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갑 칼럼니스트세상은 항상 시끄러운 말세였다. 인간은 어떠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이기적 존재인 것이며 그 이기심이 모든 분쟁과 싸움의 원인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하여 모든 종교는 그 이기심을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이타심으로 바꾸는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종교적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파악된 이기심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고전이라 할 국부론(1776)을 저술한 아담 스미스(1727-1790)였다. 아담 스미스는 그 이기심을 부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활동의 동인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인간의 이기심이 없으면 경제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만 파악한 것이 아니라 이기적 속성의 배면에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측은지심의 도덕감정이 있음을 파악했
김 상 영중앙승가대 교수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에 인각사라는 절이 있다. 그런데 이곳이 『삼국유사』를 찬술한 보각국사 일연(1206~1289) 스님의 국사 하산소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일연 스님은 국사의 자리에 있다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개경을 떠나 인각사에 주석하였으며, 이곳에서 84세를 일기로 입적에 들었다. 조정에서는 스님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왕명으로 비를 세웠는데, 지금 인각사 경내에 남아 있는 스님의 비는 쪼개진채 일부 비편만 비각 속에 보존되어 있다. 일연 스님의 비는 명필 왕희지의 글자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이로 인해 일연비를 탁본해가기 위한 발걸음이 이어졌고, 심지어 일본과 청나라에서도 수시로 이 비의 탁본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스님의 비는 이 과정에서 파손된 것
종삼 스님구례 화엄사 주지 경전을 조금 읽어본 불자라면 익숙한 이야기일 듯 하다. 부처님이 탁발을 나갔을 때 밭을 가는 농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 “우리 농부들은 손수 밭 갈고, 씨 뿌리는 노동을 하는데 당신들은 왜 그러지 않느냐”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농부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부린다. 마음이 나의 밭이고, 믿음은 나의 씨앗이며, 지혜는 나의 모습이고,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짓는 악업을 없애는 것은 내가 뽑는 잡초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감로의 결실을 수확하는 것이 나의 농사이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농사짓기라는 작은 부분만 보면 백장선사의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선 수행과 농사일을 병행하는 백장청규로 나타났고, 근대 한국 불
전 재 성한국빠알리성전협회 대표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승리하면 생각나는 부처님 말씀이 있다. 쌍윳다니까야 뿐만아니라 빠알리 법구경과 빠뜨나 법구경과 간다리 법구경과 일부 대승불교의 문헌에서도 잘 알려진 말씀이다. “승리는 원망을 낳고 패한 자는 잠을 못 이루네.이기고 지는 것을 버리면, 마음 편히 잠을 이루네.” 그런데 이 말씀을 왜 부처님께서 하셨냐면 마가다 국의 왕인 아자따뚜가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빠세나디 왕은 패자로서 괴로워하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부처님은 위와 같은 시를 읊은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승리한 자는 원망을 낳고 패한 자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선거가 끝났으니 이기고 지는
사공 정규동국대 의대 정신과 교수어느 날 한 여대생이 진료실을 찾아왔다. 그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고 미워한다는 피해 사고로 치료를 받으러 온 것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 남존여비문화가 가득 찬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모두 남동생만 아들이라고 우대해주고 자신은 무시 받으며 살아왔다. 자신도 사랑 받고 싶지만 뜻대로 안 되다 보니 동생에 대한 증오심과 자기비하감이 형성된 것이다. 자기비하와 증오심으로 점철된 이러한 무의식적 심상(心傷)이 해결되지 않고, 현재 삶 속에서도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이랑 친구 두 명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가 친구 두 명이 같은 여고 동창생이어서 여고 동창 모임에 대한 대화를 잠깐 나누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전혀 기분 나쁜 상
장회익서울대 명예교수작가 조나단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에는 거인국과 소인국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 세계에는 거인국과 소인국이 없다. 사람들 사이에도 신체 크기에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그렇게 큰 거인이나 그렇게 작은 소인은 없다. 나는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 본 일이 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소인이 되는 것도 생존에 불리하겠지만 거인이 되는 것도 생존에 그리 유리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국제사회 안에서는 이것과 다소 다른 모습을 본다. 국가들 가운데에는 거인이라고 할만한 국가도 있고 소인이라고 할만한 국가도 있다. 미국이나 중국은 말하자면 거인에 가깝고 모나코나 피지 같은 나라는 소인에 가깝다. 그렇다면 국제사회에서는 큰 것도 생존에 불리하고 작은 것도 생존에 불리하리라는 내
