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수기와 발원문을 쓴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었던 저의 행동과 말을 그대로 드러내야 했으니까요. 엑스레이가 우리 몸 안을 보여주고 거울이 우리 외형을 비춰주듯 신행수기와 발원문은 마음을 찍는 사진처럼 내가 살아온 날들과 그때그때 마음을 낱낱이 들여다보게 했습니다. 글을 쓰는 과정이 제게는 성찰과 참회의 시간이었습니다.”발원문 부문 대상인 조계종 교육원장상과 신행수기 부문 불교방송 사장상을 동시에 수상한 김영화(반야지) 불자는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로서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을 것 같다”며 “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전국비구니회장상을 받게 돼 더욱 뜻깊습니다. 비구니스님이 계신 사찰에서 뛰어놀며 불교와의 인연이 시작됐거든요.” 수기 ‘아버지를 향한 회향’으로 전국비구니회장상을 수상한 이란희(자비화) 불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아버지를 원망이나 미움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보내드렸다”며 “불교를 공부하면서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이란희 불자는 어릴 적 활동적이고 친구도 많았지만, 20대가 되면서 남들과 비교하며 움츠러들었다. 힘
“부부가 각기 다른 병으로 투병하다 장기이식을 통해 건강을 되찾은 일은 흔치 않은 일이기에 저희 부부는 부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제7회 조계종 신행수기공모전에서 ‘부처님의 미소’로 법보신문 사장상을 수상한 강문순(문수심) 불자는 “부처님 가피로 건강을 되찾았다”며 “부처님과 함께하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간경화로 투병하던 남편이 간이식 수술을 받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조카사위의 신장기증으로 건강을 회복한 자신의 이야기를 수기에 담았다. 강문순 불자는 “투병 중인 이가 있다면 용기를 주고 싶
“수기가 장애인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영광입니다. 용기낼 수 있도록 응원해준 보리수아래 회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제7회 대한불교조계종 수기공모에서 이경남(지족) 불자의 ‘작은이들의 큰 연화심’이 최우수상인 중앙신도회장상을 수상했다. 이경남 불자는 뇌병변 장애를 극복하고 보리수아래 활동을 통해 감사와 기도로 신행생활을 이어간 일상을 잔잔하면서도 감동적으로 풀어냈다. 수상 소식을 전해 들은 이경남 불자는 부처님과 보리수아래에게 감사 인사를 되풀이했다.이경남 불자의 수기에는 올 초 타계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담담하게 표현돼 있어
“앞으로 더 정진하면서 불자답게 살라고 주신 상으로 여기겠습니다. 포교사로서 초발심을 되새기며 열심히 정진하고 포교하겠습니다.”제7회 신행수기 공모에서 최우수상인 포교원장상을 수상한 이을선(문수월)불자의 ‘기도로 이겨낸 슬픔, 기도로 일궈낸 행복’은 삶의 고난과 역경을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지혜롭게 대처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심사위원들의 큰 호평을 받았다. 이을선 불자는 “신행생활을 돌아본다는 의미와 나의 신행수기가 문서포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동참하게 됐다”고 이번 신행수기 공모에 동참한 동기를 말했다. 그러면서 “
“35년 동안 한 해에 수차례씩 봉정암에 올랐는데 이제는 나이도 많고 어렵겠기에 법보신문에 회향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써봤지요. 대상까지 받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요. 부처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일생에 걸친 불사권선과 불자로서 살아온 삶의 궤적을 진솔하게 고백한 내용을 담은 ‘봉정암’으로 제7회 신행수기 공모 대상인 총무원장상을 수상한 이채순(불일심) 불자는 인터뷰 내내 밝은 웃음과 함께 했다. ‘봉정암’은 코로나19가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는 신행수기였다. 이채순 불자는 올해 76세로 30년 넘게 아산의 한 전
발원이란 나 자신은 물론 이웃과 사회의 고통을 향한 자비롭고 맑은 샘물이다. 그 샘물은 나와 온 세상을 아름답게 적시는 일심의 바다와 같다. 그러하기에 발원문을 쓰고 발원문을 읽는다는 것은 내 생명을 깨우고 내가 사는 공동체를 행복과 평화로 물들이는 진심어린 마음의 기도라 할 것이다. 또한 그 발원이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마음의 고백이기도 한 것이다. 거기엔 내가 저지른 죄업에 대한 참회가 담겨 있고 그 죄업을 바꾸어 나와 세상을 청정하게 가꾸려는 원력이 서려 있다.금번 조계종 신행수기 공모전 발원문 분야에 많은 불자님들이 참여
