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대 진덕여왕은 즉위 8년(654) 3월에 사망하고, 김춘추가 뒤를 이어 29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되었다. 김춘추는 진덕여왕대 국내정치와 대당외교의 실권을 장악했던 최고의 실력자였으나, 왕위계승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김춘추에게는 강력한 경쟁자로서 알천(閼川)이 있었는데,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上大等)의 직위에 있었다. ‘삼국유사’ 권2 진덕왕조에 의하면, 진덕여왕 때에 귀족세력을 대표하던 알천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왕의 시대에 알천공・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무림공(武林公)・염장공
부처님오신날마다 친정어머니 손을 잡고 절에 다녔고, 친정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봉사활동을 보며 자랐다. 하지만 막상 스스로 기도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나는 둘째아이의 동자승 출가를 계기로 부산 홍법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지금 고3인 둘째가 6살 되던 해였다. 다른 때와 같이 부처님오신날 친정어머니와 홍법사를 방문했다. “동자승 한번 해보면 좋겠다”라는 주지스님 말씀과 친정어머니 권유로 7살에 동자승 3기에 참여했고, 그 인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3년째 홍법사와 함께 하고 있다.‘정말, 해도 될까…?’ 막상 동자승을 신청했
얼마 전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일자리 포럼을 비롯해서 저희 기관을 후원해주는 봉사그룹 KLC 회원들의 모임, 미술관 신인작가전 ‘이날생전’, 사회복지행정학회 등을 다녀왔습니다. 모처럼 책상을 벗어나서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하는 일들이 참 좋았습니다. 특히 강릉에서 열린 학회에 다녀온 것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학회를 다니면서 사회복지 환경의 변화를 알아보고, 배운 것을 현장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들이 우리가 만나는 클라이언트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면서 각자의 분상에서 열심히들 일을 합니다
경전을 펴면 글자가 나옵니다. 이를 경문(經文)이라고 합니다. 경문을 보다 보면 연결되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경의(經義)라고 합니다. 그 밑에는 경에서 가리키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경지(經志)라고 합니다. 이렇게 경에는 경문이 있고 경의가 있고 경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공부하는 것이 경전공부입니다. 불교는 흐르는 물이 바다로 가듯이 말이나 행위나 생각이 다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을 견성이라 하고, 성불이라 하고, 해탈이라 하고, 입도(入道)라고도 합니다. ‘화엄경’에서는 입법계(入法界)라고 합니다. 도라는 것은 무엇이
‘여기 어디쯤일터인데!’봉선사 16대 주지 임명장을 받고 운악산을 올랐다. 깊은 산 속의 토끼가 ‘너무 맑아 세수는 못하고 입술만 살풋 대고 갔다’는 그 옹달샘 어제도 찾아 나섰지만 허사였다. 오늘도 벌써 두 시간째 운악산을 헤매고 있지만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옛 기억을 떠올리면 고작해야 큰법당에서 서쪽으로 20여분 거리의 산기슭에 있을 법한데 눈에 띄지 않는다. 하긴 행자 시절 단박에 뛰어 넘은 작은 나무들도 30여년을 더했으니 그 가지들이 오목한 작은 샘 하나 가려 숨기는 건 헐할 것이다. 물맛이라면 큰법당 옆 샘물이 일품이
여래사불교대학에서 ‘법화경’ 독송기도는 매주 화요일 오전 사시예불에 이어 진행됐다. 부처님 전에 사시마지를 올리고 예불을 마치면, 동참 대중이 함께 ‘우리말 법화경’을 독송했다. 독송이 끝나면 축원이 이어졌다. 독송할 때에는 경전 길이를 미리 정해두기 보다는 대략 1시간30분 정도 우리말로 풀이된 ‘법화경’을 소리 내어 읽어나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렇게 ‘법화경’ 전체를 다 읽는 데에는 대략 14~15회 정도 기간이 소요됐다. 매주 한 차례씩 100일에 한 권을 회향하는 셈이었다. 매주 화요일에는 ‘법화경’을 독송했고 목요일에는
오늘 법보신문 임직원들이 약사사에서 워크숍을 한다고 해서 저 또한 기쁩니다. 법문을 부탁해서 무슨 말씀을 드릴까 하다가, ‘초심’이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함께 생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스님들이 출가해서 절에 들어오면 처음으로 배우는 책이 있습니다. 출가수행자로서 첫 걸음을 뗀 스님들이 꼭 익혀야 할 책인데, 바로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입니다. 저는 출가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초발심자경문’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곤 합니다. ‘초발심자경문’은 처음 절에 들어온 출가대중은 물론 이미 절에 들어와 살고 있는 스님들도 꾸
