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꿈과 더불어 시작했다하면 잘못된 얘기일까? 마야부인의 흰 코끼리 꿈이 없었다면 불교가 성립 될 수 있었을까? 불교는 꿈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흰 코끼리 꿈 외에도 삼국유사에는 조신의 꿈과 같이 꿈으로 뒤덮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연스님은 왜 꿈과 관계된 설화를 그렇게 여러 차례 언급하셨을까? 도무지 꿈이란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길래 이토록 많은 꿈 얘기가 불교에 등장 할까? 반야심경에는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 해서 꿈에 대해 터부시하기도 한다. 개꿈도 있다지 않는가? 그런데 분명히 부처님의 가피 가운데 현전가피(現前加被), 명훈가피(冥熏加被), 몽중가피(夢中加被)라 해서 꿈속에서의 예지적 기능을 중시하기도 한다. 실제 우리들의 삶 가운데는 선몽 또는 현몽이라 해서 미래를 미
금강경 첫머리에 마음을 항복받는다는 가르침이 나온다.(云何降伏其心) 항복이란 말 자체가 강력하기도 하고 강제성을 띤 단어로 느껴진다. 우리는 항상 불교를 佛法이란 말로 대체해 쓰기도 한다. 법이란 말이 인식의 표준이 되는 규범이라 할 때 강제성을 띤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오계에도 보면 살생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등등 강제성을 띤 가르침들이 등장한다. 戒定慧 三學에서 戒의 의미 역시 防非 止惡의 강제성을 띤다. 諸惡莫作(악행을 하지 말라)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수행은 따지고 보면 자율적 자기 강제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라의 법도 강제규정이 대부분이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모두가 파국이다. 강제로 지켜야만 하는 교통법 세법 등등은 공공의 복리증진과 공동체의 이익을 가져다준다.
눈을 뜨면 이 세상을 만난다. 세월도 만나게 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두 이 세월과 세상 속에 들어있다. 이 세상과 세월을 부처님 모시듯 살면 어떨까. 그러면 항상 부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왕을 모시는 사람의 특권이 대단하지 않은가.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특권은 어떠할 것인가. 항상 부처님을 모시듯 산다는 것은 진정 위대한 특권이 되리라. 탁월한 즐거움이 되리라. 세상과 세월을 어떠한 마음으로 대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 삶의 판도는 요동친다.눈을 뜰 때마다 세상을 그리고 세월을 부처님 대하듯 살자 다짐한다. 내 마음 가운데 부처님 계시고 수많은 사람들 마음 가운데 부처님 계신데 이 세상이 부처님 나라가 아니고 달리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물론 자신과 부처님을 분리시켜놓고 사는 사람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