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한 의상(義湘)조사는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을 겸하여 어느 한 분야에서도 소홀하거나 취약한 곳이 없었다. 그는 방대한 ‘화엄경’의 내용을 ‘7언(言) 30구(句), 총 210자의 법성게(法性偈)’로 요약 정리해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학승이었다. 그의 명성은 당시 신라뿐 아니라 중국에까지 널리 퍼져 있어서, 중국 화엄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던 현수 법장(賢首法藏)이 새로 소(疏)를 찬술한 뒤 사본과 함께 “옳고 그른 것을 상세히 검토하여 가르쳐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 옛 일들을 잊지 마시고
우리나라가 ‘2050년 탄소 중립’을 이루겠다고 선언하였다.(문재인 대통령 국회 시정연설) ‘탄소 중립’이란 기후위기를 초래하는 주범인 온실가스의 배출량과 제거량이 상쇄되어 순배출량이 ‘0’이 되는 것을 말한다. 문 대통령의 이번 선언은 우리 한국이 기후위기라는 전지구적인 문제에 책임감을 느끼고 그 해결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문제가 인류가 당면한 최대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고 환영해야 할 일이다. 물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에너지 전환정책을 수립해서
마닐라에서 목격한 일이다. 서구 사람이 길에 담배꽁초를 버렸다. 그러자 마닐라 시민 한 사람이 그것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거부했다. 오히려 화를 내고 영어로 “나는 외국인이다”라며 그 자리를 떴다. 순간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전한 서구제국주의의 망령이 떠올랐다. 동종의 인간과 하나 되지 못한 특별한 의식. 나 또한 그러한 의식이 마음에 도사리고 있지는 않을까.이 나라 안에도 수많은 차별이 존재한다. 하여 장혜영 의원을 비롯한 10인의 국회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 헌법의 평등권에
최근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사건이 눈길을 끈다. 먼저 조두순 이야기다. 조두순은 2008년 초등학생 여아를 납치·성폭행한 혐의로 징역 12년형을 받았다. 온 국민이 치를 떨며 공분한 사건이다. 그런데 형기를 마치고 연말에 출소할 예정인 조두순이 기존 거주지역인 안산시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피해자와 가족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불안이 고조되고 있다. 이에 안산시는 조두순 출소에 앞서 시내 곳곳에 방범용 CCTV를 대대적으로 확충하여 주민 불안을 해소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조두순의 출소를
1980년대 말부터 오랜 동안 TV 드라마와 영화에서 인기를 누리며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최진실씨가 2008년 가을, 마흔 살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배경에 그를 모함하는 루머와 인터넷상의 악성 댓글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었다. 최진실씨처럼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들뿐 아니라 숱한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일로 심한 우울증을 앓거나 사회생활을 두려워하고, 더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이르면 자살을 하고 있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런 일은 막아야 한다”는
자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처절한 구호가 대변하듯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그런데 그 가치를 진정 어떻게 구현해야 할 것인가는 또 참으로 어렵다. 무조건 나의 자유를 외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유를 외칠 때, 그들 각각의 자유가 충돌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고, 그 각각의 자유를 어떤 선에서 조율해야 하는가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에 그렇다. 나의 자유와 남의 자유가 충돌하는 상황은 언제 어느 때나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언제나 자유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물론 나의 자유가
