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net’은 화엄경의 ‘Indranet’을 현실에 옮겨놓은 것처럼 보인다. 불교계도 이에 발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인터넷에서 불교관계 싸이트를 검색해 보면 참으로 놀라울 정도로 많고, 그 내용도 다양하다. 인터넷은 불교도들만의 것이 아니라 온인류가 공유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여러 각도에서 불교싸이트에 접근하고 싶은 흥미거리와 삶의 문제를 푸는 데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노력과 정성이 필요할 뿐 아니라, 그런 가운데에도 일관된 통일성을 필요로 한다. 불교용어의 통일성도 그러한 것 가운데 하나다. 크게는 인명, 지명, 서명 그리고 개념어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고유명사는 원음으로 불러주는 것이 보편화된 추세이고, 개념어는 원어
부처님께서 입적하신 지 3개월 뒤, 오백 명의 아라한이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집하던 중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사소한 계율은 승가의 합의에 의해서 폐지해도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들은 아난다가 경황이 없어서 어떠한 계율들부터 그렇게 해도 좋은지 여쭙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오백 명의 아라한들이 논의한 끝에 아무 것도 고치지 않고 모든 계율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아무리 뛰어난 아라한의 안목이라 해도 부처님의 안목에는 미치지 못하고, 따라서 계율을 임의로 개폐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모임을 주관했던 사람은 선종의 초조인 가섭 존자였다. 부처님 직제자들에 의해 세워진 이러한 전통이 처음 깨어진 것은 부처님 입멸하신 지 100년
편집증환자 가운데 종교 편집증 환자 치료가 가장 어렵고 무섭다. 섣불리 치료하다가는 평생 집요하게 소송당하기 쉽고 그 패거리들이 몰려와 항의하므로 곤욕을 치루기 십상이다. 기독교 시장이 망언을 했다고 흥분하고 기독 선수들이 선교한다. 종교 도그마에 빠진 이들은 자신의 편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독선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화가 어렵다. 이라크전을 일으킨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정의로움을 내세웠지만, 침공당한 이라크는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결사 항전한다. 정치계의 대립이 그치지 않음은 어제 오늘이 아니지만 당쟁으로 나라를 잃었어도 그 잘못을 반성함이 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좌우 대립, 진보와 보수, 동서 지역 대립, 모두 자기주장만 옳고 남의 것은 악의 화현쯤으로 치부한다. 그런데 불교 집안도
탐진치 삼독을 모르는 불자는 없으리라. 탐심이 삼독 가운데 으뜸의 위치를 차지한다. 탐심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화가 나서 진심을 일으키고, 계속 탐심의 고집을 피우니 또 어리석은 치심을 낳는다. 저 삼독은 단적으로 이기배타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경제주의는 이기배타적인 경쟁의 원리에서 힘을 얻고 자랐다. 거기에 비하여 도덕주의는 한결 나은 것 같다. 도덕주의는 이기적인 것을 거부하고 사회적인 공동체의 공영을 우선시한다고 말하는 명분에서 경제주의보다 더 고상한 것 같다. 그래서 이른바 유식한 자들이 도덕주의에 대하여 매력을 더 느낀다. 그러나 도덕의식이 경제적 소유욕을 이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도덕심은 제6식인 의식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반이기적 사회성의 요청인데, 경제적 소유욕은 제6식보다 더 깊은
최 훈 동 한별정신병원장 정신치료에서는 흘러간 과거가 사라진 것으로 보지 않는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개인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 작용을 한다. 과거의 아픈 상처이건 좋은 기억이건. 좋은 환경과 학습은 건강하게 작용하고 나쁜 기억과 상처는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의지와 무관하게 과거를 회상, 반추하며 살고 있고, 오지 않은 앞날을 걱정하거나 설계하면서 현재를 살고 있다. 정신치료의 분석 과정에서 과거의 경험을 중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모 탓으로 돌리거나 환경 탓으로 돌려 버리고 원망하는 마음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좌초하여 제자리에서 빙빙 돌게 된다. 과거의 경험을 오늘도 되풀이할 뿐만 아니라 세대를 걸쳐 물려준다. 남에게 투사한 부분
요즘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보수·진보, 우파·좌파, 친미·친북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 그 어느 쪽이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도덕·윤리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삶이라야 한다. 이 그물에 걸리면 누구를 가릴 것 없이 허위이며 위선이다.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적 성향·공산주의적 성향·자유민주주의적 성향·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갈등이 위험수위를 넘어선 것 같다. 그래서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사람됨의 가치를 논의하는 것을 벗어나, 경제를 위주로 하는 정치논리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는 평등 앞에 자유를, 사회주의국가에서는 그와 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자유와 평등이 사람에게 있어서 새의 두 날개와 같다는 것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기업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 수레의