5월은 감사의 달이다. 여느 때와 같다면 좋은 인연들과의 자리가 많기에 행복한 추억을 많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이지만 올해는 달랐다. 코로나19 여파로 교계 최대 행사인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도 윤사월로 연기되고 불교문화축제인 연등회는 취소됐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지, 제7회를 맞이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신행수기 공모에는 코로나가 불자들에게 잠시나마 휴식 아닌 휴식을 안겨주어 좋은 결과물들을 배출했다.신행수기 공모 대상인 총무원장상을 수상한 이채순 불자의 ‘봉정암’은 코로나가 없었다면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했을 것이다. 코로나 사태는
시방세계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 그리고 모든 중생의 청정한 본성에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번뇌와 욕망의 세계에 태어나 나와 남에 집착하고, 물질과 정신에 집착해 한량없는 유전을 해오면서 겨우 불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법이 가진 광대한 마음의 안식, 다른 존재들을 청정하게 하는 자비,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마음을 매 순간 자각하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육도에 윤회하는 어리석은 중생이 되어 괴로움 속에서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지극한 마음으로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 참회하고 또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거룩하신 가르침에 귀의합니다.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합니다.삼계의 스승이시며 자비로 세상에 오신 부처님,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고자 팔만사천의 가르침을 법비로 내려주신 부처님, 모든 생명의 존귀함을 처음으로 설하시고 사람 사이에는 높고 낮음이 없음을 보여주신 부처님,부처님께서는 우주 법계에서 가장 지고하신 진리의 연꽃으로 피어나셨습니다.언제 어디서나 우리 곁에 계신 부처님, 여기 불제자 부처님 전에 지성으로 참회하오니 가엾게 여기시어 자비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옵소서.나를 미워하고 가족을 원망하고 이웃을 질투
새벽녘 여명이 밝아오는 순간 나는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겨울나무처럼 살아가리라. 다 벗어버리고도 꼿꼿한 자세, 다 비우고도 꽉 찬 기운으로 끈기와 기다림으로 시절인연이 오면 본래의 모습을 피워내는 것은 잠시도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음이리라.나는 교정기관에서 무기수란 신분으로 이름 대신 수번으로 살아온 지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지금은 오랜 꿈이던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해 못다 한 배움의 길을 가고 있으며, 열심히 모범수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생활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다.
부처님 터전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부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낙산사에 계시는 관세음보살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 어디에선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힘겹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내 나이 겨우 42세에 하반신 마비가 오기 시작해서 44세에는 혼자 일어서고 눕고 걷기도 힘들고 차를 타기도 힘들었다. 두 아들 교복을 다리미로 다려 깔끔하게 해서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다림질을 할 수가 없었다. 엎드려서 해도 안 되고 서서 할 수도 없고 눈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큰아들 고3때였다. 한 달에 한번 마지
어느덧 50대 후반을 훌쩍 넘겨 발자취를 돌아다보니 굽이굽이 지나온 굴곡진 세월이 가슴 먹먹하게 자리한다. 인생사 사연 없는 삶 없겠지만,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던 시련을 피하려 발버둥 치던 시간들이 다시금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IMF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고 수많은 국민들이 힘들어할 때, 십 수 년을 건축설계사로 성실히 근무하던 남편이 갑자기 일자리를 잃었다. 청약적금 부어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를 팔고 애들 보험까지 해지한 돈으로 남의 땅을 임대해 철물점을 차렸다. 하지만 막연한 생각으로 시작한 장사가 잘될 리 만무했다. 남편이 못
