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도선율사는 16세에 20일 만에 ‘법화경’을 다 외웠고, 17세에 혜군화상을 은사로 삭발 출가하고, 20세에 지수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26세에 스승의 권유로 지수율사에게 율장을 공부한 후 선정에 관심이 많아 좌선수행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스승으로부터 ‘계행이 깨끗하면 선정이 밝아지고 지혜가 비로소 제대로 잡히는데, 이제 겨우 한 번 들었을 뿐 실행도 해보지 않고 어찌 지범(持犯)을 알겠느냐’라는 꾸지람을 듣고 지수율사에게 돌아가 총 6년 동안 율장과 주석서를 20번 열람하였다.그는 사분율 속에서 대승과 통하는 요소들
요즘 날씨가 너무 좋습니다. 여기저기 어여쁜 꽃들이 나들이 나오라고 유혹을 합니다. 여느 때 같으면 지금쯤 어르신들 모시고 봄나들이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지만 지금은 코로나19로 복지관이 조용하기만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어르신들이 오십니다. 어제는 모처럼 어르신들을 만나 뵈었습니다. 코로나19로 저소득어르신들께 대체식을 드리고 있는데 월요일인 어제가 대체식이 나가는 날이었습니다. 모처럼 어르신들을 만나니 그리 반갑더라고요. 건강하게 계신 것 같아서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어찌 지내시냐”고 안부를 여쭈어 보니, “그냥
대만, 중국, 일본을 다니며 범패와 응문불사, 창작·예술음악까지 다양한 불교음악의 양상을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한국처럼 의례 중 작법무를 추는 경우는 없었다. 혹자는 중국에도 불교무용이 많다고 하겠지만 불교음악과 범패가 다르듯 의례무와 일반 불교춤은 구별된다. 중국 불교역사를 조사해보니 양무제가 “궁중무를 불교무용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었지만, 그것은 불교무용이지 작법무는 아니었다. 인도부터 한국에 이르는 여러 루트를 조사해 본 결과 티베트에 의식무(儀式舞)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라싸대학의 한 지인을 통해 알아보니 “요즈음은 ‘
코로나19로 세상이 암흑이지만 빛이 드는 곳도 있다. 환경이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국가와 도시를 봉쇄하고 사회적 거리두기 일환으로 자가 격리에 들어가고,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공기 질이 깨끗해지고 사라졌던 물고기가 돌아오고, 파란 하늘이 보이고 멀리 설산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죽음과 실업의 공포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이 상황에 인간을 제외한 환경과 뭇 생명들에게 내린 축복이 역설적이다.코로나19는 예견된 일이었다. 불과 십수년 사이에 사스·신종플루·메르스와 같은 무서운 전염병이 계속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또 다른
괴물에게 먹히듯 트랙터에 빨려 들어간 유채꽃들이 산산조각 흩뿌려진다. 샛노란 평원의 곱디고운 유채꽃밭은 그렇게 짓이겨져 참혹하게 망가져 버렸다. 장기간 이어진 ‘사회적 거리두기’가 느슨해지면서 상춘객들이 제주도로 몰려오자 서귀포시가 결국 3만평의 유채꽃밭을 갈아엎은 것이다.2020년 4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로 기억될 것 같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바꾸고, 온 세계를 뒤집어 놓았다. 지구 최상의 존재라 자부하는 인류가 ‘이 하찮은 바이러스’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그간 사람들이 만나 어울리며 해왔던 모든 사회적 행
코로나19가 불쑥 나타나 개인과 사회의 건강을 해친지 벌써 석 달째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사람 사는 세상은 엄청난 충격을 겪고 있다. 물론 경제 분야의 충격이 크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람들 간의 관계 방식이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 더 혼란스럽다. 비대면 비접촉이 일상화되면서 당장 관혼상제의 기존 예법이 변하고 있다. 일례로 문상을 못 받자 부고장에 계좌번호를 적는 것이 배려가 되고 있다. 종교계에서는 대중이 모여 성직자의 인도를 받았던 기존 신행이 줄고 개개인의 직접신행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코로나19로 한 달 동안 산문을 폐쇄했던 합천 해인사가 다시 산문을 개방했다는 소식입니다. 한국불교계는 코로나19가 창궐하자 서둘러 산문폐쇄와 함께 일체의 법회 및 대중모임을 멈추는 등 선제적으로 대응하여 종교계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런 방침 하에 법보종찰 해인사는 지난달부터 산문을 폐쇄하고 법회를 중지하였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불자들로 늘 붐비던 해인사를 생각하면 참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는데 이번에 산문을 다시 개방한다니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해인사뿐 아니라 한국의 산사는 지역공동체와 함께 생활하며 자연유산을 보호하고 불자뿐
