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사 조실 청화(淸華·1924∼2003, ‘1종식·장좌불와 50년’ 실천한 선지식) 스님 앞에 섰다.(1997) 삼배를 올리니 맞절로 받으신다. 절을 마치고 말없이 앉았다. 납자의 얼굴을 지긋이 응시한 청화 스님이 한 마디 이른다.“자네는 출가 전에 어떻게 살았나?”윽! 턱 막힌 가슴의 좁은 틈 사이로 유년의 기억이 비집고 들어 왔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이웃집 아주머니와 도시로 나가 살림을 차렸다. 초등학교 1학년 소풍날, 함께 길을 나선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마을 뒷산으로 내달렸더랬다. ‘친구들은 아버지·어머니와
신라 중고기(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가 시작된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법흥왕의 아버지인 22대 지증마립간 4년(503)부터라고 할 수 있다. 지증마립간(500〜514)은 영토의 확장, 국명과 왕호의 개칭, 우경(牛耕)의 실시, 순장(殉葬)의 금지, 주군(州郡)의 설치 등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의 발전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즉위 4년10월 국명을 신라(新羅), 왕호를 ‘왕(王)’으로 확정하고, 왕 이외에는 아무도 왕을 칭하지 못하게 한 것은 마립간시대를 마감하고, 뒤를 이은 법흥왕부터 이른바 불교식 왕명시대를 열게 한
불교는 내 삶에 저만치 떨어져 있는 종교였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멀게만 느낀 불교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친구를 통해서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절친한 친구가 어느 날 불교대학을 다니겠다고 했다. 단순히 절에 다니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보겠다는 친구 말에 단호함이 있었다. 엉겁결에 나도 함께 하겠노라 따라나섰다. 친구와 불교대학을 오가며 때론 부지런히 때론 쉬어가면서 1년 동안 불교공부를 무사히 마쳤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공허한 메아리였다. 바쁜 일상 속에서 수행과 기도는 여전히 뒷전이었기 때문
해가 떠오를 때쯤, 포행을 나섭니다. 매일 매일 홀로 걷는 오솔길을 나름대로 명상길이라 이름 붙이고, 하루를 시작하는 첫 소일거리로 삼은 지가 한철이 지났습니다. 털모자를 쓰고 걸었던 길이 산철쭉과 진달래가 피어나는 봄이 됐습니다. 새색시 같은 연분홍과 붉은색 꽃잎들이 햇살을 받아 빛을 내며 꽃길을 만들었습니다. 꽃길을 걷는 저의 발걸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마냥 가벼워집니다. 경망스러운 듯해 발길을 눌러보지만, 어림없습니다.어느덧 봄날의 꽃잎이 지면 연두색 연한 잎들이 자그마한 아기 손을 내밀어 그림자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넓은
어릴 때부터 ‘반야심경’을 한번 읽고 마음이 힘들 때 마다 일기장에 반복적으로 적었는데, ‘반야심경’에 비추어 봤을 때 스님의 행동, 말씀 모든 부분이 일관성이 있었다. 그래서 일단 영화 스님이 지도해 주신대로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로베트라가 보여준 대로 결가부좌로 앉기로 결심했다. 처음 시작했을 때 몸이 너무 굳어서, 결가부좌로 2분도 앉지 못했다. 홀로 설립한 회사에도 할 일이 태산같이 많았고, 마음속이 항상 많이 복잡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하루 일이 시작되기 전에, 매일 30분씩 명상을 해보기로 했다. 아침
정비석 작가가 옮긴 나관중의 ‘삼국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유비는 오랫동안 양양한 황하의 강줄기를 황홀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논어(論語)’에 나오는 ‘지자요수(智者樂水,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라는 글을 떠올렸다. ‘지혜 있는 사람은 세상만사의 사리에 통달하여 무엇에도 구애되지 아니하는 것이 마치 흐르는 물과 같다’는 뜻이었다. ‘아아, 나는 물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중략)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수분을 공급해 주고 있지 않은가. ‘물은 모든 생명체의 원동력이다. 나는 물과 같은 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사람의 몸에서 난다.’ 인간의 목소리가 최고의 악기라는 얘기다. 하여, 판소리계의 타고난 소리꾼도 궁극의 소리를 얻고자 깊은 산 속 수직 폭포 아래서 피를 토하는 고통을 감내했다. 그 고된 수련 끝에 ‘폭포수 쏟아지듯 장단고저 변화무궁 이리농락 저리농락’하는 경지의 득음(得音)에 이른 창자(唱者)를 명창(名唱)이라 칭한다. 한국 3대 성악으로 꼽히는 범패(梵唄)계의 스님들도 자신만의 소리를 얻어야 한다. 다만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이끌어내는 가곡·판소리와는 결이 다른 숭고미가 배인 소리여야 한다. 