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놀라운 발견』슈테판 클라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며칠 전 예술의 전당에 다녀왔습니다. ‘어둠 속의 대화(Dialogue in the Dark)’라는 전시회. 이름 그대로 새카만 어둠 속에서 전시된 것을 시각이 아니라 그 이외의 감각기관으로 느껴보는 프로그램입니다. 기대와 두려움 속에서 칠흑 같은 공간의 배회를 마칠 즈음 가이드가 물었습니다. “우리가 이 어둔 공간 속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렀으리라 생각하세요?” 함께 했던 어떤 여성은 “한… 40분 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나는 30분 쯤 지났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한 시간이 흘렀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그래서 시계를 아예 볼 수 없는 상태에 놓이면 우리의 시간감각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프랑스 지질학자 청년 미셀
『그들도 한때는 인간이었다』막심 고리키 지음 / 큰나무 막심 고리키의 이 소설은 다른 러시아 대문호들의 작품에 비하면 단편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착한’ 분량의 장편소설입니다. 그리고 제목이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들도 한때는 인간이었다.” 이 말은 “지금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뜻이 됩니다.인간이었을 때 그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나도 근사한 바지를 입었을 때는 사람대접 받으며 시내에서 살았지. 그런데 바지가 해지니까 사람들이 나까지 무시하는 거야. 그래서 시내에서 쫓겨나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거지.” 예전에는 잘나가던 전직 대위. 그는 아무도 욕심내지 않는 변두리 여인숙을 세내어 운영하면서 ‘예전에는 사람이었던 동물’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주머니를 적당한 이유를 대며 털거나 자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청어람미디어 알래스카의 가을은 무스(moose, 사슴과 동물)의 번식기입니다. 수컷 한 마리가 암컷 무리를 거느리고 사는데 암컷이 수컷을 받아들이는 때는 번식기 끝 무렵의 아주 짧은 시간이라고 합니다. 수컷은 교미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수컷들을 물리쳐야 하고 또 많은 암컷들과 짧은 시간에 힘겹게 번식의 사명을 치르느라 아무 것도 먹지 못하므로 이 시기에만 체중의 약 20퍼센트를 잃을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야 번식에 성공하고 살아남으니 과연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자손을 남긴다는 자연의 이치 앞에 숙연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새틀라이트 무스’라는 녀석이 있다고 합니다. 평소 너무 약해서 싸움 상대도 되지 못하는데 언제나
『닭털 같은 나날』류진운 소설집 / 소나무 “임(林)의 집에 두부 한 근이 상했다.” 어느 집이나 두부가 상해 버려지는 것은 다반사일 텐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야금야금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해오던 중국, 천지개벽이라도 이루어졌는지 높은 빌딩이 쑥쑥 올라가고 몇 개 도시에 돈이 돌자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맨질맨질 기름이 칠해져 갑니다. 이제는 옛날과 달리 누구라도 돈을 벌고 상류층으로 ‘편입’할 수 있는 시절이 왔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출세할 수 있는 시절이 온 줄은 알겠는데 이게 또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미 온갖 연(緣)의 씨실날실이 얽히고 설켜 있기 때문입니다. 배경 없고 돈 없는 서민들이 그런 세상에서 온전히 제 밥그릇 하나 차지하려면 그 뒤엉킨 연줄의 실마리를
『신도 버린 사람들』나렌드라 자다브 지음 / 김영사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주변에서 참 많이도 듣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가슴을 치며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다”라고 넋두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죄업이 두터워서 평생을, 아니 제 자식과 손자들, 대대손손 그 멍에가 씌워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도의 불가촉천민, 바로 그들입니다. 그것도 1억6천 명이나…. 자그마치 인도 인구의 16퍼센트에 달하는 숫자입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더럽고 부정한 운명을 타고 났기에 그저 지금의 이 한 세상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그들은 자기 침이 땅을 더럽히지 않도록 침을 담는 오지그릇을 목에 걸고 다녀야 했고, 더러운 자기 발자국을 지우려고 빗자루를 엉덩이에
『사막의 꽃』와리스 디리, 캐틀린 밀러 지음 / 섬앤섬 사막에도 꽃이 핀다는군요. 일 년 내내 비가 오지 않는 곳. 하지만 메마른 그곳에서도 아주 이따금 비가 내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생명체가 살지 않던 그 대지에 붉은 빛을 띤 화사한 노란 꽃이 피어난다고 합니다. 그 꽃 이름은 와리스. 책을 펼치자 소말리아 유목민 출신의 슈퍼모델 와리스 디리는 다소 건조하지만 아름다운 사막의 삶을 들려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막 유목민들의 질기고도 강인한 생존과 귀소본능, 가축들의 목에서 울리는 딸랑거리는 방울소리와 둥근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 여행의 마지막을 사막으로 정해놓고 있는 내게는 귀가 번쩍 뜨이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서 살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길러야 하는 사막의 여자들이 이런 나