28대 진덕여왕 2년(648) 김춘추는 셋째 아들 문왕(文王)을 데리고 당에 사신으로 가서 당 태종의 환대를 받으면서 나당군사협정을 체결하고 귀국하였다. 백제의 침공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당의 황제로부터 군사의 출동을 약속받은 것은 커다란 외교적 성과였다. 그리고 아들 문왕을 숙위(宿衛)로 삼아 당에 계속 머물게 함으로써 당과의 친선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삼국통일이 달성될 때까지 한반도 북쪽의 요동지역에서는 고구려와 당 사이에 사활을 건 전쟁이 전개되었고, 한반도 남쪽지역에서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
결혼 후 남편은 원양어선을 탔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시누이 둘과 아들 그리고 뱃속의 아이가 있었다. 시누이들은 성품이 착하여 항상 서로 의지하며 원만한 삶을 함께 이어나갔다. 하지만 어느 날, 나에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시련이 닥쳤다. 임신 중이던 아이가 결국 세상 빛을 보기 전에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밤이 되면 잠에 들 때마다 무서움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뜬 눈으로 지샜다. 어설프게 잠이 들었다가도 악몽에 시달리다 깨는 일이 반복됐다.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견디기가 힘들어 주위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
연화보살님은 결혼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 가부장적인 남편과 이혼하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아이들이 다 자란 뒤에야 겨우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모릅니다.평생 동안 혼자 외출한 적이 없고, 친구도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법을 잊었고, 감정을 표현할 줄도 모릅니다. 이혼 조정을 위해 남편과 만날 때마다 두렵습니다. 말을 잘하는 남편은 당당하고, 보살님은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줄 몰라 쩔쩔맵니다. 남편은 ‘앞으로 잘 하겠다’고 애원하고 울기도 하며 이혼에 합의해 주지 않습니다. 주
‘이 절을 창건하신 남산종의 종주 자장율사께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귀의하며 예를 올립니다(至心歸命禮 此寺創建 南山宗主 慈藏律師).' (통도사 예불문 중)643년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중국 유학에서 귀국한 자장 스님은 대국통(大國統, 왕이 임명한 스님의 가장 높은 지위)으로 임명됐다. 전국의 스님들에게 계(戒)를 내리고, 각 지역의 사찰을 순회 감독하도록 했으니 이는 승가의 지계청정을 도모했음이다. 그리고 중국 오대산에서 이운해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황룡사와 통도사에 봉안했다. 성스러운 적멸보궁이 이 땅에 처음으로 조성됐음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다시 홍법사로 갔을 때, 동림 어린이법회에서는 어린이들도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나의 아이들에게도 어떠한 유산보다 더 귀한 부처님 말씀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들도 동림 어린이법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나 역시 동림 어린이법회 자모회 활동을 통해 아들과 함께 본격적인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다.우리 가족의 수행은 동림 어린이법회의 모든 동참자들과 마찬가지로, 감사기도와 108배 참회의 절수행이었다. 이 수행을 하면서 나 자신이 그렇게 아팠던, 아파야했던 이
요즘 유튜브가 대세입니다. 다양한 영상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놀이터인데요. 국내에서 가장 많이 쓰는 어플이기도 합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사용 시간이 더욱 상승하고 있으며 그 기세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전법과 포교의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최근 조계종 포교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1인 크리에이터 지원사업과 영상미디어 공모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콘텐츠를 접하는 방식이 바뀌면서 전법의 방향성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죠. 저도 이러한 흐름에 합류하여 불교크리에이터 1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포교원의
28대 진덕여왕(647〜654)은 비담(毗曇)의 반란 중에 귀족세력들의 여왕에 대한 반대가 만만치 않은 분위기에서 즉위하였다. 여왕에 대한 지지세력으로는 김춘추(603~661)와 김유신(595~673)이 대표적 인물인데, 이들은 중첩적인 혼인을 통하여 처남과 매부 사이이자, 장인과 사위 사이가 되는 특수한 관계였다. 이들은 진덕여왕 즉위 이후 귀족세력들의 완강한 견제를 받으면서도 정국을 주도하여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는 주역이 되었다. 김유신은 군사권을 장악하여 백제・고구려와의 전쟁을 담당하였던 반면, 김춘추