김 형 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우리는 대승불교를 신봉한다. 대승불교는 개인의 업(業)이 사회적인 공동업(共同業)의 세력을 능가할 수 없으므로 이 공동업을 바꾸지 않고서는 개인적으로 행복해지기가 어렵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볼 수 있겠다. 쉽게 말하자면 국가사회가 현실적으로 불행에 휘말리지 않아야 개인의 신해행증(信解行證)의 수행이 더욱 실효성을 거두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운명이 그가 지은 업의 인과응보(因果應報)일진데, 한 사회의 운명도 그 사회가 공동으로 지어온 업의 인과응보라고 읽어야 마땅하리라. 세계적으로 남들이 살고 싶다고 부러워 하는 국가사회는 거기에 살아 온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공동적인 선업을 많이 지어 왔기에 가능하다. 이 세상에 공짜가 없다. 우리의 대승불교는 한국인들이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산아제한을 정부가 독려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다음엔 둘도 많다며 하나 낳기를 권장했다. 생각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어리석은 정책이 40여년 계속되었다. 그 결과 멀지 않은 장래에 한국의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란 추계가 나왔다. 뒤늦게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정부가 산아제한 가족정책을 출산장려로 전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일단 형성된 출산기피 풍조가 이른 시일 내 시정될지 걱정이다. 만일 여기서 출산감소 현상을 반대로 돌리지 못하고 여러 산업화 선진국의 전철을 따라 간다면 한국은 세계사상 가장 빨리 청년국에서 노인국으로 전환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단기적으로는 쇠퇴고 장기적으로는 소멸이다. 한 가정이나, 집단이나, 국가
오늘날 사찰은 자연과 역사, 그리고, 정신적인 귀의처로서 이 시대 최후의 보루가 되고 있다. 이제는 단순한 종교적인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양호한 자연환경과 문화유적들을 간직한 이 시대의 유산자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오늘날의 사찰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많은 것들을 제공해 줄 수 있으며, 몇가지 가치와 중요성을 우리들은 알아야 한다. 그 첫째가 오늘날의 사찰은 종교적 성지라는 점이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불교인들의 수행처이자 생활공간으로서 수행과 기도, 법회와 포교가 이루어지는 종교적 성지이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많은 사찰지역이 관광지가 되어 가고 있다. 수행공간과 탐방공간이 구분되지 않고, 대부분이 개방되어 무분별한 탐방객들에 의해 수행환경의 질이 저하되고 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종교적 성지로서의
현대의 디지털 문화가 우리에게 관심을 끄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록과 보존의 형태, 그리고 그것이 유통되는 방식을 바꾸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일한 내용을 얼마든지 복제할 수도 있으며 또 그것을 빠르게 유통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문자적인 기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3차원의 영상까지 가능하며, 미래는 영상이 아니라 ‘실재’의 복사와 전송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디지털화는 문화유산의 보존과 유지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포교의 측면에서도 의미있는 기능을 갖을 수 있다. 불교계가 가지고 있는 문화유산 정보는 기록문서나 유물과 같은 유형문화재 뿐만 아니라, 의식과 의례와 같은 무형문화재가 수없이 많다. 고려대장경이나 한국불교전서, 또는 한글대장경과 같이 불교계의 일각에서 기획·진
세간의 삶은 언제나 어수선하다. 그 풍경을 전하는 신문 지면과 방송 화면을 보면 더욱 그렇다. “가뭄에 웬 파업?”이라는 큼직한 신문 표제들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가뭄으로 온 나라가 목타고 있음에도 항공대란이 일어났다고 아우성이다. 국민 건강을 볼모로 병원 파업이 벌어졌다는 부르대기도 쏟아진다. ‘집단이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질타도 이어진다. 노사갈등 부정적 현상 아니다 노사 양쪽의 사이에 서서 두 당사자들을 모두 나무라는 것이 중도(中道)이거나 중용(中庸)의 미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냉철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도나 중용이 한낱 양시양비(兩是兩非)론이나 기회주의적 처신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먼저 노사갈등에 대한
한국의 불교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종 법회와 행사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살아있는 자를 위한 법회보다 죽은 자를 위한 행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사찰 경제에 큰 도움이 되는 49재(齋)를 비롯한 각종 제사와 우란분절를 기해 봉행되는 천도재와 특별히 마련되는 영산재와 수륙재도 모두 죽은 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법식에도 맞지 않는 지장보살이 본존불의 협시보살로 봉안되고, 위패를 모신 영단(靈壇)이 법당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엄격히 말해서 영단은 법당 안에 들어와서는 안되는 것이다. 중국의 사원에서도 대부분 위패는 별도의 건물인 영각(靈閣)에 봉안하고 있다. 이러한 영각은 전체 사원의 구조에서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남방불교의 사원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