현대의 의사는 생로병사를 관장하는 절대적 존재다. 죽음은 의사의 판정이 있어야 공식적으로 승인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는 종교의 관할이었다. 의업이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승의(僧醫) 혹은 의승(醫僧)이 대표적이다. 궁중이든 민간이든 불법(佛法)에 기반, 주력이나 한의적인 처방으로 치병하는 기록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불교의술을 포교의 일환으로 볼 수 있지만, 정신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눈앞의 육체적인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자비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익을 염두에 둔 의술이 아니었다.유교 철학을 기반으로 의술을 베푸는
멀미는 영어로 ‘motion sickness’라 표기되듯이 움직임과 관련된 병적 증상으로, 어지럼증이나 두통, 메스꺼움 등을 수반한다. 우리 몸에는 세반고리관이라는 전정기관(前庭器官)이 평형감각을 주관하는데, 귓속 세반고리관 안에 있는 림프액에 의해 얻어진 정보와 눈으로 보는 시각 정보가 일치하지 않을 때 멀미가 발생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경사가 심한 비포장도로를 달리거나 파도가 거센 망망대해를 항해할 때, 시각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는데 림프액은 몸이 전후좌우, 상하로 심하게 움직인다고 뇌에다 보고함으로써 뇌가 균형감각을 잃는다
대통령이 김희중 대주교 등 가톨릭 지도자들(8월20일)과 김태영 한국교회총연합공동대표 ‧ 한국교회협의회 총무 이홍정 목사 등 개신교 지도자들(8월27일)을 청와대로 초청해 간담회를 가졌다. 청와대 측의 설명에 따르면, 이번 간담회는 “엄중한 코로나19 위기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기 위해” 마련되었다고 한다.주목되는 것은, 과거 10여년 넘게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청와대 초청에 응하지 않던 가톨릭 지도자들이 가장 먼저 간담회를 가졌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취임 직후 자신이 다니던 성당의 신부와 수녀를 청와대에 초청하고, 주교회의
집회현장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걸려도 이게 애국”(20. 2. 22일자 발언)이라고 했다는 전광훈 목사 등 종교인을 자칭한 이들의 행태는 잘못된 종교인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신앙이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수사에게 주인공인 윌리엄 신부는 단호하게 “당신이 바로 가짜 예수다”라고 선언한다. ‘장미의 이름’에서는 잘못된 신앙 때문에 몇 사람이 죽는 데서 그쳤지만, 이번에 잘못된 종교의 파문은 어떠한가? 나라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괴로움에 빠뜨리고도
뿌연 매연이 눈을 따갑게 한다. 수많은 차들이 내 앞을 지나간다. 익산에서 교통량이 가장 많은 원광대사거리에서 나는 지난주부터 피켓을 들었다. 아침 8시에서 9시 무렵, 대중의 출근길목인 이곳에서 직접 호소하기 위해서다. 저번 주는 ‘1.5℃를 기억하자’, 이번 주는 ‘기후 위기⇒인류 멸종’이다. 말 대신 행동으로 나서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기후 문제의 원인은 드러났다. 화석연료사용으로 인한 온실가스 현상이다. 한 마디로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 북극의 만년설과 빙하가 녹고, 호수에서 물고기가 떠오르며, 남태평양의 작은 나라가
출가수행이나 일상의 삶에서나 도처에 디딤돌과 걸림돌이 존재한다.디딤돌은 하고자 하는 공부나 일이 성취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고마운 존재이고, 반대로 걸림돌은 성취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걸림돌이기만 하거나, 마냥 디딤돌이기만 한 경우는 없다. 한때는 고마운 존재였던 디딤돌이 어느 날 애물단지 걸림돌로 전락하기도 하고, 또는 치워버리려 애썼던 걸림돌이 몰란결에 기특한 디딤돌 역할을 하기도 한다.부처님 설법에 ‘뗏목의 비유’가 있다. 이 비유는 출처가 ‘금강경’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중아함’의 ‘아리타
정권과 그 권력을 집행하는 관리뿐 아니라 관료의 공급 기반인 양반 사대부들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도 조선불교가 500년을 버텨낸 것은 기적에 가깝다. 그 뒤 일제강점기 35년과 미군정 3년, 이승만 정권 12년과 수십 년 이어진 군부 독재정권을 거치며 겪은 한국 현대불교의 굴욕과 치욕은 ‘숭유억불’을 국정 지표(?)로 내세운 조선시대에 비해 작다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1987년 이른바 민주화 진행 이후에도 ‘전통과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수백 년 쌓여온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권력에 끌려 다니거나 자청해서 권력을 따
