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 스님은 생전에 화엄경 역경에 주력했다. 한암 스님 은사로 득도 불교 내전-선학 수학 83년 6월 5일 입적 탄허 스님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도교 등 동양사상 전반, 특히 『화엄경』과 『주역』의 으뜸 권위자로 평가받은 당대의 학승으로 손꼽힌다. 번역 작업에만 8년이 걸리고 약 17년의 노고 끝에 이루어 낸 총 47권의『신화엄경합론』이 스님에 의해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암 스님의 유촉을 받아 시작한 역경 작업은 유·불·도에 통달해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감히 시도할 수 없는 대 작업이었다. 작업하는 20여 년 동안 스님은 밤 9시에 자고 자정에 일어나 다시 원고를 작성하는 눈물겨운 고행을 계속했다. 1934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스님는 15년 동안 한암
한국불교연구 틀 마련 역경원 설립-후학 양성 대장경 영인본 발간 88년 5월 25일 입적 효성(曉城) 조명기 박사는 근대 한국불교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한국불교학이 자리 매김 하지 못했던 일제시대 일본에 흩어져 있는 원효 스님의 관련자료를 수집해 한국불교를 연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는가 하면 동국대에 불교문화연구소와 역경원 등을 설립해 체계적인 연구와 후학을 양성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다. 1905년 경남 동래에서 태어난 조명기 박사는 통도사 주지였던 경해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는 등 불연(佛緣)을 맺으면서 불교학에 전념하게 된다. 조 박사는 24세 되던 해 동국대의 전신인 불교전수학교에 입학해 만암, 한영, 포광, 능화 스님 등 당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스님들의 지도아
1968년 5월 17일 사망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접어 나빌레라” ‘승무’로 유명한 시인 조지훈은 한국적인 정서, 선의 미학을 가장 잘 표현한 시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유교가문에서 태어난 조지훈이 불교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혜화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조지훈은 혜화전문학교를 마치고 1941년 월정사 강원의 외전강사를 맡게 된다. 당시 경성제대 일본인 교수 적송 추엽의 추천으로 만몽민속품참고관에 취직됐으나 그 자리를 사양하고 월정사 불교강원 외전강사직을 택한다. 조지훈은 후일 이 선택을 “가르친다는 보람보다 쓰러지려는 나를 가누려는 불가피한 몸짓이었다”고 술회했다. 월정사 강원 생활을 통해 그는 불교적 우주관과 선적 자연관을 흡수한 시기
1912년 4월 26일 입적 한국 근대선의 새벽을 밝힌 인물을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없이 답하는 인물이 바로 경허 선사이다. 한국 근대선의 중흥조 경허 선사는 1846년 8월 24일 전주 자동리에서 태어나 9세 때 의왕 청계사에서 계허 스님을 스승으로 출가했다. 이후 동학사에서 강사로 활동하던 경허 선사는 위없는 깨침을 얻기 전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턱 아래에 송곳을 두고 생사를 건 화두참선에 들어갔다. 어느날 “소가 코뚜레를 꿸 콧구멍이 없다”는 한 처사의 말에 활연대오한다. 경허 선사가 이를 게송으로 지었으니 “홀연히 코뚜레를 꿸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몰록 삼천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유월 연암산 아랫길에/들사람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라는 유명한 게송이다.
선-교 회통한 근대 스승 1969년 4월 17일 입적 설봉 스님은 근대 한국불교에서 선(禪)과 교(敎)를 두루 섭렵한 대표적인 스님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렀으면서도 『선문촬요좭에 토를 달고 『벽암록(碧巖錄)좭, 『무문관(無門關)좭등 교학 강의 있어서도 당대 제일로 손꼽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설봉 스님은 1890년 함경북도 부령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영특해 출가하기 이전부터 이미 스님은 『논어좭와 『맹자좭등 유학(儒學) 서적들을 두루 섭렵했다. 25세 되던 해 안변 석왕사에서 성파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설봉 스님은 이때부터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법을 묻기를 게을리 하지 않을 뿐 아니라
1980년 4월 5일 입적 김동화 박사는 비록 일제강점기 대동화 전쟁을 위한 징용에 참가할 것을 독려하는 등의 글을 남겨 친일 행각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기는 하지만 초지일관 불교학을 연구해 근현대 한국불교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었다. 교학의 밑바탕이 없던 일제 강점기와 근현대를 거치는 동안 김동화 박사는 『불교학 개론』, 『불교교리발달사』등과 같은 기초교리서를 발간해 교학의 체계를 마련하는가하면 강단에서 후학들을 양성해 한국불교학의 토대를 다졌기 때문이다. 김동화 박사는 1902년 경북상주에서 태어났다. 1913년 상주 동해사로 출가해 이듬해 상주 남장사에서 사미계를 수지 했다. 이후 1919년 상주 남명학원에서 사집과를 수료하고 23년 김룡사 지방학교를 졸업한 김동화 박사는 출가 이후 자신
