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大于) 선사에게 청전(淸田)이 시자로 와서 겨울 문안을 올리니 선사가 물었다. “금강정정(金剛正定)은 모두가 다 그렇거니와 봄이 가고 가을이 오는 일은 어떠한가?” 이에 청전이 말했다. “화상께서 물으셔도 무방합니다.” 그러자 화상이 다시 물었다. “지금은 되겠지만 떠난 뒤엔 어찌하겠는가?” “누가 감히 저에게 묻겠습니까?” 선사가 한 번 더 물었다. “나 대우라면 물어도 되겠는가?” “다시 딴 사람이 점검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이와 같이 종사(宗師)를 잘 보필하니, 광채가 시들지 않는다 하겠다.” 그러자 시자가 절을 했다.
Q :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 4대로 구별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A : 위빠사나 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깨달음입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수행을 해야 하는데 몸에서는 오직 4대로 알아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각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이끕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항상 밖으로 나가서 탐진치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일단 안으로 오게 해서 먼저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게 합니다. 이것이 수행의 일차적 과정입니다. 이와 같이 알아차릴 대상을 몸의 호흡이나 움직임이나 느낌으로 하는 것은 외부로 나간 마음을 차단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뒤에 이제는 몸의 요소인 지대, 수대, 풍대, 화대를 알아차리게 합니다. 이때 4대를 알아차리게 하는 것
위산 선사가 여름 안거 해제하던 날 앙산에게 물었다. “그대는 올 여름에 무엇을 했는가?” 이에 앙산이 말했다. “한 뙈기의 밭을 일구어 한 광주리의 조를 심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올 여름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구나.” “화상께서는 올 여름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이에 위산 선사가 답했다. “낮에는 밥 한 그릇 먹고 새벽에는 죽 한 그릇 먹었다.” “화상께서도 올 여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앙산은 물러서면서 혀를 토했다. 이에 위산 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손수 칼날을 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그러자 앙산은 소매를 흔들고 나가 버렸다.
Q : 좌선을 할 때 계속해서 몸이 흔들립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A : 좌선을 할 때 몸을 움직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몸을 계속해서 움직이면 집중이 되지 않고 산만해져서 고요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진동합니다. 그래서 몸은 원래 움직이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좌선 중에 움직이는 것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좋아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이것을 흔들어 주면 순환이 되므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좋아해서 움직이려는 의도가 개입이 된 것입니다. 좋아서 흔들게 되면 계속해서 흔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갈애가 계속되고 집착이 생깁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이런 의도가 개입되면 안 됩니다. 그냥 일어나는
위산영우 선사가 어느 날 백장 선사를 모시고 있었다. 이 때 백장 선사가 물었다. “누군인가?” “여우입니다.” “화로를 헤쳐 보아라. 불이 있는가?” 영우 선사가 불을 헤치면서 대답했다. “불이 없습니다.” 백장 선사가 벌떡 일어나서 직접 불을 헤쳐 작은 불씨를 찾아 들고 말했다. “이게 불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러자 영우 선사가 절을 올렸다. 이에 백장 선사가 다시 말했다. “이는 잠시의 갈림길일 뿐이다. 경에 이르기를 ‘불성의 이치를 알고자 하면 시절과 인연을 관하라’하였으니, 시절이 이르면 그 이치가 저절로 드러나리라.”