『가만히 좋아하는』김사인 지음 / 창작과 비평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 본다/…/미안하다/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니/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 뿐이다/…/어찌하랴/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룰 길 아득하다/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어떤가 몸이여(노숙,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에서) 언젠가 남편이 말하였습니다. “이젠 늙나봐. 손이 늙어가잖아.” 그 뒤로 내 손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다른 여자들에 비해 집안일을 그리 하지 않아서 그나마 나는 아가씨손 그대로였는데 언제부터인지 보일 듯 말 듯 세월의 손금이 하나씩 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틱낫한의 사랑법』틱낫한 지음 / 나무심는사람 틱낫한 스님의 45년 전 첫사랑 이야기’라는 광고 문구는 퍽 자극적이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평화와 행복과 진리의 메시지를 안겨주는 고승 틱낫한. 그런 분이 젊은 시절 비구니스님과 ‘애정행각’을 벌였다? 책을 열어보기도 전에 ‘행각’이라는 다소 불미스러운 꼬리말까지 제멋대로 붙일 정도로 내 호기심은 컸습니다. 이런 성급한 호기심 덕분에 이 책을 참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읽었습니다. 엉큼한 짐작들이 저자의 마음속을 읽어내지 못하게 방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랑의 마음을 어떻게 보듬고 키워나가야 할 것인가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책을 통해 나름대로 정리해 본 틱낫한 스님의 사랑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랑의 감정
『조선 지식인의 독서 노트』한정주·엄윤숙 엮음 / 포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너무’ 존경합니다. 그러다보니 가족이 굶어도 책을 놓지 않은 선비를 은근히 높이는 일부 지식인의 행태는 결국 책을 현실과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 시대 율곡선생께서도 이렇게 지적하고 계시더군요. “요즘 사람들은 독서가 일상생활이나 활동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높고 멀어 실천하기 힘든 것으로 어렵게만 생각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공부와 독서를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자포자기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p.17) 하지만 성현의 말씀이 담긴 책이니 정성을 다하여 읽고 사색하라는 당부로 점철된 이 책을 읽자면 독서라는 것은 여전히 글 읽는 거 말고는
『오 하느님』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짧은 일정의 외국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입국신고 차례를 기다리다가 손에 들린 여권을 펼쳐보았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인 이 여권 소지인이 아무 지장 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필요한 모든 편의 및 보호를 베풀어주실 것을 관계자 여러분께 요청합니다.” 21세기의 한국 사람은 누구라도 여권 하나만 지니면 떳떳하게 외국을 돌아다닐 수 있고 보호를 받습니다만 수십 년 전에는 왜 이러지 못했을까요? 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백성들. 군대 갔다 오면 면서기를 시켜주겠다고 회유해도 꿈쩍하지 않자 말을 듣지 않으면 만주로 강제 이주시킨다는 협박을 받고서 결국 조선의 부모들은 자식을 전쟁터로 ‘지원’케 하고 맙니다. “총알 피해 댕겨라.”-아버지 “
『타인의 고통』수전 손택 지음 / 이후 얼마 전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기난사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건 늘상 벌어지는 일’이라 여기고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32명의 사망자’라는 구체적인 숫자와 함께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기사가 뜨자 사회는 후끈 달아올랐습니다.곧이어 미국의 NBC방송에서 세상을 향해 지독한 저주와 경고를 퍼붓는 범인의 사진과 동영상이 방송되었고 전 세계 사람들은 그런 영상매체를 통해 자신도 그 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음을 감지하고 새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 사람들의 화제는 가공할 살상의 현장에서 희생자들이 얼마나 끔찍한 두려움과 고통을 느꼈을까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폭력
『시핑뉴스』애니 프루 지음 / media2.0 지지리도 못난 사내 쿼일을 따라다닌 수식어는 “뚱땡이, 코찔찔이, 못난 돼지새끼, 흑멧돼지, 바보 멍청이, 악취폭탄, 방귀뚱보, 기름덩어리”였습니다. 그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일찌감치 실망을 안겨 주어 노골적으로 구박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대도시 뉴욕의 음습하고 구석진 곳. 고향을 등지고 몰려든 사람들의 삶이 더러운 콘크리트 바닥에 뿌리 내리지 못한 채 부평초처럼 떠도는 곳. 그곳의 비좁은 트레일러 안에서 막연히 ‘누가 알아? 내 앞날에 무슨 일이 닥칠지….’라며 혼자서 외쳐대던 쿼일. 재능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다른 똘똘한 사내들보다 비계만 더 많을 뿐인 쿼일. 애욕으로 똘똘 뭉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지만 그녀는 떠나버렸고 설상가상으로 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