35세에 개안…혜월 스님이 인가 재가불자 위한 「경책시편」남겨 1946년 4월 1일 입적 운봉 스님은 근대 한국불교에서 수행자의 본분을 잃지 않고 오직 깨달음을 위해 초지일관 정진했던 대표적인 선사로 대변된다. 일제 강점기 격변의 시기를 살았지만 흔들림 없이 오로지 수행자가 가야 할 길을 벗어나지 않으며 구도를 위한 정진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자신이 구축한 공간 속에서 궁극의 경계에 이르는 통로를 만들어 놓고 그 통로를 조용히, 그러나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오갔던 전형적인 선승이었다. 1889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스님은 13세 때 일하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5세 되던 해 사미계를 받은 스님은 당대 대표적인 강백이었던 회응 스님으로부터 교법을
89년 1월 8일 입적 비구니 스님들에게 수행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수행을 통해 몸소 실천해 보인 광호 스님(1915∼1989)은 비구니계의 큰 별로 평가받는다. 일생을 혹독한 수행과 무주상 보시를 실천하며 용맹정진에 힘써온 까닭이다. 스님은 1915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1923년, 우연히 어머니를 따라 경상북도 운문사를 방문했을 당시 어느 행자승의 삭발식을 유심히 지켜본 이후 스님은 출가하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비구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이가 아홉 살이다. 17세가 되던 1931년, 비구니 혜원(慧圓) 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21세 때 통도사서 해담(海曇) 율사를 계사로 대소승계를 받은 스님은 23세에 영축총림 통도사 윤고경(尹古鏡) 대강백 회하에
1967년 1월10일 입적 동국대 초대학장 포광(包光) 김영수 거사는 근·현대 한국불교학의 초석을 세운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한국불교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 한국불교사를 종합 정리한 『한국불교사상논고』라는 유작을 남겼는가하면 ‘화엄사상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해 한국불교학계에 화엄학 연구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1894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12세가 되던 해 1895년 경남 함양 영원사에서 환명 정극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포광은 여러 스님들로부터 체계적으로 불교학을 배우게 된다. 『초발심자경문』을 시작으로 『서장』,『능엄경』,『기신론』, 『화엄경현담』등 전통강원 교육을 모두 수강한 포광은 1906년 그의 나이 26세에 영원사 강주(講主) 소임을 맡으면서 학승으로서
1975년 1월 13일 입적 전강(田岡) 영신 스님은 20대 초반에 개안(開眼)을 이루고 30대에 조실의 지위에 오른 현대 한국 선종의 대표적인 선지식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특히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스님 등 당대 최고의 선지식을 찾아 직접 법거량을 통해 인가를 받는가 하면 육조 혜능과 마조, 임제의 사상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경허와 만공 스님 이후 선종의 맥을 잇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전강 스님은 1898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나이 16세 되던 해인 1913년 유기 행상을 하다 만난 한 스님과의 인연에 의해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출가 이후 피나는 수행과 정진을 계속하던 스님은 도반이었던 사미승이 갑작스럽게 죽자 ‘삶의 허망함’을 깨닫고 이 때부터 만공 스님으로
1966년 2월 7일 입적 화산 수옥 스님은 금룡(金龍)·혜옥(慧玉) 스님과 함께 한국불교의 비구니 3대 강백으로 후대 비구니들의 지표로 추앙받는 스님이다. 오늘날 비구니를 대표하는 니승이라면 대부분이 그의 제자라 할 정도로 비구니계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비구니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해 평생을 후학 양성과 주력해 온 수옥 스님은 16세에 출가해 덕숭산 수덕사 견성암에 몸을 담았다. 스님은 그 해에 법희(法喜) 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했으며 다음 해에 비구 청월(淸月)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견성암에서 수행에 전념하던 스님은 19세가 되던 해 전문강원이 있는 해인사를 찾아 고경화상(古鏡和尙) 밑에서 2년 동안 사집과를 수료했다. 28세 봄이 되던 해, 스님은 서
1940년 2월 24일 입적 용성 스님은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격동기 속에서 불교사상가이자 우국지사로 명성을 날린 근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이다. 스님은 대각 운동을 펼쳐 침체된 한국불교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역경작업에 주력함으로써 불교를 대중화시키는데 앞장섰다. 또 3·1운동 당시 만해 스님과 함께 민족 대표 33인에 불교대표로 참가하는 등 일제 강점기 속에서 민족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에도 최일선에 섰던 인물이다. 스님은 열여섯에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수도 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다시 해인사에서 출가를 한다. 해인사에서 승려로서 기본 소양을 배운 용성 스님은 이후 의령 고운사를 찾아 수월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