하늘에 영롱한 초승달…. 은은한 달빛 사이로 엄마 얼굴을 마주한다. 엄마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과 단어들을 나지막이 외우고 있었다. 딸은 그렇게 새벽마다 엄마의 독경과 염불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 사랑하는 내 어머니! 어머니는 추운 날, 더운 날 가리지 않고 절에 가서 지성으로 부처님께 예불 드렸다. 신심 깊은 어머니 덕분에 자연스럽게 절을 왕래하게 됐고, 자상하신 스님들의 전법 덕분이다.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이 어느덧 불교는 내 삶의 종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결혼 후 홍법사와 신행생활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지금은 대학생이 된
연일 폭풍이다. 제주는 언제나 태풍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제주를 비켜 갔다고 다행이라지만 태풍의 중심 진로에서는 벗어났을 뿐, 제주는 결코 태풍의 영향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머나먼 태평양에서 태풍이 시작되기만 해도 뉴스에서는 온통 바람 이야기로 점철되기 시작하고 제주의 관광산업은 무수한 예약 취소와 더불어 무지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올해 들어 역대로 가장 많은 태풍이 반도를 덮쳤다고 한다. 바람 많은 제주는 물질적 피해가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지만 많은 분야에서 태풍으로 인한 보이지 않는 피해를 호소하는
오늘은 수행을 왜 하려고 하는가, 또는 왜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먼저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문제가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으면 수행을 해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수행을 하려는 마음을 잘 내지 않지만, 수행을 시작해도 끝까지 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미얀마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절박함이 없는 사람은 담마(Dhamma)를 구할 생각을 하지 마라.” 이것은 그만큼 수행을 하려면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동기로 수행을 시작하지만 진행해 가는 과정에 항상 수행이 잘되지만 은 않
이젠 아침저녁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두터워지고 있네요. 이러다 “춥다”는 소리를 하는 계절이 돌아올 것 같습니다. 지난주엔 오랜만에 도반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었네요. 각자의 처소에서 각자의 분상에 맞게 포교들 열심히 하면서 지내는 도반들을 보면서 ‘나도 더욱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였지요. 부처님 제자로서 법당불사를 하였으니 ‘부처님 밥 공짜로는 안 먹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라는 어느 도반의 말처럼 나도 부처님 밥을 공짜로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집에서는 주로 밤에 잠들기 전,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면서 좌선을 한다. 언젠가 신문에서 하루에 단 5~10분이라도 매일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 역시 단기적으로 좌선을 길게 하는 것보다 짧게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처음에는 좌복에 앉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지만 어느새 앉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자취를 감췄다. 참선반 공부와 집에서의 일과수행을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약속을 정하고 지키려 노력한 덕분에 이제는 그나마 ‘앉을 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가장 달라진 부분은 어
고려시대 찬란히 빛났던 법등이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짓눌리며 그 빛을 점차 잃어갈 때 허응보우(虛應普愚,1515∼565) 스님이 출현했다. 독실한 불자였던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선교양종을 세우며 선종(禪宗) 수사찰(首寺刹)로는 봉은사를, 교종(敎宗) 수사찰로는 봉선사를 지정(1550)하는 한편, 연산군 때 폐지된 승과제도를 부활시켰다.(1552) 승과를 통해 배출된 대표 고승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 스님이 이 절의 주지 소임을 보며 남긴 ‘봉은사기’를 통해 당시의 사격을 짐작할 수 있다.‘아침마다 1만 밥솥에 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