학자라고 평가되는 리처드 파인만은 1965년 빛과 전자의 상호작용을 도식화한 양자전기역학 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1~2학년생을 위한 기초 물리학 강의를 책으로 엮은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는 전 세계 물리학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전설의 책이다.필자가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었던 것은 ‘나는 원소인가’라는 글이다. 글 내용은 인간이나 돌, 쥐의 꼬리, 파리의 뒷다리, 빗물 등 모든 것이 전부 원소라는 기본 단위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파리의 다리가 언제든 원소로
대한민국의 단일민족 신화는 깨진 지 오래다. 고인류에 대한 DNA 추적 기술 발달로 한반도에 처음 국가가 시작될 때부터 이미 남방과 북방의 민족 혼성이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 되었다. 문헌상의 기록을 통해서도 해상과 육로를 통해 ‘바깥’의 사람들이 우리의 ‘안’에 스며들어와 지금의 한반도인을 형성해 왔음이 확인되고 있다.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19세기 유럽에서 형성된 것이며, ‘민족주의’ 또한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자민족의 우월성과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을 내포하게 된 이념이므로 코스모폴리탄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지난 초파일 오전 동네 이발소에서 머리를 잘랐다. 부처님오신날 정갈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곳은 여느 날과 달리 사람들이 많았다. 필자가 이발을 시작했을 때는, TV에서 조계사 초파일 행사를 중계하고 있었다. 이발하는 중에 갑자기 그 나이든 이발사가 푸념처럼 말했다.“알아듣기 쉽게 하면 좋을텐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요.” “좀 알아들을 수 있게 하면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듣기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으니 답답해서 하는 말입니다.” “저게 어느 나라 말이예요.”그때 TV에선 ‘반야심경
우리나라 국가 행복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중 최하위권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지난 2018∼2020년 평균 국가 행복지수는 10점 만점에 5.85점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OECD 37개 회원국 가운데 35위로, 우리나라보다 순위가 낮은 나라는 그리스(5.72점)와 터키(4.95점)뿐이다. 방사능 오염과 방출문제 등으로 국제적 질타를 받고 있는 일본마저 5.94점을 받아 우리나라를 앞섰다. 우리나라 경제는 OECD 국가 중 10위로서 경제대국이다. 그런데 아직
얼마 전 젊은 불자 한 분이 일상생활 속에서 종교의 표현문제로 겪은 어려움을 상담한 적이 있다. 아파트 어린이집 어머니들의 모임이 있는데 구성원들 또한 다들 비슷한 연령대이고 서로 아이를 함께 돌봐주기도 하고 생활의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기도 해서 모임에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난감한 문제는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다른 종교를 가진 분들이 자신에게 칭찬이나 고마움을 표현할 때 “하나님, 이렇게 좋은 분을 저희에게 보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 아멘”이라며 여럿이
지난 몇 주 우리 사회는 한강에서 사망한 한 전도유망한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에 많은 이들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애도와 함께 여러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시기에 보도되었으나 이내 포털 대문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또 한 명의 젊은 죽음은 크게 기억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이의 빈소에 대통령이 몸소 방문해 조문을 했음에도 이 또한 단발의 기사로만 보도되었던 그 죽음은.기사에 공개되었으니 여기에서도 그이의 이름과 신상을 밝히겠다. 이선호씨. 1998년생 올해 나이 23살. 대학 3학년. 등록금 마련을 위해 평택항 부두 야적
오월이면 무엇보다 초파일의 연등 축제를 생각하게 된다. 오방색으로 화려하게 장엄한 등의 축제는 봄의 꽃잔치와 어우러져 생명의 약동을 축복한다. 온갖 생명이 저마다의 향기를 뽐내며 법계를 장엄하지 않는가? 모든 생명은 행복하라, 모든 생명은 자유로워라. 어떤 것이든 생명 그 자체는 경이롭고 존엄하지 않은가? 연등을 꾸미는 오방색이란 온 우주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오방색에 나의 주체적 색깔을 더하면 시방세계를 상징하는 색깔이 된다.하지만 금년의 초파일 연등 행사도 간단하게 치러야 한다고 한다. 오방색으로 서울의 밤하늘을 축복하는 일도
불기 2565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붓다의 삶과 길을 생각해본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붓다처럼 사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붓다같이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가. 깨달음과 진리만 추구하며 관념적으로 사는 것이 붓다 같은 삶인가, 아니면 ‘낡은 수레바퀴’가 되어서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온몸으로 헌신하고 자비를 행하며 실천적으로 사는 것이 붓다 같은 삶인가.며칠 전, 훈훈한 뉴스 하나가 가슴을 적시고 지나갔다. 5월4일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진 뒤, 뇌사 판정을 받은 20대 여성이 인하대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말기환자 4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았대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다시 그 사람을 용서하냐고요!”이것은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유괴 살해한 범인을 자신이 믿는 종교적 신앙심으로 용서해 주려고 찾아갔다가 오히려 범인의 예상 밖의 말에 여주인공이 절규하는 대사이다. 이 장면에서 범인은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한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서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라고 태연하게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하루하루를 감사히 여기며 살고 있다고 마치 성자처럼 말한다. 용서라는 단어를 이 영화에서만큼 머리가 아니
