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 실천은 대승불교 핵심 100억 갖고도 불행한 게 중생 참다운 행복은 이타행서 비롯비교하지 말고 그저 베풀라 불교에서는 자성을 깨쳐서 견성하는 것을 최상의 행복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그런 도리, 즉 자성을 깨쳐서 견성하는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 이 세상이 덧없고 괴롭다는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무상을 느낄 때 발심이 되고 발심을 할 때 도에 대한 구도심이 간절히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세상을 최상의 행복이라고 느낀다면 발심이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덧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보다 더 나은 가치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현실을 떠난다고 해서 어떤 행복이나 최상의
화합 요청하는 시대 승가정신 회복으로 가정·사회·국가 밝혀야 최악의 절망에서 최대의 희망 찾는 게 바로 부처님 가르침 불교는 가장 인간적으로 소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드러내 보이면서 자기의 마음을 건사해 가도록 하는 종교입니다. 불교의 주제는 바로 마음이고, 이 마음은 또한 세상살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의 망념을 주제로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갖고 수행함으로써 삶을 바로 알고 바로 생각하는 것, 그 마음이 곧 불교를 행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을 배우는 불자들의 신행과 수행은 모두 마음 문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불교의 근본 대의가 됩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 신앙적 정서를 말할 때는 흔히 네 가지로 말합니다. 첫 번째는 불교를 만난 인연으로 부처님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강백들이 쏟아낸 희망의 감로수에 남산 목멱골이 흠뻑 젖었다.재가불교 근본도량 대원정사와 법보신문이 6월 29일∼7월 3일까지 5일 동안 남산 대원정사 큰법당에서 ‘5인 대강백 초청 대법회’법석을 펼쳤다. 조계종립 승가대학원장 지안 스님의 입제 법문으로 시작된 대강백들의 회상에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200여명의 불자들이 찾아들어 대강백들이 쏟아낸 희망의 감로수에 흠뻑 젖었다. ‘대강백, 희망을 설하다’를 주제로 마련된 법석에서는 30년 이상 전국 강원에서 스님들을 지도해온 대강백들의 사자후가 끊이지 않았고, 경제난으로 주름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대중들은 모처럼 얼굴을 활짝 펴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꿈꾸는 시간을 가졌다. 현재 한국불교에서 대강백으로 추앙 받는 법사 스님들은 부
‘대한민국의 선진화’는 ‘불교의 선진화’와 반드시 같이 간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선진화 없이 대한민국의 선진화가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21세기 대한민국이 선진화에 성공하려면 국민들 모두가 21세기 선진국민다운 ‘정신적 자본(품격)’ ‘마음의 자본(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선진화가 요구하는 이 21세기적 ‘정신적 자본’ ‘마음의 자본’은 우리 불교가 그 어느 종교나 사상보다도 가장 많이 창출하고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21세기는 불교의 진리성이 가장 잘 발현되는 시대이다. 21세기 이 시대 이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어느 때 발전하고 어느 때 퇴보하는가? 등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 움직이고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실
법보신문이 창간 20주년을 맞아 재가수행도량 대원정사와 공동으로 개최한 대강백 초청법회가 6월 29일 오전 11시 남산 대원정사 큰법당에서 막을 올렸다. 입재 법회에 참여한 200여 사부대중은 조계종립 승가대학원장 지안 스님이 ‘마음’을 주제로 80여 분 동안 설한 감로수에 흠뻑 젖어들며 새로운 삶의 희망을 꿈꾸는 시간을 가졌다. 지안 스님은 이날 법문에서 “최악의 절망 상태에서 최대의 희망을 찾아서 살아가라는 것이 곧 부처님의 법문”이라며 들끓는 욕망에 사로잡혀 희망을 잃지 않도록 자신의 삶에 충실할 것을 강조했다. 스님은 이어 “마음은 역사적 물건이 아니며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다”라며 “신체라는 역사적인 물건이 초역사적인 마음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니 욕망을 끊어 마음을
대한민국의 선진화가 선진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듯이 불교의 선진화는 선진불교(先進佛敎)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선진불교란 무엇인가? 선진불교란 21세기라는 시간과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 빛과 광명이 되는 불교를 의미한다. 이 21세기라는 시간대와 대한민국이라는 공간대에 사는 오늘의 우리 중생들의 문제들,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당면 문제들과 어려움을 풀어주는 불교를 의미한다. 이 시대 우리들에게 희망과 행복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줄 수 있는 불교를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의 선진불교는 다음의 4가지를 목표로 해야 한다. 첫째, 시대불교여야 한다. 부처님은 수많은 진리의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그 중에서 이 시대에 맞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가르침을 선별해야한다. 그리하여 이 시대 중생이 당면한
오늘은 마음과 업에 대한 주제로 마음에 대한 체계적 이해와 마음 닦음의 실천에 관해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마음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겠습니다. 마음은 쉽게 말해 우리 삶의 주체입니다. 업은 중생을 이끌어 가고 있는 정신적 주체입니다. 여러분 대다수는 마음과 업의 개념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실천적인 부분에서는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마음과 업에 대한 실천적 부분이 따르지 못하다보니 계속해서 고통과 어려움을 느끼고 윤회가 계속 되는 것입니다. 윤회는 생사의 반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의 행동을 오늘, 내일 또 반복하는 것도 윤회입니다. 이렇게 시간적 윤회를 계속하도록 하는 주체가 마음이고, 그 마음속의 주체가 바로 업입니다. 이 윤회의 주체인 업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것입니다.