불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신라사를 같이 3기로 구분하고 있었으나, 내용에서는 약간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상대(上代, 1대 박혁거세거서간〜28대 진덕여왕)·중대(中代, 29대 태종무열왕〜36대 혜공왕)·하대(下代,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등 3기로 구분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상고(上古, 1대 박혁거세거서간〜22대 지증마립간)·중고(中古, 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하고(下古, 29대 태종무열왕〜56대 경순왕) 등 3기로 구분하였다. 이로서 두 역사서에서의 일치된 구분시점은 28대 진덕여왕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제약회사에 취직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안정적 직장을 얻으면 된다고 해서 했는데, 다음은 무엇을 해야하는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성공을 위해 달리고 회사에서 큰 성과를 이뤄도 연봉은 정해져 있고, 매년 연봉 인상을 받아도 며칠 되지 않는 휴가와 아무리 노력해도 목돈을 모을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살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다고 주목받으며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10배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한 것 같았는데…. 인생이 이렇게 무의미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선택이 필요한 시점, 결단
감기와 몸살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온몸의 세포가 데모라도 일으키는 듯 작열하여 결국 밤중에 병원에 가 링거도 맞고 주사도 맞고서야 조금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감기 초기엔 감기몸살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며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잠시 돌이켜 생각하니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한 모든 세포들도 몹시 힘들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로를 받아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내 몸속의 모든 세포였다. 주인을 잘못 만나 힘들게 고생하는 세포들을 어떻게 위로해 주어야 할지 염려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나 자신의 통증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진흥왕 37년(576) 8월 왕권강화와 영역확장, 불교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이룬 진흥왕이 세상을 떠나고, 둘째 아들인 사륜(舍輪, 또는 金輪)이 왕위를 이어 25대 진지왕(眞智王)이 되었다. 진흥왕의 맏아들인 동륜(銅輪)이 동왕 27년(566)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33년(572)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진지왕은 원년(576) 거칠부(居柒夫)를 상대등으로 삼아 보필케 하고, 2년(577) 봄 2월에 시조묘인 신궁(神宮)에 제사를 지내고 크게 사면을 행하면서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의욕적인 출발을 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
불교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능엄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정확하게는 능엄주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던 나. 그 때부터 능엄주가 무엇일까 파고들며 지금처럼 열심히 수행했다면 공부가 진척되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생긴다. 하루 겨우 몇 독, 처음에는 읽어도 하품이 나고 잠이 왔던 시절이 있었다. 겨우겨우 수행해도 되는 것인지 스님께 여쭤보면, 그래도 하라고 하셨다. 한 번씩은 머리가 무척 아팠는데 그럴 때는 잠시 쉬어도 된다고 조언을 해주셨다. 때때로 스님께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물어보시기도 했지만 특별한 마장이나 상기도 경험하지 못했
스스로 불자라고 하면서도 딱히 불교를 아는 바 없고 누군가 불교를 물어온다면 무슨 말부터 해야할 지 막막한 모습을 보면서 달라지기로 했다. 불자로 살아가려면 적어도 누군가 내게 왜 불교를 믿는가, 불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물어올 때 보다 명확하고 알기 쉽게 전해야 한다는 각오가 생겼다. 무엇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분명하게 알지 않으면 힘들다고 절감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 1996년 9월, 공부의 길을 정했다.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다. 대구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하고 이 도량에 등록하여 불교 공