누구나 가끔씩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질문은 간단히 답하기 어려워 우리는 쉽게 생각을 그만두곤 한다. 불자들이라면 질문의 크기를 좀 줄여서 ‘불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로 바꾸어 접근하면 그래도 손에 잡힐 정도의 주제로 만들 수 있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위하며 살 것인가’로 범위를 더 좁힌다면 원래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이 구름 잡는 듯하던 질문이 이제는 ‘불자로서 어떻게 행위하며 살 것인가’라는 모양 잡힌 질문으로 바뀐다. ‘어떻게 행위하
감염의 공포가 세상을 뒤덮는 시대에도 꽃은 핀다. 강은교 시인은 “지상의 모든 피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지는 꽃들”에게 “아직 별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달라고 애원했다. ‘꽃’이라는 시이다. 사람이 별에서 꽃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꽃들이 한 잎 한 잎 피어나서 지상의 사람들을 시골 정류장 부근 나무 위로 마중나와 기다리는 봄이다. 감염의 시대와 꽃은 서로 안어울리지만 계절은 부조화 속에서도 흘러간다. 풍경과 시간이 이질적으로 결합하는 시기는 역사적 격변기와 전염의 시간일 듯하다. 수나라 말기 극심한 혼란기에 영웅호걸이 등장하고
우리 조상은 효도(孝道)를 모든 도덕 윤리의 근본으로 삼아왔다. 효도는 부모와 조부모를 공경하고 섬기는 일이며, 은혜를 갚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몸은 털 하나까지 부모에게 받지 않은 것이 없으니 다치지 않게 조심하는 것도 효도이다. 행신을 바르게 하여 부모의 이름을 드러나게 하는 것도 효도이다. 부모님 뜻을 어기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또한 효도인 것이다. 효도는 행신의 근본이기 때문에 가문의 자랑이요, 출신 고장에서도 자랑으로 삼는다. 공적을 기리기 위해 효행을 새긴 비나 효행문을 세워서 사람들이 본받게 하였다. 효자·효
류기운이 쓰고, 문정후가 그린 ‘고수’는 황룡사의 고승 명정대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서사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직접적으로 불교적인 소재를 차용하고 있지 않는 까닭에 불교 웹툰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협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불교사상이나 불교문화에 입각해 해석이 가능한 화소(話素)들이 많다.한국 무협 웹툰의 명작이라고 평가받는 ‘용비불패’의 후속작인 이 작품은 사파무림의 절대자로 군림했던 독고룡의 마지막 제자인 강룡이 스승을 배신한 파천문 사천왕(혈비, 귀영, 막사평, 환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무림에 나타나면서 시
제89칙 : 관세음보살께서는 재난을 당하여 성호를 부르면 중생을 구하신다.상하이 전쟁시 쟈베이취(閘北區)의 집들이 완전히 타서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오직 나의 귀의 제자인 하형배(夏馨培)의 거처만이 불길이 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쟁이 치열할 때 그의 온가족이 함께 관세음보살 성호를 간절히 염했기 때문이다. 가장 기이한 것은 전쟁이 일어난 후 이렛날에 그들 일가족이 국민혁명군 십구로군(十九路軍)에 의해 구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집안 가산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보살의 보우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
진신사리는 처음에는 탑에만 봉안되어 경배되었기에 사람들의 사리신앙도 자연스럽게 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후 인도나 중국, 우리나라 등지에서 탑 일변도에서 벗어나 불상이나 불화에도 사리를 봉안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7세기 후반에 이런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이미 말했듯이 이때는 사리신앙의 역사상 변화 시기였다. 신라나 백제에서 주로 왕실과 귀족 계급 등 일부 계층에서 주로 향유되었던 사리신앙이 이때부터 급격히 대중화의 길로 흘러간 것이다. 따라서 탑만이 아니라 불상, 불화에도 사리를 봉안한 데는 사리신앙의 대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아마도 ‘질문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 세상에 대한 질문을 통해 호모사피엔스는 놀라운 인지혁명을 이루었다. 이는 어린아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어린아이는 모든 것이 궁금하다. 정말이지 기발한 질문들을 한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호기심을 상실한 어른의 고정관념 때문일 것이다. 질문들의 홍수 속에서 아이는 점차 인지능력을 향상시켜 자신과 세상을 자신만의 관점으