지난 해 추석 이틀 전(9월11일)이었다. 남편은 정년퇴직 후 전원생활을 시작해 6년여를 시골생활 중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올 정도로 정성을 기울여 800여 평 농장을 가꾸면서 전원생활의 꿈을 실현해가고 있었다.그 날, 추석 전날 온다고 했었는데 웬일인지 전전날 오후 4시쯤 귀가해서는 소화가 안 된다며 누웠다. 동네 한의원에 가보라는 말에 선뜻 일어나 나간 지 한 시간 쯤 뒤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의원에서 집으로 오다가 쓰러졌는데 누군가 일으켜줘 벤치에 앉아있다고 했다. 마침 아들이 집에 있는 저녁시간이어서 먼저 뛰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때론 엄하지만 그 무엇보다 큰 사랑으로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기억만큼은 어디 가서 “저는 행복하게 자랐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손녀라면 언젠가 찾아올 이별의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순간은 가장 중요한 시기에 찾아오고 말았다. 내가 이제 막 고3 수험생이 된 3월의 봄이었다. 나는 그날 학교를 마치고 바로 할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갔고 할아버지께서 코를 골며 주무시고 계셨다. 할아버지 옆에 누워있던 나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르타야 훔.”그는 이생에서의 마지막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화장터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도뿐이었다. 전날 밤, 조문 온 법우가 내게 당부를 했다. 화장터로 모시면 마음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를 테니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그때 꼭 기도를 하라는 조언과 함께 네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법우의 말이 맞았다. 기도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양 손에 염주를 꽉 쥐고서 광명진언을 외웠다. 두 뺨으로는 눈물만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대구가 전 세계에 알려졌다. 나는 그 대구에 살고 있다. 불교와 인연이 닿은지는 십여년 남짓 되었지만 유명하다는 사찰을 찾아 기도하는 정도였다. 동화사 대구불교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한 적도 있었지만 일년도 채우지 못하고 남편의 암 수술과 병간호를 핑계로 중퇴했다. 다니는 절을 정해 놓고 신행 생활을 한 것은 삼 년쯤 되었나 보다. 요즈음은 남편의 사업도 뜻대로 되지 않고 아이들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기도에 대한 회의가 슬슬 생겨나기 시작했다. 절에 갈 때마다 기도했지만 법당을 나올 때는 뭔가 모자란다는 느낌에
나의 재적사찰은 충남 서산 부석사이다. 할아버지를 따라 절에 가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불자가 됐다. 중학교 3학년 어느 여름날 할아버지는 “시집가서도 부석사를 큰집으로 알고 다녀라”하시면서 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남들 대학 다니는 스무 살에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이 부러워 갈피를 잡지 못할 때는 기도보다는 부처님께 투정부리기 위해 절을 찾았다. 남편은 둘도 없는 효자였다. 인연이라서 그랬을까? 신혼여행에서 남편의 얼굴을 보니 유난히 검었다. 원래 피부색이냐고 물으니 시아버지가 간경화로 돌아가셨
이상한 일이었다. 아버님을 운구차에 모시고 벽제승화원 납골당으로 가면서 미약하게 스님의 독경소리가 귀에서 맴돌았다, 장례운구차량이라 일부러 독경을 들려주나 싶어 주위를 들러보고 여쭤 봐도 그러한 일은 없었고 그 소리는 화장을 마치고 납골당에 안치하기 위하여 가기 까지 귓가를 맴돌았다. 일찌기 어머니께서 절과 인연을 맺어 어릴 적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소풍삼아 놀러가는 느낌으로 절에 가곤했다. 사실 불교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일년에 두어 번 큰 행사에만 사찰에 가는 정도로 만족했다. 그래도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게 되면 사찰이 주는
나의 종교는 원래 모태 신앙이었다. 어머니가 전남 강진에 위치한 무위사라는 절에서 8년을 기도한 끝에 나를 잉태하셨다. 그렇게 나는 세상과 인연을 맺었다. 어머니의 지극한 기도 공덕과 부처님의 가피로 이 땅에 오게 된 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1997년 서울 잠실에 소재한 불광사라는 절과 인연을 맺기 전까지는 어머니를 따라, 혹은 이모를 따라 초파일에만 절에 다니는 초파일 불자에 불과했다. 심지어 1990년 결혼해서는 교회 장로로 있는 외사촌 언니를 따라 교회도 갔었다. 그렇게 종교적 방황을 거듭하던 중 시간만 나면 절에 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