오늘 아침 출근길에 어르신 한 분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접했다. 가슴이 먹먹하다. 예전에는 어르신들께 안부를 여쭙는 인사말이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식사는 하셨습니까?’였는데 살아가면서 이 말들의 의미를 더 새기게 된다. 매일매일 얼굴 보고 인사 나누던 어르신이 밤새 안녕하시지 못하고 중환자실에 계신다는 가족들의 연락을 전해 들었을 때는 사회복지현장에서 일하는 우리들로서는 한동안 가슴이 아려온다.이 어르신과의 첫 만남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처음 서울노인복지센터에 출근하던 날 관장실로 찾아오시어 “나는 남성합창단을 맡고 있는
‘삼국유사’ 황룡사 장육존상조의 내용은 별전(別傳)·사중기(寺中記)·별본(別本)·별기(別記) 등에 전하는 여러 종류의 전승 자료들을 모아 정리한 연기설화이다. 그런데 설화의 내용은 자료에 따라 약간의 다른 사실들을 전해주고 있으나, 모두 석가3존상의 조성에서 인도(西竺)의 아육왕(阿育王, Aśoka)은 실패하고, 신라(東竺)의 진흥왕이 성공하였다는 내용은 일치한다. 아육왕 불상의 경우는 아육왕의 8만4천탑 설화와 함께 중국측 문헌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특히 아육왕 불상에 대해서는 혜교(慧皎, 497〜554) 찬술의 ‘고승전(高
물론 경전의 한 구절, 한 구절 모두 보석과도 같은 귀한 말씀이다. 그런데 ‘법화경’ 중에서도 ‘보문품’에는 유달리 마음을 두드리는 말씀이 있었다. “어떤 중생이 성내는 마음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성내는 마음을 여의게 되느니라.” 유독 그 말씀을 통해 나는 생활에서 자신도 모르게 올라오는 화를 가라앉힐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일상생활에도 큰 도움을 얻었다. 이 ‘보문품’의 말씀을 매일 쓰고 새기며 하루를 시작하고자 하는 발원으로 본격적인 ‘보문품’ 사경을 시작했다. 눈을 뜨면 자리에서 일어나, 1
한 달에 한 번 있는 명상법회는 자신을 관하는 수행 시간이며, 동시에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 놀이 시간입니다. 처음 만나는 이들과 인사 나누고 서로를 소개해 주는 첫 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파트너와 10분 정도의 짧은 미팅을 하고, 그 후 형식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파트너를 소개합니다. 그러던 중, 굳은 얼굴로 앉아있던 한 보살님이 부담스럽다며 참가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파트너는 물론, 모두가 어쩔 줄 모르며 당황했습니다. 사실,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저는 소개하는 파트너보다 말하는 본인을 더 많이 봅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와 말투
새하얀 사라(紗羅)가 수월관음을 감싸 안았다. 보관(寶冠), 치마, 요포에 정교하게 수놓인 연꽃·봉황·서운(瑞雲)이 투명한 사라의 틈 사이로 화려한 빛을 발한다. 여러 개의 선을 다중으로 처리한 눈썹, 봄누에 실을 토하듯 부드럽게 그어진 가는 눈, 홍조 띤 엷은 미소. 그리고 섬려하게 내려진 금선(金線). 매혹적이다. 그리고 숭고하다. 지난 3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관에서 월제(月齊) 혜담(慧潭) 스님의 세로 5미터의 대작 ‘수월관음보살 팔부성중상’을 처음 마주했을 때 벅차게 차오르는 환희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중국의 전통 묘법
사조도신(四祖道信, 580~651) 대사는 부처님의 혜명을 잇고 모든 중생들에게 심지법(心地法)을 전해주시고자 호북성(湖北省) 황매현(黃梅縣) 쌍봉산 자락에 사조사를 조성하고 법을 펼치셨습니다. 바로 이곳이 사조사(四祖寺)의 조사전으로 아주 의미가 큰 도량입니다.우리가 화두를 받을 때 제일 먼저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 내용은 ‘달마대사께서 인도에서 중국 땅에 무엇을 가지고 오셨습니까’라는 의미입니다. 달마대사께서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분은 양나라 초대황제였던 무제(武帝)입니다. 그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매일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다.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조용히 108배 올리고, ‘천수경’을 읊는다. 그리고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을 한 자 한 자 마음에 새기듯 사경한다. 내면의 흐름과 마주하는 소중한 순간이다. 한 자 한 자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에 자신을 비추고 참회해본다. ‘자리이타’의 발원이 익어가는 시간들이 쌓여가고 또 그렇게 하루의 문을 연다. 언제 어디서부터일까. 아니면 어떤 인연이었을까. 내 삶에서 부처님과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