코로나19 사태가 종교의 역사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것이 거의 기정사실화 되는 것 같다. 종교라는 것의 본질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기본으로 하는 것인데 그것이 제한받는 사태야말로 종교의 뿌리를 뒤흔들 수밖에 없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비롯하여, 모임 자체를 금지하거나 자제를 요청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미 많은 종교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 사태가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더더욱 문제를 어렵게 한다. 단지 코로나19로 한정지을 것이 아니고, 인류가 이런 문명의 형태를 계속 유지한다면 이와 비슷한 질병
자살에 대해 불교윤리를 논하는 학자들은 다소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부처님은 ‘상윳따 니까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디까 비구가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을 성취했다고 말씀하신다. 일부는 이를 통해 특정한 상황에서는 부처님도 자살을 용인했다고 보기도 한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보통사람들의 자살로까지 보편화 할 수는 없다. 불교가 자살을 일반적으로 용인했다고 보는 관점은 인도문화를 시야에 넣은 서구에서 촉발된 것이다. 사실 자살에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생명의 절대성, 그리고 종교와 같은 사회적 전통 등의 문제가 중첩되어 있다. 존
이제 여름이다. 그리고 장마철이다. 장마의 주원인인 장마전선은 온난 습윤한 열대성 북태평양 기단과 북쪽의 한랭 습윤한 한대성 오호츠크해 기단이 만나서 생기는 정체전선이다. 이 부근으로 온난하고 습윤한 공기가 다량 유입되면 장기간 비를 뿌리게 되는데 이것이 장마다.2009년 기상청은 기후가 바뀌고 있어 정확한 예측이 힘들기 때문에 해마다 해오던 장마예보를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올해 들어서는 ‘장마전선’을 ‘정체전선’으로, ‘장맛비’는 ‘정체전선에 의한 비’로, ‘장마 시작과 종료’는 ‘장마철’로 표현해 줄 것을 권장했다. 실제
다른 전쟁이 그렇듯이 제2차 세계대전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이었고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일어났고, 연합국과 추축국 양쪽 다 하루라도 빨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였다. 일선의 전투 현장에 투입되는 군인들과 후방에서 보급을 책임지고 외교전을 펼치는 군과 민간 당국자들뿐 아니라 상대보다 더 빨리 신무기를 개발해야 하는 과학기술자들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여기에 더하여 적의 전략과 전술을 파악해내는 정보‧첩보전이 차지하는 위치가 더 커지고 있었다.유럽 전선에서 프랑스가 육상 전투에서
6‧25를 지나면서 참으로 여러 생각이 든다. 민족의 역사에 가장 참혹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리고 그 참혹한 아픔을 치유하는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할지 모르는 아픈 역사…. 그렇지만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 아픔을 치유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 우리나라가 바로 설 수 없는 역사의 상처가 바로 6‧25이다.그 치유의 바른 길은 무엇일까? 여기에 정답은 없을 것이다. 정치적 입장과 사상적 색깔에 따라 극단적이고도 천차만별한 시각이 존재하고, 자칫 그런 입장들이 부딪히면 건설적인 토론이 되기보다는 극단적 감정의 대립으로 치닫는 파국을
코로나19는 지금도 심각하지만, 미래를 예측불가능하게 한다는 불안심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문명의 한계, 그중에서도 종교는 자신의 존재감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하고 있다. 실제 자본주의가 폭주하는 동안 종교는 손을 쓰지 못했다. 지난 200~300년 동안 인간의 욕망과 함께 무질서도 크게 확산됐다. 1·2차 세계대전 같은 대규모 전쟁, 빈익빈 부익부 증대, 지구환경의 악화, 사회적 증오와 갈등 등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행복의 감정 또한 물질적 풍요에 반비례하고 있다. 필자도 참여한 원불교환경연대10주년 기념포럼에서 홍기빈 칼폴라니
최근 모 TV방송에 ‘꼰대인턴’이라는 제목의 코믹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둘이 모여 복합어가 되기에는 서로가 낯선 ‘꼰대’와 ‘인턴’의 조합에 호기심이 생겨 살펴보니 ‘갑을체인지 복수극’이다.한때 잘 나가던 시절, 부하 직원들에게 갑질을 일삼는 꼰대 끝판왕이었던 A는 다니던 직장에서 밀려난 후 시니어 인턴으로 겨우 재취업에 성공한다. 그런데 그를 부하직원으로 맞이한 새 직장의 상사인 B부장은 A가 자행한 꼰대 갑질의 희생물이 되어 갖은 수모와 설움을 당했던 바로 그 인물! 상사와 부하직원의 위치가 뒤바뀐 상황, 이제 어떤 일이 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