도(道)라는 것은 다운 것, 답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답고, 남편은 남편답고 아내는 아내답고, 스님은 스님다운 것, 이렇게 본분사(本分事)를 여의지 않는 것이 도입니다. 그렇다면 불자다운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부처님오신날에 등을 밝힙니다. 왜 등을 밝힙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등을 켜면 재수가 있고 사업도 잘 되고 복도 받을 거라 생각합니다. 특히 불심(佛心)이 깊다고 하는 부산과 대구의 불자님들 중 마치 부처님을 귀신처럼 생각하고 스님들을 점쟁이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경우를 적지않게 경험했습니다. 절에 와서 남편의 사업이 잘 되고 아들이 좋은 대학 들어가게 해 달라고 빕니다. 마치 무당에게 부탁하듯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그런 것을 비방할 방(謗)자를 써서
가족, 친척, 친구가 행복을 주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깊이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미친 사람들 속에서 혼자 제 정신을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가족, 친척, 친구들을 피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들에 대해 집착할 경우 고통이 뒤따르니 집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재산, 돈, 재물 모두 행복의 원인이 아니라 독약과 같이 나를 해치는 것들입니다. 모두 무상하니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만 상처가 나도 너무나 아프듯이, 몸 역시 행복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입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나쁜 임금’과 ‘나쁜 법’으로 감옥에 갇히듯이 번뇌 때문에 우리는 업보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은 번뇌와 업 때문입니다. 번뇌가 없으면,
‘안녕하세요.’를 티베트어로 ‘따시뗄레’라고 말합니다. 이는 ‘행복’ 또는 ‘좋은 과보’를 의미합니다. 부처님의 모든 말씀을 요의법(了義法)으로 해석해 내는 까담파(티베트에 보리도차제법을 처음 전한 아띠샤에 의해 창시된 학파)에서는 이러한 인사말을 통해 좋은 마음이 일어난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행복의 근원은 마음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나를 다스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것을 번뇌라고 부릅니다. 대표적인 번뇌는 탐, 진, 치의 삼독인데 이 가운데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치심(癡心)으로 무명(無明), 또는 무지(無知)라고도 부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고통의 근원은 무지이며, 무지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공성(空性)을 아는
우리는 살아있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와서 생명의 존엄성이 크게 손상돼 사람들은 걸핏하면 폭행을 일삼고 무작위로 살해를 합니다. 이는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과거 우리는 어린 싹이 자라는 과정을 보며 생명의 소중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흙을 멀리하고 도시·산업·정보화 사회에 살다보니 삶이 메말라 인간의 설자리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보다 편리하게 살고 있기는 하지만 인성은 과거보다 못한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들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겉모습은 다를지라도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주고받
건강한 몸이란, 행복한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근본을 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 도리를 다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밝은 거울을 들면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아도 얼굴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처럼, 농부가 밭에 씨를 심으면 싹이 나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움이 저절로 트는 것처럼, 등불을 켜면 어둠을 없애려 하지 않아도 어둠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처럼 건강한 몸과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드러나는 현상 그대로가 내 모습일 것입니다. 인생은 무상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만 무상한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의 두두 물물, 변하지 않는 것은 어느 것도 없습니다. 자연과학자들이 말하기를 지구가 오십억 년쯤 태양의 빛과 열을 받으며 태양의 은혜를 입고 지내왔는데 언젠가는 태
날씨가 이렇게 쾌청한데 공부하기 위해 오신 불자님들 장하십니다. 3년 전부터 공생선원에서는 불자님들의 수행을 지도할 교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사찰을 다니며 수행하신 불자님들이라도 막상 수행에 대해 물어보면 잘 모르시기에 ‘수행에 관해 정리를 좀 해야겠다’ 싶어 시작했는데 얼마 전 『일상 속에서의 수행』이라는 제목의 소책자가 완성됐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수행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공부가 잘 되다가도 문득 ‘공부가 뭔지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도대체 이 공부가 뭔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 때도 있습니다. 왜 이 공부를 하는가, 공부해서 무엇 하나, 공부 하지 않아도 살고, 심지어는 안하는 사람들이 더 잘사는 것 같은 생
