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준비의 중요성과 관련해 사형수들의 마지막 증언을 우리는 다음같이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첫째 죽음은 사람을 크게 변하게 한다, 둘째 인간 행위의 폭이 엄청나게 크다, 셋째 죽음에 임해서 바뀌면 너무 늦는다, 넷째 죽는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니다. 1. 죽음은 사람을 크게 변하게 한다. 사형이 선고된 막가파의 최정수는 “사람을 살해한 저는 더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진짜 미친놈이 할 짓을 내가 왜 했는지 아직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변심한 애인을 납치해 살해한 뒤 체포된 김인제도 불교에 귀의해 죽은 애인의 영가를 위해 기도하면서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는 기쁘게, 환하게 죽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살인을 저질렀을 때에는 매우 포악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감옥에 수감되어
사형수들의 마지막 모습은 죽음 준비와 관련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1997년 12월30일 막가파 두목 최정수를 비롯해 여의도 차량 질주 사건의 김용제, 경찰관 총기 난사 사건의 김준영 등 23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모두 1634명이 사형당했다. 사형을 집행 당한 범죄자들은 이윤상군 유괴 살해범 주영형을 비롯 안성 농협 카빈총 강도 살인 사건의 최은수, 지존파 일당과 서진 룸싸롱 범인들 같이 세상에 공포와 전율을 안겨 주었던 희대의 살인범들이었다. 폭력조직 막가파 두목 최정수는 공범 2명과 함께 96년 10월5일 새벽 2시 서울 강남구 포이동 빌라에서 일제 승용차를 타고 귀가하던 단란주점 주인 김경숙 씨를 훔친 승용차에 태워 수원으로 납치했다. 범인들은 이날 낮 12시
바쁜데 죽음 준비 해야하나 ‘죽음 준비’는 곧 ‘삶 준비’ 노인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한 적이 있는 유경씨가 몇 년 전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죽음 준비’와 관련된 강의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건강할 때 죽음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고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하고 삶을 되돌아보도록 하기 위해 준비한 자리였다. 그러나 어르신들의 반응이 냉담해서 그는 당황했다. 어렵게 준비해 강사까지 모셨건만 끝내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이젠 다 살았지, 뭐.” “칠십이 넘었으니 덤으로 사는 거야.” “이만큼 산 것도 고맙지.” 아무리 이렇게 말씀하셔도 죽음은 피하고 싶은 금기의 영역이었다. 젊은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루하루 살기 바쁜 세상인데,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죽음까지 미리 생각해야 하는
“자살은 절대적 개성 즉 자기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의 절대적 표현이며 절대적 정체성의 표현이다. ‘자살하겠다’는 결정은 자유로운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프랑스의 장 아메리처럼 자살하는 사람은 자살의 자기 결정권, 자살의 권리를 주장한다. 자살을 통해서만 자기 존재의 절대적 개성, 절대적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것이다. 얼마 전 E여대 신문의 기자로부터 “자기 뜻에 따라 자살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기자는 다짜고짜 자기 생명은 각자 알아서 할 일이 아니냐, 자살권이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확인만 받으려 했다. 그런 질문밖에 할 게 없는지 한심한 생각이 들어 전화를 그대로 끊었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어쩌면
“자살을 감행하는 순간 모든 자살자는 그들 삶의 이력과는 무관하다.”(장아메리) “죽어버리면 다 끝나는 거 아니냐” (고교 2년생 술을 먹다가 충동적으로 자살) “갑자기 사후세계가 궁금해지고 죽음이 기대된다. 내가 만약 환생한다면 지금 보다 훨씬 나은 세계에 살고 싶다. 이제 삶에 질리고 지쳤다. 원망스런 이 세상과 영원히 안녕이다.”(초등학생의 유서)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잘 되지 않아 답답하면 청소년은 주저할 것 없이 바로 리셋(Reset) 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처음부터 깔끔하게 다시 시작된다. 지금까지 잘 진행되지 않아 골치 아팠던 상황은 그냥 간단히 포기해 버리면 된다. 주인공의 운명은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다.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최근에 남자 대학생이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할 때 리셋 버
2002년 11월8일 충남 천안에서 또 하나의 어린 죽음을 알리는 일기장이 공개되었다. 맞벌이 부부의 외아들 초등학교 5년생 정군이 여자 친구에게 채팅을 통해 자살을 예고한 지 열흘이 지나 집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정 군이 발견될 당시 아파트는 문이 안으로 잠긴 채였고, 집 안에는 정 군 혼자였다. 성격도 쾌활했고 친구가 많았다. 자살하기 하루 전에 친구와 채팅을 하면서 “나 지금 죽을 수 있다. 자살도구를 준비해 놨다. 바이바이” 라고 자살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일기장에도 자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답답한 세상, 답답한 인생. 난 죽고 싶을 때가 많았다. 답답한 세상과 꽉 막힌 인생 때문이었다. 어른인 아빠는 이틀 동안 20시간 일하고 28시간 쉬신다. 어린이인 나
