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사색공간은 본성의 보호막인공으로 가득찬 삶 ‘여래태장’상실생활공간을 인류학적으로 연구한 미국의 홀(Hall)은 인간이나 동물이 집단생활을 하기 위하여 비누방울과 같은 빈 공간이 최소한도로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비누방울은 개체를 둘러 싸고 있는 최소 보호막을 뜻한다. 그 비누방울의 공간 크기는 각 민족이나 각 동물에 따라 다른데, 좌우간 그것이 찢어지면 인간이나 동물이 미쳐 날뛰면서 공격적이거나 자해적인 행동을 자행한다는 것이다. 생물의 존재양식을 가능케 하는 비누방울의 공간은 죽음의 무(無)가 아니고 오히려 존재를 가능케 하는 터전이다. 한국사회가 지금 도덕적 가치관의 전도와 혼미현상을 겪고 있다. 이것을 보고 식자들은 언필칭 도덕 재무장을 역설한다. 도덕적 가치관이 물질적 가치관을 밀어내고 인간의
계·정·혜 삼학 수행하면이기적 욕망서 탈출 가능중생이 곧 여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불자는 거의 없겠다. 중생이 곧 부처라면, 중생과 부처의 공통성이 마음에 있어야만 하겠다. 저 공통성이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마음은 늘 좋아하는 것을 하려는 강한 열망의 기호(嗜好)를 갖고 있다. 즉 싫어하는 것을 절대로 하지 않으려 한다. 주자학과 다른 양명학이 인성을 기호로 읽었다. 도덕적 당위가 옳은 것이므로 해야 한다고 강요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하는 척할 뿐이다. 마음은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행복의 이익을 좋아한다. 마음이 싫어하는 것은 고통과 슬픔이다. 17세기 화란의 철학자인 스피노자의 말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 좋다고 판단해서 그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을 욕망
지율 스님의 목숨을 건 100일 간의 단식은 생명과 자연의 소중함에 대한 우리 사회전반의 인식을 재고시키는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고속철도 천성산 구간 노선 재검토 문제는 대통령 공약 사업으로 제기된 후 이행 여부에서 출발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율 스님은 4차례의 단식을 거치며 단순한 공약 이행 촉구에서 벗어나 생명과 자연환경 가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변화 촉구로 진행해 나감으로써 국민적 호응과 공감대를 형성시켰다. 동시에 당초 요구했던 백지화와 대안 노선 검토에서 한 발짝 물러서며 대화와 양보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국책 사업에 대한 발목 잡기’라는 일각의 비판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원칙에 따른 양보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나가는 진일보된 모습으로 평가받았다
정부와 지율 스님이 환경영향공동조사에 합의함에 따라 천성산 공사 진행은 부분적으로 중단될 전망이다. 그러나 합의문에 명시한 ‘환경영향조사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설정할 것인가에 따라 단식의 핵심 요구 조건이었던 발파 작업 중단 여부가 가늠되는 만큼 논란의 여지는 남게 됐다. 특히 합의문을 둘러싼 총리실과 불교계의 분석이 벌써부터 이견을 보이고 있어 공사중단 수위를 둘러싼 양측간의 신경전이 불거질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는 상태다. 2월 3일 오후 10시30분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협상 타결’을 발표한 총리실 이강진 수석은 “필요하다면 한시적으로 발파를 중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실제 조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공사는 계속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그
지하철에서 기독교 여자 전도사가 나의 좌석 앞에 와서 10여분간 목쉰 소리로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 요지는 예수 믿으면 천국행, 믿지 않으면 지옥행이라는 것이다. 나는 저런 짓을 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다 무시하든가 비웃는 것 같았다. 기독교 신자인 어떤 지방자치 단체장들이 행정관할 구역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공언했다고 하고, 남아시아의 해일참사에 대하여 다른 종교들을 독설로 매도하면서 어떤 목사가 설교했다고 한다. 한국과 같은 다종교국가에서 저런 배타적 독선적 전도행위들은 보통 심각하고 위험스런 일이 아니다. 모든 종교의 전법(도) 목적은 많은 사람들을 진리에로 인도하기 위해서다. 무엇이 진리인가? 『성경』의 「요한복음」(18:36-37)에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로댕의 ‘개혁’과 신라의 ‘무아’는대립 개념 넘어선 조화의 두 요소프랑스의 로댕(Rodin)(1840-1917)의 조각인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과 신라의 미륵반가사유상을 한번 간략히 비교해 보자. 로댕의 조각은 오른 손으로 턱을 받쳐 있으면서 우수에 젖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그 사람이 대단한 근육질의 사나이라는 것이다.필자가 고등학교 시절에 사진을 통하여 그것을 보고 좀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대개 사색하는 사람은 근육질이 아닌데, 왜 로댕은 저 ‘생각하는 사람’을 그토록 근육으로 우람하게 조각했을까? 빠리에서 로댕의 조각품들을 보면서 그가 인간정신의 다양한 내면세계를 몸의 현상으로 드러낸 대단한 대가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하는 사람’의 울퉁불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