퀘이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낯선 이에게 건네받은 노트북의 화면에서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과거의 자신이라는 자가 ‘미래의 나에게’라며 현재의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네가 아는 너는 네가 아니라고. 나인 너는 독재자의 하수인이었으나 이제 잘못을 깨닫고 반군이 되었으니 독재자를 처치하는 것이 나이자 너의 임무라고. 존재하지 않는 기억으로 갖은 난관을 뚫고 만난 반군의 두목은 그에게 말했다.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서 괴로운가? 하지만 그대를 규정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행동이다.”영화 ‘토탈 리콜’(1990)의 장면이다
꽃샘 추위처럼 정치 바람은 지나갔다. 어느 때보다 폭풍우와 거친 회오리를 동반했다. 이제 지나간 흔적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그렇지만 이런 정치 폭풍이 지날 때마다 씁쓸한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불교적 신념과 가치를 공유하거나 지향하지 않는 사람들이 불교행사의 앞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다. 더구나 그런 일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스님과 신도들의 모습을 보면 한국불교의 현실과 잠재된 DNA를 연상하게 된다. 새삼스럽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신념과 세속적 가치의 만남과 어울림이 어디까지 가능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특히 신도를 팔아 상응
‘미얀마 사태’에 관한 글을 또 써야하는 마음이 퍽 참담하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몸소 겪은 세대이기에 그 마음은 더욱 참괴하다. 전쟁에서도 사람의 목숨을 그렇게 ‘막’ 대하지는 않는다. 전범 재판이 두려우므로. 동물에게조차 동물권이 있다. 하지만 지금 미얀마 국민에겐 법도 없고 인권도 없다. 오직 (짐승만도 못한) 무참한 살육과 도륙만 있을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인간이 망각의 존재’라는 것이다. 불과 2년 전(2019년), 중국으로의 범죄인 송환법 철폐 등에 반대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벌인 홍콩 민주화 시위(10명 사망
대중을 이끌어 가는 사람을 흔히 ‘지도자(指導者)’ 또는 ‘리더(Leader)’라고 한다. 두 단어 모두 ‘~이끌다’라는 동사에 사람을 뜻하는 단어(者, ~er)가 붙어서 만들어진 말이다. 불교 경전에서도 지도자와 같은 의미를 가진 표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를 치는 사람’, 목우자(牧牛子)다.‘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39권과 제46권 ‘마혈천자품(馬血天子品)’과 ‘잡아함’ 47권 1248, 1249, ‘목우자경(牧牛子經)’에서 첫 번째는 어리석은 목우자(牧牛子)로 우기를 맞아 이쪽 강가의 언덕도 잘 살펴보지 않고 저쪽 강가
꽃이 피었다. 둥실둥실 꿈무더기 같은 뽀얀 목련들이 망막에 들어와 알알이 꽂히더니, 여기저기 담벼락을 노랗게 물들이며 개나리들이 제 기색을 드리운다. 급기야 가지 끝마다 수다스럽던 벚꽃의 봉오리가 우수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들보다 부지런한 매화와 산수유가 인사를 청해온 게 벌써 수주 전이다. 꽃이 피었다. 봄꽃이 피었다. 일제히. 봄이다.그런데 얘들이 벌써 이럴 때가 아닌데. 달력을 본다. 3월 하순.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가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3월 안에 이 기세의 봄꽃을 보는 게 처음이다. 매년 두근거리는 마
불교의 최대 장점은 자유와 자율을 중시한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혹자는 자유와 자율은 불교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최대 약점으로도 평가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인도를 생각하면 이보다 더한 장점은 생각할 수 없다. 출가자의 나이나 성별, 신분을 논하지 않았다. 누구나 부처님의 품 안에서 자유롭게 수행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수행자가 지켜야 할 규범은 자율적으로 지켜야 했다. 계율이 성립하고 교단이 발전하면서 출가의 자유에는 제동이 걸렸다. 누구나 원하면 출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출가를 금지하는 예
미얀마가 연일, 시민들로 강을 이루고 있다. 2월1일 일어난 군부 쿠데타 때문이다. 지난 2월28일, 내·외신엔 큼지막한 사진 한 장이 떴다. 미얀마 군부가 평화시위대를 향해 쏜 실탄과 최루탄에 사상자가 속출하자, 무장한 채 평화시위대를 향하는 군경을 도로에 혼자 앉아 막아선 스님의 사진이었다.(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중국 천안문 사태 등) 어디선가 보았던 듯한 기시감(旣視感)마저 들었다.근대 들어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건 벌써 3번째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얀마(버마)는 당시 아웅산이 이끄는 반 파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