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오전 7시, 직장으로 향하는 민병훈(57·원명) 거사의 승용차 안. 은은한 독경소리 가득한 이곳은 움직이는 법당이다. 늘 그렇듯 천수경으로 시작된 아침 예불은 엔진의 온기가 사그라질 때까지 관세음보살 정근이 이어진다. ‘오늘 하루도 지극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부처님께 발원합니다.’ 천생 불자인 그가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세상일에 온통 몸과 마음을 빼앗겼던 20여 년 전의 일이다. 서울지하철공사에 재직하며 오로지 나와 가족만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을 때다.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不惑)의 나이 40, 불자라고 이름만 걸치고 있던 그에게 부처님과의 인연은 어느 날 불쑥 찾아왔다. 불연 맺은 후 이어지는 가피 1990년 봄 어느 날, 아내가 6개
“참회합니다. 이생에 지은 모든 죄를 부처님께 참회합니다. 저로 인해 슬퍼하고 괴로웠던 모든 분들에게 머리 숙여 깊이 참회합니다.” 1996년 9월 강화 선원사 대웅전에는 나지막한 참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벌써 열흘째, 김용철(52·청담) 거사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끝도 없이 절을 이어가고 있다. 송글송글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은 온 몸을 타고 좌복 위로 뚝뚝 떨어졌다. 물먹은 솜뭉치마냥 무거워진 몸,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겨워 보였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고통을 잊기 위해서인 듯 입에서는 연신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지극한 염송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17세, 고관절 수술 후 장애 생겨 몸이 성한 사람에게도 3000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지체장애 3급의 불편한 몸으로 3
2002년 9월, 조계종 포교사단의 탈북자 지원모임 결성 소식에 허정희(66·만덕행) 포교사는 누구보다 기뻐했다. 자신도 이제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불사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다는 반가움이 밀려왔다. 그는 1995년 포교사가 된 직후부터 소녀원 봉사팀, 염불 봉사팀 등에서 활동해 왔다. 그러나 맞지 않은 옷을 걸치고 있는 듯 마음은 언제나 불편하기만 했다.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범죄를 저지른 소년원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도 그렇고, 망자와 비통에 잠긴 가족들을 대면하는 것도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상(相)을 내는 모습이기에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제자로서 참회하며 마음을 다잡아 보기도 했으나 그때 일뿐, 불편한 속내는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포교사 역할에 회의감마저 생겨
‘설렘 반, 두려움 반’, 2002년 2월 동산불교대학 20기 입학식장에 선 류창수(67·보천) 거사의 마음이 그랬다. 그러나 그 마음은 새로운 배움에 대한 기대에서 오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투병중인 아내의 간절한 소망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시작한 공부지만, 행여 이 공덕으로 아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서 온 속내였다. 새 천 년을 맞이한 지 채 며칠이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난 30여 년간 부부 약사로서 함께 약국을 운영하며 별다른 걱정 없이 살아온 그에게 아내의 갑작스런 암 발병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 그리고 믿음직한 동료 약사로서 충실했던 그녀였다. 게다가 신심 돈독한 불자로 작은 시간적 여유만 생겨도
차라리 정신을 놓고 싶었다. 650개의 근육과 206개의 뼈마디, 100여개의 관절에 전해지는 극심한 고통만은 한 동안 잊을 수 있을 테니까. 더욱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구토 증세. 망망대해 한가운데 풍랑을 만난 조각배에 탄 것처럼 구토의 고통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 고통에 시달리다 모든 것을 토하고 나면 어느새 정신은 아득히 멀어지고, 간신히 정신을 차리면 악몽은 다시 반복됐다. 편도암 발병에 초발심 떠올라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 교수가 되기를 고대했던 국립서울병원 치과과장 양동선(46·수암) 거사. 불현듯 찾아온 병마는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대학 교수의 꿈을 한순간 앗아가 버렸다. 새로운 천년의 시작과 함께 대학 강단에 설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어느 날, ‘편도암