세상을 살다 보면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하는가” 이런 식으로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일이 많다. 우리 사회에 정치적 혹은 사회적 혼란이 오래 지속되고 있는데다가, 경제 불황으로 인한 구조조정, 취직문제, 경제적 어려움, 가정의 불화, 학교성적, 이성문제 등으로 고민하다가 자살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고통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사람에 따라 고통이 찾아오는 시간, 고통의 내용이 다를 뿐 누구나 고통을 당하게 된다. 사바세계는 “고난 없이 살 수 없는, 고난을 견디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감인(堪忍) 세계”가 아닌가.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하는가 라는 반응에 오래 머물러 있지 말고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런 생각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왜 나라고
“자살은 해방행위,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며 마지막 형태의 자유” 이렇게 말하는 프랑스의 장 아메리처럼 어려운 처지에 빠지면 자살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자살을 찬양하는 『자유죽음론』을 1976년 쓴 뒤 2년만에 자살한 장 아메리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지금, 그런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가?” 어려운 처지로부터 벗어나려는 생각에 자살을 감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자살한다고 해서 자신이 저질렀던 어려움, 혹은 자신에게 닥쳤던 곤란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자기가 일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고 해서 마치 자살이 그런 곤란을 일거에 해결해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명을 끊는 문제와 연결시켜서는 곤란하다. 지금 자신의 어려운 처지와 자살이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최근 우리 사회에 자살과 관련된 언론보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통계청이 제시한 ‘2002년 사망원인 통계결과’ 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자살 사망률은 19.13으로 교통사고 사망률 19.12보다 높았다. 그러나 2003년 9월 29일 경찰청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자살 사망률은 28.94였고 노인(61세 이상)은 62.5명이어서 충격을 주고 있다. 유족이 제출한 사망신고서에 입각해 통계청은 자살사망률을 계산했지만, 경찰청은 자살 현장에서 경찰이 직접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산출한 것이다. 사망신고서에 자살이라고 표기하기를 꺼리는 유족들의 심정을 감안해 볼 때, 경찰청의 자료가 보다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경찰청의 통계자료로 본다면 우리나라의 자살 사망률은 세계1위라 말할 수 있
생명의 生-死를 순리에 맡기면 비로소 자연이 되고 인간이 된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시점이 있다. 하나는 생명의 잉태에서부터 탄생으로 이어지는 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현대 의학에서는 두 가지 시점을 유물론적 관점에서만 설명할 뿐이다. 생명의 잉태는 단지 정자와 난자의 결합만으로 이루어지고 죽음 역시 육신의 죽음이 전부인 듯이 말해진다. 2002년에 태어난 신생아는 48만4625명으로 50만 명이 조금 못되지만, 낙태당한 숫자는 2백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한 해 동안 잉태되는 생명 가운데 약 80%인 200만 명은 낙태 수술에 의해 희생되고, 신생아 약 48여 만명 중 40.5%(우리나라의 제왕절개수술 비율) 약 20만 명은 제왕절개 수술
최근 우리 사회에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되고 있다. 웰빙이란 한 마디로 ‘행복’ 혹은 ‘잘 산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흔히 웰빙을 단지 잘 먹고 잘 산다는 뜻으로만 이해되기도 하는데 ‘잘 산다’라는 말에서 ‘잘’에 부여되는 의미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웰빙과 관련해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문제, 그러나 쉽게 간과해서는 안되는 문제가 바로 죽음이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잘(?) 살았다한들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지 못했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 웰빙의 문제를 죽음의 문제와 연결시켜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죽음과 관련해 분명하게 아는 사실은 4가지이다. 첫째 사람의 평등, 누구나 죽는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