제6 정신희유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수보리가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가르침을 듣고 ‘참되구나!’라는 믿음을 낼 중생이 조금이라도 있겠습니까?”라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부처님께선 “그렇게 말하지 말라! 말세중생이라도 그전에 이미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심은 중생이라면 이 가르침을 듣고 ‘참되구나!’라는 깨끗한 믿음을 낼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은 가르침이란 ‘금강경’에서 설한 가르침이니, ‘금강경’을 읽으면 그 가르침이 참되다는 믿음이 샘솟는다는 말씀이다. 비록 ‘많은 생에 많은 부처님 처소에서 선근을 심은 중생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전 세계인구의 약 7%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미래에는 암이나 심장병보다 우울증이 더 심각한 질병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전 세계인구의 약 10% 정도가 평생에 한 번은 임상적 우울증 진단을 받는다고 한다. 과거에는 우울증이 중년기 후반에나 나타나는 질병이었으나, 이제는 어린 나이에 발병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우울증이 무서운 것은 무엇보다 재발 가능성이 그 어느 병보다 높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행복과 만족이 아니라 불행감, 우울, 불안이 인간의 보편적인 일상의 상태가 될 것이라는 예상도
대혜종고(1063~1135)의 ‘간화’는 ‘활구’이고, 굉지정각(1091~1157)의 ‘묵조’는 ‘사구’다. 백파(白坡亘璇, 1767∼1852)의 ‘선문수경’에서 ‘활구’로 3요(청정‧광명‧무애)를 증득하면 ‘조사선’이고, ‘여래선(위앙종, 법안종, 조동종)’과 ‘의리선(교리적 분별)’은 ‘사구’라고 한다.본문에서 “‘공안’을 참구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 마치 닭이 알을 품은 것과 같으며,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과 같고, 굶주릴 때 밥 생각하는 것과 같고, 목말라서 물 생각하는 것과 같고 아이가 엄마를 그리워하는
승이 소산에게 물었다. “시비가 붙지 못하는 곳에도 그 어떤 언구가 있는 겁니까.” 소산이 말했다. “그럼, 물론 있고말고.” 승이 물었다. “그렇다면 그게 어떤 언구입니까.” 소산이 답했다. “구름 한 점 없는 경지라네.”소산환보(韶山寰普)의 법맥은 약산유엄-선자덕성-협산선회–소산환보이다. 위의 문답은 시비분별을 초월해 있는 깨침과 그 깨침의 현성이 어떤 모습인가를 파악하는 것에 주안점이 있다. 분별을 떠나서 파악한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우리네 깜냥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교와 추론의 분별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승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매일 같이 다양한 일들이 수 없이 생겨난다. 그 안에는 좋은 일로써 많은 사람들을 이익 되게 하거나 큰 감동을 주는 일도 있는 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도 생겨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일이 있으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축하나 공경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나쁜 일이 있으면 서둘러 그것을 감추거나 없었던 일로 하기 위해 또 다른 나쁜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잘못된 일이라면 오히려 더 서둘러 사람들에게 알리고 용서를 구해서 다시는 그런
율장연구는 정밀한 작업이 필요하다. 부처님 당시 생활상을 실질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의 관심을 끌 요소가 많다. 그런데 학자의 접근법이 연구 중심이라면 수행자나 불자는 실행의 측면에서 율장에 접근해야 한다. 이것은 중요한 변별점인데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자.첫째는 수행이라는 관점이다. 모든 율장의 궁극적 목적은 개인과 집단이 번뇌를 여의고 해탈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출가자가 율장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출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기초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장은 실체를 제대로 알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특히 작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