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것은 온통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결돼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 내면과 외면, 물질과 정신이 결코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영향을 주는 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나와 너, 아내와 남편, 남자와 여자,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미와 추, 성과 속. 이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입니다. 동전의 양면 같은 그런 관계입니다. 대승불교의 핵심은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여실지견(如實知見)과 여실지견행(如實知見行)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실지견이란 무엇입니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입니다. 사물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지혜라고 합니다. 팔정도(八正道)의 관점으로 보자면 정견(正見)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우리의 삶과 윤회’ 입니다. 불자들은 윤회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깊이 윤회를 믿는지, 정확한 지혜와 지식을 갖고 있는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윤회를 확실하게 믿는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마음을 열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끊임없이 나아갑니다. 우리가 살아야 되겠다고 이렇게 계획하고 실천하기 이전에 삶이라는 형태가 이어집니다. 마치 고지대에 있는 물이 계곡과 강을 따라 바다에 이르러 멈추려고 해도 멈추지 못하고 끊임없이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이 흐르는 원인은 중력입니다. 우리가 삶을 멈추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진리의 근원적인 모습, 일심이라는 진리에
오늘은 ‘운명을 바꾸는 법’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여러분,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참으로 어려운 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으로 바꾸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이지 않은 무언가 획기적인 다른 수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이런 절묘한 방법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요. 불교에는 이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주제가 운명이니, 바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는 운명을 바꾸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잘 아시겠지만 바로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부처님 명호를 열심히 부르는 수행이 있습니다. 기도라고도 하고 염불이라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세상은 보는 시각에 따라 동일한 것도 다르게 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마다 업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연 또한 이와 같아서 같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사람마다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얼마 전 법정 스님께서 입적하셨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양한 기억을 가지고 있겠지만 저는 법정 스님에 대한 남다른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은 비록 저와 짧은 인연이었지만 큰 가르침을 주신 스승입니다. 저는 법정 스님이 입적하시고 상좌가 아닌 스님 중에 가장 먼저 스님의 모습을 접했습니다. 총무원에서 소임을 맡고 있기에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게 됐습니다만 돌아가신 모습은 제가 수십 년 전에 친견했던 그 모습 그대로셨습니다. 차 한 잔을 주시던 그 모습. 어찌 보면 약간은 꼬장꼬
오늘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생의 네 가지 근본적인 고통 즉 사고(四苦)에 대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사고는 생로병사(生老病死)입니다. 모든 생명은 인(因)과 연(緣)에 의해 태어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수정이 되면서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달을 있다가 아주 좁은 문을 통해 세상의 빛을 봅니다. 그러나 태어나는 과정이 고통입니다. 일단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기도 하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과정의 시작이기에 고통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고통인 생고(生苦)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한 번 봅시다. 어머니 태속의 양수와 함께 있을 때는 울 수가 없지만 일단 태어나면 소리를 한번 질러야 합니다. 인간이나 축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우는 아이들도 있지만 울지 않는
여러분이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계를 받아야 합니다. 특히 교단적 입장에서 본다면 계를 받고 불명을 받아야만 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를 받으면 그날부터 그 불명을 자랑스럽게 쓰고 계를 받을 때 약속한 것을 잘 지키는 것이 불자로서 잘 사 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계를 실천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불교에서도 계를 실천하도록 권고하는 방법의 하나로 ‘열심히 계를 실천하면 좋은 대가가 있다’고 제시하게 됩니다. 그것이 업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한 사람에게는 선의 과보가 주어지고 악행을 한 사라에게는 악의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을 틀림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응보라고 표현 합니다. 죽어도 끝나지 않는 것이 인과율 문제는 원인으로서의 선행이 선의 과보를 받을 때
