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절에 다니기 시작한 날이 언제부터였을까. 어렸을 적 불자인 어머니 손을 잡고 근처 절에 다니고, 성인이 되어서 주말에 등산하며 절에 들러 부처님께 인사하고. 되돌아보면 절이 낮설고 어려운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딱 그뿐이었기에 절은 내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느슨한 관계였다. 그러던 어느날 자연스럽게 절에 가고 있는 나를 보았다. 아마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내 평생의 반려자가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는 모습이 일상이 되면서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순간에 절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세 번째 기회는 아미타부처님을 만난 것이다.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하면서 지방을 오고 갈 때면 항상 염불과 대비주를 붙잡고 다니곤 했다. 마음 한켠에는 도반들과 함께 염불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항상 염불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와중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보게 됐다. 염불철야정진 영상과 후기들이었다. 나에게는 감로수 같은 소식이었고 그 글이 인연이 되어 무량수여래회를 알게 되었다.오랜 망설임 끝에 여름 더위가 깊은 어느 날 철야정진에 참여했다. 낯설고 어색하면서도 염불한다는 생각에 좋았고 설렜다. 다행히 불자님들은 친절하게 합장인사
누군가 “인생에 기회는 꼭 세 번 온다”는 말을 했다. 아마도 그 말은 나를 위한 말 같다. 그 세 번의 큰 기회는 내 삶에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유년시절이다. 중학생 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가는 길에 낙산사를 방문했다. 버스에서 내려 낙산사 산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막 지나갈 때 갑자기 무서움이 밀려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주저앉을 만큼 온몸이 떨려 사천왕문 앞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갈팡질팡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기억 속에 각인된 절에 대한 첫 경험이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됐다. 그날
스님은 이어 “맞다. 업이라는 것은 마치 눈과 같아 하루하루 쌓이면 치우기 힘들다. 당연히 수행도 미루면 나중에 정진할 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니 매일 수행하며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비록 고시에 실패해 변호사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다. 108배, 삼천배 등을 통해 자아성찰 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마흔 살이 됐을 때 지인으로부터 아내를 소개받아 8개월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 전 아내는 2년 간 친언니를 따라 교회를 다녔다. 그러나 결혼 이후 교회를 가지 않고 나를
내가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군생활 중 같은 소대 선임병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책을 권하면서부터다. 당시엔 작고 얇은 소책자였지만 나에겐 아주 큰 감동과 삶의 관점을 바꿔준 엄청난 책이었다. 몇 시간이면 읽고도 남을 책을 매일 조금씩, 조심스레 넘기며 각 페이지의 글자를 한 자, 한 자 음미하며 읽었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렇게 불법과 인연을 맺어 군생활을 법정 스님 책 속에 푹 빠져 지냈다. 왜 그랬을까.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돌아보며 생각컨대, 20대 초의 나는 아집과 편견, 호불호가 가득 찬 모습
부처님 가르침의 6가지 덕목 중에 산딧디꼬(sanditthko: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가르침)와 에히빳시꼬(ehipassiko: 와서 보라고 권유할 만한 가르침)이 있다.미얀마 집중수행은 그동안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체험함으로써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길이 유일한 길임을 가슴에 새기고 확신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수행 말미에는 교학의 필요성도 느껴서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 사야도께 여쭈었는데 사야도께서는 미얀마 불교대학 입학을 권유하셨다. 이에 2020년 1월 미얀마 국제테라와다불교대학(ITBMU) 입학시험에 응시
“청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일간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 송문(松門)을 반개하고 석경(石徑)에 배회하니.”불자라면 한번쯤 들어봄직한 고려시대 나옹 스님 토굴가의 도입 부분으로 스님처럼 일대사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끔씩 읊조리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시절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아 틈틈이 큰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반야심경’ ‘천수경’ 그리고 대승불교의 소의경전이라 할 수 있는 ‘금강경’을 암송하는 등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1980년 전후 사회적 격동기였던 대학 시절에는 불교학생회 일원으로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이 두 가지 ‘믿음이 은산철벽’ ‘일미진중함시방’ 문구는 꾸준하고 성실한 염불수행의 뼈대가 됐다. ‘나무아미타불이 팔만대장경이다’는 내용도 알아차리는 연결통로가 되었다.‘나무아미타불’ 염불수행의 신묘함을 알리고 싶다. 48대원을 성취하시어 서방극락정토를 주관하시는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수지·칭명하며 늘 생각하는 염불수행에 대해 일반인들은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토행자의 입장에서는 ‘나무아미타불’ 한마디가 온 우주를 덮고 있는 아미타부처님 48대원의 참 뜻과 성불의 과보를 모두 온전히 포함하고 있는 완벽한 성어(聖語)다. 아울러
어린시절 어머니는 시간이 나실 때마다 양산 통도사 등 고즈넉한 사찰을 주로 다녀오시곤 했다. 친할머니는 가족들을 위해 항상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이셨다. 자연스레 부처님은 내게 수호자이자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시고 도움을 주시는 분으로 각인됐다.중학교 2학년이던 어느날 어머니께서 양산 통도사에 다녀오셨다며 한 권의 책과 붓글씨로 된 서예 1점, 염주 등 몇 가지 불교 용품을 보여주셨다. 어머니는 밝은 표정으로 통도사 가는 길에 우연히 노보살 두 분을 만나 함께 극락암 경봉 스님을 친견했고, 스님께서 책과 직접 쓰신 서예
오직 바른 스승과의 인연과 선지식의 높은 안목만이 나에게 맞는 공부를 단계별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로 늘 의심과 회의가 앞서니 여기저기 발만 담그거나 조금 하다 말면 늘 그 자리에 머물러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각산 스님께서도 언제나 강조하셨지만 수행은 늘 ‘조견오온’하는 것이다. 항상 내 몸과 마음을 살펴 반조해 보며 경전을 읽거나 수행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되돌려 써야한다. 누구나 그러하듯 일상의 곳곳에서 우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이 절에 가면 이년이
신심 깊은 불교집안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절에 나간 것도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스스로를 불자라고 생각했다. 원래 부처라는 말과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수평적 개념이 수직적인 기독교 신앙보다 월등한 진리체계로 보였기 때문이다.결혼 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당시 나는 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았음에도 문득 마루바닥에 고요히 앉아있는 나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표현 할 수 없는 내면의 외침을 따라 불교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이러한 인연의 법칙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귀국 후 돌아와서 절에 나갔으나 일상적인 법회만 왔다갔다 하며 절
물론 여전히 나는 탐행자, 진행자, 치행자다. 골고루 다 갖추었다. 욕심도 많고 화도 잘 낸다. 종종 어리바리하게 행동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욕심낼 때, 화낼 때, 어리바리할 때도 참주인공인 나는 항상 같다는 것을 예전엔 몰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은, 조금만 고민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선원에서 공부하기 전에는 몰랐다. 화를 내기 전의 나, 화를 내는 나도 결국 같은 나다. 그 ‘나’가 목종 스님이 강의시간에 내게 가르쳐주신 ‘참나’ ‘진여자성’ 임을 믿고 이해하며 조금씩 느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심한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