Q : 좌선을 할 때 몸이 뜨거워져서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리고 경행을 할 때는 바닥이 차가워서 몸이 오싹하는 느낌 때문에 경행하기가 싫어집니다. A : 좌선 중에 몸이 뜨거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집중이 되면 몸에 열이 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병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있는 것인데 마음이 고요해지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히말라야의 요기들은 집중하는 힘으로 몸에서 열을 내게 하여 추위를 극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열은 감기로 인해 날 수도 있고 어떤 격정적인 생각을 해서 가슴에 불이 붙은 것처럼 날 수도 있습니다. 설령 감기로 인한 것이거나 생각으로 인한 것이나 열이 날 때는 열이 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때 두려운 마음이 일어났으면 그 마음을 알아차리
약산(藥山)이 도오(道吾)와 운암(雲巖)과 함께 산 구경을 하다가 무성한 나무와 마른 나무를 보고 물었다. “마른 것이 옳은가, 무성한 것이 옳은가?” 운암이 이에 대답했다. “무성한 것이 옳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일체 처소에서 광명이 찬란하겠구나.” 그러자 도오가 말했다. “마른 것이 옳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일체 처소에서 모두 말라지게 해야 하겠구나.” 때 마침 사미가 와서 선사에게 물었다. “마른 것은 마르게 두고 무성한 것은 무성하게 두어야 합니다.” 이에 선사가 운암과 도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옳지 않다.”
Q : 좌선을 할 때 몸에서 땀이 많이 나기 때문에 매우 불편합니다. 땀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집중을 할 수가 없습니다. A : 몸에서 땀이 많이 나는 것은 체질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허약한 상태이거나 덥기 때문에 날 수도 있습니다. 수행 중에 생기는 땀도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땀이 날 때는 땀이 날만한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나는 것이므로 단순하게 생각해야지 이것을 문제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땀이 나면 으레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먼저 싫어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땀이 나는 현상을 가만히 주시해야 합니다. 땀이 송알송알 맺힌다거나 흐르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수행 중에 땀뿐만 아니라 콧물, 눈물이 나기도 하는데 이때도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동산 스님이 용산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주인 가운데 주인입니까?” “여러 해 동안 문밖을 나서지 않았느니라.” 동산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주인 가운데 손입니까?” “청산이 백운을 덮었느니라.” 동산이 물었다. “손과 주인의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큰 강물 위의 파도니라.” 동산이 또 물었다. “손과 주인이 만날 때엔 어떤 말을 합니까?” “맑은 바람이 밝은 달을 쓸어버리느니라.”
Q : 좌선을 할 때 몸이 딱딱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때는 호흡을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호흡을 일으켜 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른 수행방법인가요? A : 위빠사나 수행은 어떤 대상이건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는 대상에 개입하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일어나는 대로 주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개입을 하지 말라는 것은 모른 체 하라는 말이 아니고 나타난 현상을 대상으로 지켜보라는 뜻입니다. 숨을 쉴 때 일부러 호흡의 길이와 강약을 조절하면 안 됩니다. 호흡은 생명입니다. 호흡은 몸과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언제나 자연스러운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
남전(南泉) 스님이 농막에 갔는데, 장주(莊主. 농막지기)가 미리 준비했다가 맞이했다. 이에 선사가 물었다. “내가 평상시 출입할 때, 남에게 알리는 일이 없었는데, 어찌 미리 이다지 성대히 준비하였는고?” 이에 장주가 말했다. “지난 밤에 토지신(土地神)이 일러주었습니다.” 남전 스님이 답했다. “내 수행 힘이 없어서 토지신에게 들켰구나.” 이에 시자(侍者)가 물었다. “스님은 큰 선지식이거늘 어찌하여 귀신에게 들켰습니까?” 이에 남전 스님이 일렀다. “토지신 앞에도 밥 한 몫을 더 놓아라.”
래리가 접한 위빠사나 수행은 좌선과 걷기 수행(행선)만 하면서 오직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이었다. 독경의례도 없었고, 마음챙김을 놓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 식사하는 특별한 방법도 없었다. 수행의 핵심은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자신을 깊이 관찰해서 얻는 지혜였다. 래리는 숭산스님이 지도하는 방식의 독경과 절하는 의식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빠사나의 통찰에는 비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 방식, 그 괴로움을 꿰뚫어 보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는 방법에 대한 통찰이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깨어있는 삶 그 자체였다. 래리 로젠버그가 수행을 주도하고 있는 캠브릿지 위빠사나 수행센터 전경. 선불교에도 이처럼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라는 전통이 있다.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