자비로운 미소를 짓는 티베트 승왕 달라이라마. 지혜의 바다에 담긴 감로수를 모든 이가 같은 맛으로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각자의 그릇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의 바다는 산에서, 들에서, 강에서 흘러내리는 일체의 물줄기를 품을 만큼 넉넉하며 탁한 기운들이 밀려와도 결코 그 맛이나 색이 변하지 않기에 진리를 의미한다. 달라이라마는 ‘지혜의 큰 바다’ 또는 ‘큰 지혜를 가진 스승’이라는 티베트 말이다. 세계 각국의 불자들로부터 ‘자비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달라이라마의 법석, 생각만 해도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벅찬 감동과 그로 인한 전율 그리고, 희유함은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이 빼어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달라이라마의 법석에 동참하는 사이 불자들은 ‘자비가 항상한
1987년 1월 28일 윤애경(48·보련화) 보살은 서울로 향하는 전동차에 쫓기 듯 몸을 실었다. 둘째 아이를 낳은 지 이제 일주일, 아직 몸도 추스르지 못한 상태지만 남편의 연락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3일 전, 남편 동료로부터 ‘남편이 작은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지만 곧 퇴원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당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돼 경찰공무원인 그가 행여 다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던 때였다. 교통사고로 식물인간 된 남편 묻고 물어 어렵사리 찾아간 경찰병원, 남편이 중환자실에 있다는 것이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가까스로 정신을 추슬러 문을 열고 중환자실로 들어서자 자는 듯이 누워 있는 남편이 한 눈에
임장수 전국불자교정인연합회장은 “마음 속 불덩이를 완전히 제압하는 것은 오로지 지극히 낮은 마음뿐”이라고 강조했다. 1980년 5월 24일 새벽, 임장수(56·각우) 거사는 갑작스런 상부의 지시에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1979년 10월 26일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의 주범 김재규의 사형집행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교도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지 겨우 1년밖에 안된 그에게 사형집행 참관 명령은 충격 그 자체였다. 형 집행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긴장한 것은 김재규 씨보다는 오히려 그였다. 김 씨는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한 듯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따르며 무언가를 계속 읊조렸다. 김 씨는 마지막 종교의식마저 거절했고, 형은 곧바로 집행됐다. 그 순간
“남이 없는데 내가 있을 수 있겠어요. 부처님의 자비도 이웃이 있기에 아름답고 수승한 가르침 아니겠어요.” 1996년 3월 27일, 경주 정토법당을 찾은 조정숙(51·진여성) 보살은 한참을 엎드려 일어나지 못했다. 법륜 스님의 법문을 직접 들어보겠다는 마음 하나로 찾아간 그곳에서 1시간이나 눈물을 쏟았다. 알 수가 없었다. 연기법을 한두 번 들어본 것도 아닌데 스님의 법문이 이어질수록 눈물은 점점 굵어졌다. 법륜스님 만나 이상 무너져 눈물과 함께 지난날의 기억들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부끄럽지 않은 부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만큼 매사 열심이었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보다는 이웃의 행복을 부처님께 기원했고, 어려운 곳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었다. 그런데 정토법당에
가난으로 시작한 공직생활남다른 열정으로 승승장구 한순간 실수로 거리 내몰려 절체절명서 떠오른 부처님마라톤 수행삼아 참회정진불국토 건설에 도움 되고파 “경주 남산은 절터 112곳, 석불 80기, 석탑 61기, 석등 22기 등 총 672점의 문화재가 산재한 그야말로 불교성지입니다. 남산 산길을 일주하는 것은 곧 성지순례를 뜻하며 자연스럽게 불교를 접하는 기회가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경주남산마라톤대회는 운동경기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동작세무서 한명로(58) 서장의 경주남산마라톤대회 예찬론이 끝없이 이어진다. 672점이나 되는 남산 문화재를 일일이 열거하며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흥까지 한껏 묻어난다. 한 거사의 말처럼 경주남산마라톤대회는 분명 불교와 남산에 대한 그의 사랑 표현임이 분명했다. 그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충북 충주시 양성면 영죽리에 위치한 선재학교는 ‘보물’이라는 노래가 절로 맴돌게 한다. 초가와 너와로 지붕을 얹은 흙집인 선재학교는 토담까지 있어 영락없이 옛 시골의 풍경을 담은 한 폭의 수채화다. 얼기설기 대나무로 엮어 만든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초가지붕 위로 삐죽이 솟은 굴뚝에선 연신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그 아래 툇마루에는 유지선 법사가 방금 따온 표고버섯을 손질하느라 여념이 없다. ‘유·지·선’이란 이름 석 자는 어린이법회나 청소년법회에 작은 관심이라도 가져본 불자들에겐 아주 친근한 이름이다. 청소년포교 연구모임인 ‘선재연구모임’을 비롯해 불교 캐릭터 전문 팬시용품 ‘선재마을’, 청소년포교 지도지침서 「월간 선재」, 어린이