새해 들어 가장 신명나는 일은 뭐니 뭐니 해도 동계올림픽에 참석한 우리선수들의 금메달소식이었습니다. 메달을 따고 좋은 성적을 낸 선수들에게는 잘했다는 칭찬과 격려가 이어졌지만 선수들 중에는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도 있습니다. 그런 선수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에는 안타까움이 적지 않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끝내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을 보면서 운이 없거나 복이 부족했다며 위로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불자들은 복을 어떻게 보아야 하고 복을 쌓는 것, 복스럽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오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아흔 아홉석 갖고도 불행한 부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다섯 가지 복, 즉 오복을 최고의 복으로 여겼습니다. 그 가운데 제일 큰
마음을 비워라, 욕심을 버리라는 말을 흔히들 합니다. 마음을 비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물그릇 비우듯이 비우는 것인가. 저는 그것이 마음의 힘 빼기라고 쉽게 설명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고정된 시각, 즉 개개인이 갖고 있는 사회적 지위, 환경, 교육, 습득된 정보 등에 의해 사물을 보고 판단을 내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저에 대해 ‘현 정권에 쓴 소리를 거침없이 하는 스님’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고정관념을 갖고 저를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뇌리 속에 저는 그렇게 입력돼 있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실망하곤 합니다. 저는 이러한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선입견의 문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입견에 대한 집착. 이명박 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 또한 내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그
오늘은 『육조단경』에 설해져 있는 복과 공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복은 닦고 도는 닦지 않으면서 복을 닦음이 곧 도라고 말한다. 보시 공양하는 복이 끈이 없으나 마음 속 삼업은 원래대로 남아 있도다. 만약 복을 닦아 죄를 없애고자 하여도 뒷세상에 복은 얻으나 죄가 따르지 않으리오. 만약 마음속에서 죄의 반연 없앨 줄 안다면 저마다 자기 성품 속의 참된 참회니라. 만약 대승의 참된 참회를 깨치면 삿됨을 없애고 바름을 행하여 죄 없어지리. 도를 배우는 사람이 능히 스스로 보면 곧 깨친 사람과 더불어 같도다.…” 『육조단경』 ‘멸죄송(滅罪頌)’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살펴보면 복을 지으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복을 받기 위해 비는 것은 기복입니다. 거듭 말씀드렸지만 복은
오늘은 입춘입니다. 입춘, 동지, 설, 대보름 등은 우리 민족문화의 중요한 세시풍속 행사입니다. 이런 세시풍속을 불교가 끌어들여 의미를 새롭게 부여했습니다. 때에 맞추어 기도 정진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법회와 연결시켜 입춘 법회를 하고 있습니다. 미풍양속을 소홀히 하지 않고 여기에 맞는 법회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이런 법회의 진정한 의미와 뜻이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정법(正法)을 드러내지 못하고 삿된 쪽으로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입춘의 불교적 의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삼재팔난을 막는 입춘대길 부적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또 이것을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부적 걸어 놓아도 삼재 극복 못해 ‘입춘’하면 잘 알려진 것이 입춘부(立春
참선을 하다보면 선열(禪悅)이 생깁니다. 보통 세상에서는 희열(喜悅)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비슷한 말입니다. 세상에는 희열이 있지만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법열(法悅)이 있고, 선(禪)을 하는 사람에게는 선열이라는 즐거움의 세계가 있습니다. 세속에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해서 부부간에 만나는 그런 즐거움도 있습니다. 이런 즐거움이 지극하여 아내가 없거나 남편이 없으면 ‘팥 없는 찐빵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속에서는 이런 남녀의 만남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차원이 달라지면 또 다른 즐거움의 세계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욕계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욕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욕계를 넘어서면 색계가 있고, 또 무색계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사선팔정(四禪八定)이라고 하
오늘은 「전심법요(傳心法要)」라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짧은 책을 갖고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전심법요」는 제가 송광사 선방에서 한 철 난 후 지대방엘 갔을 때 만난 책입니다. 그곳에는 「법륜」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그 잡지 중간에 「전심법요」가 번역 돼 실려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다가 너무 좋아서 그 「법륜」이라는 책에서 이 「전심법요」 뜯어 갖고는 집게로 집어서 겉장까지 만들어 한 10년을 걸망 안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보았던 책입니다. 이 「전심법요」는 내용이 아주 간명하고 쉽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활과 같다면 이 황벽 희운 선사의 「전심법요」는 활줄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부처님 법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일러주신, 부처님 법의 요결이라고 저는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정법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