박 승 원전 불교포럼 대표 중국의 기업이나 상점을 방문하다 보면 종종 한 편에 관세음보살상이나 탱화가 모셔져 있음을 보게 되는데, 내심 반가움에 그 이유를 물어 보면 한결 같이 돈을 잘 벌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엉뚱한 답변에 실소하게 된다. 게다가 그 안에 ‘發財**’등의 문구가 쓰여 있어 그들에게 있어서 불교가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인의 돈에 대한 가치관은 자본주의에서의 그것보다도 훨씬 절대적이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체제이긴 하지만 평소 공산주의의 이념과 사상을 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즉 우리가 원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키워드인 ‘(관계)’의 핵심 또한 돈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큰 문명의 축
전 재 성한국빠알리성전협회 대표연등축제가 해를 거듭할수록 불교 차원을 넘어 한국의 독특한 문화축제로서 자리 잡고 있다. 경전에서도 부처님의 탄생은 극히 신비롭고 거룩하게 그려지고 있다.불경 가운데 부처님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는 경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숫타니파타의 날라까경을 들 수 있다. 아시타 선인은 싯다르타의 할아버지인 시하하누 왕 때부터 사제였다. 이 경은 숫도다나왕 때에 싯다르타의 탄생과 싯다르타가 부처님이 될 것을 예언한 아시타 선인의 가장 오래된 원형적인 이야기의 버전이다.아시타 선인은 싯다르타의 영광스러운 탄생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는 싯다르타가 성인이 되어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는 것을 그는 보지 못하고, 자신은 죽어야 하는 운명을 한탄했다. 그래서 자신의 누이동생의 아들인 날라
사공 정규 동국대 의대 정신과 교수 2550년 전 인류의 위대한 성자 부처님께서 찬란한 진리의 빛으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사바세계에 오셨다. 이 땅의 모든 이들과 부처님께서 이 땅에 나투신 기쁨과 고귀한 뜻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불기 2550년 부처님오신날을 축하하기 위한 장엄등인 ‘진리와 화합의 등’이 4월 18일 오후 7시 3000여 사부대중이 함께한 가운데 서울시청 앞을 환하게 밝히면서 올 봉축의 서막을 장식했다.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가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문화재급 석등을 모델로 해 제작한 ‘진리와 화합의 등’에 담긴 가장 큰 뜻은 “우리 사회의 당면 과제인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자”는 것이다. 사회 통합과 국민 통합을 일구기 위해 한 줄기 등불을 밝힘으로써
장 회 익 서울대 명예교수 이미 꽤 여러 해 전이다. 당시 대학에 근무하던 나는 남보다 몇 시간 일찍이 출근하여 학교 뒷산을 다녀오는 버릇이 있었다.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암자를 거쳐 큰 바위까지 다녀오곤 했는데, 이른 새벽인지라 도중에 마주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 중년 부인을 오며 가며 종종 마주치게 되었다. 그 분은 암자까지만 다녔는데, 자주 스치게 되면서 가볍게 서로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왜 그 이른 시간에 그렇게 암자를 드나드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그 분의 발길이 딱 끊어졌다. 그런데 가만히 미루어보니 그것이 바로 우리 대학 입학시험이 끝난 날과 일치했다. 그제야 “아하, 그랬구나. 그분 아드님 혹은 따님이 이
박 승 원 전 불교포럼 대표 한비자에 ‘귀매최이(鬼魅最易)’의 비유가 등장한다. 즉 귀신과 도깨비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리기가 쉽다는 의미이다. 개나 고양이의 그림은 실체적 기준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지만, 귀신과 도깨비는 아무도 본 바가 없으니 어떤 형상으로 그려낸들 개의할 바가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반기업정서’란 용어가 등장했다. IMF 이후 생경한 말이다 했더니, 이제는 완전한 경제용어가 되어 버렸다. 정치인이 부패 등에 연루되어 정치생명이 끝날 때쯤이면 흔히 ‘음모론’을 들먹이듯이, 이는 재계가 다분히 의도를 가지고 꺼내든 말이다. 그들은 구체적인 통계수치를 내밀며 부에 대한 편견과 질시 등 국민의 후진적 경제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매도하면서 어려서부터 올바른 자본주의 원
전 재 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대표 인터넷의 보급으로 공적인 공간이 확대되는 정보화시대가 도래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이메일이나 휴대전화가 사적 공간을 심화시키고 있다.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이 교차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공간을 중개하는 것은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인간의 사적인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정보화시대에 진부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대화의 논리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2500년 전의 부처님은 일찍이 대화에서의 문제점을 깨닫고 진리를 수호하는 다섯가지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지면 관계상 두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다. 바라드와자여, 만약 사람이 상태를 분석한다면, ‘이와 같이 나는 상태를 분석한다’라고 말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