제불(諸佛)은 설궁(說弓)하시고 조사(祖師)는 설현(說絃)하시니, 불설무애지법(佛說無碍之法)은 방귀일미(方歸一味)어니와 불차일미지적(拂此一味之迹)하야사 방현조사소시일심(方現祖師所示一心)이니 고(故)로 운(云), 정전백수자화(庭前栢樹子話)는 용장소미유저(龍藏所未有底)라 하시니라. 〈선가귀감(禪家龜鑑)〉 제불(諸佛)은 설궁(說弓)하시고 조사(祖師)는 설현(說絃)하시니, 부처님은 활을 설명하시고 조사는 활의 줄을 말씀하셨다. 서산대사께서 부처님과 조사님의 가르침을 비교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활은 불법의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활의 줄은 활의 일부입니다. 활을 전체적으로 보면 굽은 곳도 있고 곧은 것도 있고, 처음과 끝이 긴 곳도 있고 짧은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활의 줄은 곧습니다. 물론 당기기
십여 년 전만 해도 ‘서민의 발’하면 단연 버스였습니다. 어찌나 사람이 많이 탔던지 콩나물시루 같았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잘 연결된 지하철이 있어 버스 이용하기가 다소 수월해진 느낌입니다. 지금도 길이 막히면 꼼짝없이 거리의 미아가 되곤 하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버스 한번 타는 것이 마치 한바탕 전쟁을 치루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우연히 버스를 타게 됐습니다. 퇴근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버스 안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서서 가는 승객들이 십여 명 정도여서 격세지감을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 되어 버스를 내려야만 했습니다. 점차 사라져가는 우리들의 경로사상 때문이었습니다. 노인에 자리양보하는 건 옛 말 버스가 한창 복잡한 도심을 벗어날 무렵이었습
불교계 대책위원회 결성…이승만 담화로 45% 농지 회수농지 대신 사업체 불하…경험미숙과 분규로 대부분 상실 1965년 「대한불교」에 게재된 농지개혁 후 불교계 재산이 줄어들고 있음을 전하는 보도 기사 사진제공=민족사 어떤 종교 단체든지 교단을 유지하고,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물적기반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불교계의 경제적 기반은 농지에 있었다. 일제시대에 사찰의 재산은 사찰령에 재산을 매각할 때는 사전에 관청의 허가를 받게 되어 있어서 매매가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사찰은 많은 농지를 보유하는 대지주였다. 해방이 되고 나서 농지개혁이 진행될 때 좌우익의 갈등으로 우선적으로 귀속농지만 유상몰수·유상분배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북한의 경우 1946년 3월 농지개혁의 원칙에
환경 보호를 위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과제는 에너지에 관한 부분입니다. 현재 많은 티베트 오지에 태양열과 바람을 이용한 발전소를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일 것입니다. 현재 소요되는 전력소모량이 아주 많고 전기세도 비쌉니다. 지구의 자원소모도 너무 많아서 환경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름으로 발전하는 비용이 너무 높습니다.과거 줄푸 사원에는 전기가 없어서 태양열 발전을 설치했습니다. 과학적인 각도에서 볼 때, 태양열의 오염도는 아주 낮습니다. 그러나 설치비가 상당히 높고 많은 양을 사려면 아주 비쌉니다. 이런 점에서 약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태양열 및 풍력 발전은 환경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특히 티베트는 세계의 지붕이어서 태양빛이 충분해 여기에 적합합
이 법문은 지난해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티베트의 최대 종파인 까규파가 일 년에 한 차례씩 개최하는 ‘세계 평화와 조화를 위한 대기원법회-제25회 까규 묀람 첸모’ 기간 중 까르마빠가 대중에서 설한 법문이다. 이 법회에는 티베트와 인도의 스님 7000여 명과 재가불자 3000여 명이 참석했으며 한국인 불자들도 70여 명 동참했다. 한국인 순례단을 인솔, 인도 보드가야 대탑에서 열린 법석에 직접 참여한 혜등정사 주지 설오 스님은 법회 기간 중 한국인 불자들을 위해 까르마빠의 법문을 통역했으며 본지에 까르마빠의 생생한 육성 법문을 번역해 보내왔다. 본지에서는 두 번에 걸쳐 생태문제와 승가의 소유에 관한 까르마빠의 법문을 게재한다.
오늘 벌써 삼동 결제하고 석 달이 지난 마지막 해제 날을 맞게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한 철 동안 각기 공부하는 방법이야 백 사람이 똑같을 수 없고 천 사람이 모이면 천 사람마다 자기 생각하는 방법대로 수행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방법이 다르고 수행하는 모습이 다르다 할지라도 목적은 하나입니다. 이 목적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쉽게 말하면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깨달음이란 무엇을 깨닫는다는 말입니까. 자기가 자기 마음을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선문에 보면 그 마음 하나를 깨닫기 위한 방법으로 온갖 것이 있습니다. 특히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화두공안을 들어서 자기 마음을 향해 주인공을 깨달아 보겠다고 노심초사 하며 주야로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해 오는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거대한 우주도 쪼개고 쪼개다보면 분자가 되고, 원자가 되고, 중성자, 소립자가 됩니다. 이것을 다시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순수한 에너지만 남게 됩니다. 이러한 순수한 에너지를 공자님은 태극이라 했고, 부처님은 불성이라 했으며 예수님은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공자님의 태극이나 부처님의 불성이나 예수님의 하나님이나 결국은 같은 말인 것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이러한 순수 에너지 차원에서 본다면 부처님 아닌 것이 없고, 하나님 아닌 것이 없으며 태극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성냄-욕심 버리면 업 자연 소멸 소박하고 작은 것은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집착된 마음, 욕심 있는 마음을 가질 때 이러한 소박하고 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