계절은 이미 봄의 문턱을 넘어섰건만 이른 새벽 조계사 대웅전 공기는 여전히 냉랭하다. 한기가 느껴지는 대웅전, 그러나 대한불교산악인연합회 양춘동(69·지인) 총재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16년간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조계사 대웅전에서 이어온 108참회. 이것은 지난날 분노와 오만이라는 무명에 갇혀 방황하던 그를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어준데 대한 감사의 의식이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일배 일배 일심을 다해 절을 올리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석가모니불 염송이 법당 안에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16년간 이어온 예불-108배 1991년 가을, 백담사를 출발한 양춘동 거사는 봉정암을 향해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지치고 병든 마음을 달래려는 심정으로 무작정 나선 길이었으
“내 마음이 기쁠 때나 증오로 가득찰 때에도 부처님은 항상 미소로 나를 바라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의 장난일 뿐 시련도 하나의 과정입니다. 하심하고 인내하면 때는 찾아옵니다.” 2005년 3월 14일 동방대학원대학교 정상옥 총장이 취임사 낭독을 위해 단상에 올랐다. 200여명의 하객들은 정 총장을 박수로 환영하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동방대학원대학교의 설립을 발의하고 터를 닦기 시작한지 꼭 10년이 지났습니다. 오늘은 우리 동방대학원대학교가 파란만장하고 천신만고의 온갖 고난을 딛고 개교한 날이기도 합니다. 동방대학원대학교는 미술, 음악 등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 콘텐츠를 학문적으로 정립하는 상아탑이 될 것입니다.” 단상에서 조용히 내려오는 내내 정상옥(62·우현) 총장의 입에서는 ‘관세음보살’
2월 27일, 신학기를 꼭 3일 앞둔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 교학실은 2007학년도 수업준비로 분주하기만 하다. 시청각 기자재며 경전 등이 수북이 쌓여있는 교학실의 풍경은 부산하기 그지없어 봄날의 노란 개나리꽃을 보듯 생기 넘친다. 올해 새로 입학할 신입생은 모두 530여명, 불교 종립학교임에도 신입생 중에는 불자들보다 오히려 무종교인, 이웃 종교인들이 많기 때문에 학생들이 교학 수업에 거부감을 갖지 않고, 불교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위한 교학실의 아이디어 회의는 열기가 넘친다. 자유분방한 요즈음의 청소년으로 돌아가려는 교법사들의 피나는 노력 가운데에는 올해로 12년째 동대부여고에서 청소년 포교를 위해 진력해 온 이학주(44·계진) 교법사가 있다. 이 법사의 희망은 더 많은 학생들이 자연스레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오신날~.” 동장군의 기세가 온데간데없는 철없는 2월의 중순,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5월 부처님오신날에나 들을 법한 노랫가락이 인사동 빌딩 숲 사이를 타고 잔잔히 울려 퍼졌다. 흥겨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찾아간 곳은 서울 관훈동 대형빌딩 2층에 위치한 ‘좋은벗 풍경소리’. 문을 열고 들어서자 3평 남짓한 이곳은 벌써 올 연등축제의 복판에 서 있는 듯 착각을 들게 한다. 허름한 사무실의 주인인 작곡가 이종만(49·향천) 거사는 흥겨운 봉축 노랫가락에 고개를 끄덕이고 음을 따라 발장단을 맞추느라 낯선 발길조차 눈치 채지못한다. ‘이·종·만’이란 이름 석 자는 어린이법회나 봉축 문화마당에 대해 작은 관심이라도 기울인 불자들에겐 낯이 익다. ‘돼지임금’, ‘공명조이야기’, ‘스
10년 전 친구의 배신재산·가족 모두 잃고위안 찾아 3년간 고행 ‘내가 곧 부처’ 깨닫고한 조각 욕망도 털어내도반들과 새 삶 개척 용하심 보살은 매일 아침 참회아 이웃에 대한 축원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어둠이 사그라지는 이른 새벽, 경기도 광주 한꽃 빌리지 5층에 마련된 임시법당에서 아침 예불과 독경을 마친 이용하심(53) 보살은 평소처럼 부처님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으로 지은 모든 죄를 참회합니다. 오늘 하루도 나와 인연을 맺은 이 모두가 부처님입니다. 일체 만물이 행복하기를 발원합니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10년째 이어오고 있는 아침의 일상이다. 이 시간만 되면 입가엔 미소 꽃이 핀다. 참선하면서 웃는다니, 안거 도
나병 여인 보살피다 젊은 수좌들에 봉변 당하기도하심하며 묵묵히 수행-제도하는 자비행의 밑거름 “노승이 객실 한 칸 부탁드립니다.” “글쎄요, 빈 객실이 없는데. 딴 데로 가시지요.” 아무리 먹고살기 힘든 식민국가의 백성들이라지만 노승을 대하는 절집안의 인심이 이리 박할 수는 없다. 더욱이 이곳은 조선팔도 최고의 명산 금강산에서도 대찰로 손꼽히는 장안사가 아니던다. 하지만 노승은 인상한번 찌푸리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대로 물러서더니 “어디 바위굴 틈에서라도 하룻밤 지내자”며 잠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이 꼴을 보다 못해 육당 최남선이 장안사 종무소로 뛰어들었다. “바로 저 노스님이 조선불교 교정이신데, 세상에 객실 한 칸 없다고 문전박대를 할 수 있소?” 장안사가 발칵 뒤집어지고 사중 스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