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대부분 학문을 함에 있어서 힘을 쓰는 공부를 하는데 꼭 밖으로 향해 치달리면서 구할 필요가 없다. 마땅히 자성을 위주로 해서 여기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자성을 단번에 볼 수 없다면 습기의 두터움과 얇음을 점검해서 절차탁마하면서 근본처에 힘을 써야한다.그 자성은 본래가 밝아서더 이상 늘어남이 없으나탐진치와 애욕이 종자 돼거기에 빠져 곤경 당할뿐비유하면 마치 거울을 갈 때 먼지와 티끌이 떨어져 나가면 광명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우리가 하루하루 공부하는 데 있어서 가장 간명하고 가장 절실한 것이 이것보
그러므로 좌참한다고 칭할만하다. 우리 법형이신 고매 법사에게 직접 찾아갔는데 법사께서 깊이 법기로 존중하여 일찍이 견백이라는 자를 지어 주었다. 내가 이에 설명을 한다. 불성이 번뇌 속에 있을 때에는 마치 마니주가 변기 속에 떨어져 있는 것과 같고 연꽃이 진흙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면서도 번뇌의 더러움에 마니주의 광명이 어두워지지 않고 오욕의 진흙에 연꽃이 오염되지 않는다.품은 뜻 가다듬지 않으면결코 단단해지지 못하고마음 제대로 씻지 않으면절대로 밝아지지 않을 것대개 그 자성이 천연적으로 그러한 것이니 본래 청정한 광명은 밝고
진실로 공생이 세존의 행리처를 간파한 것처럼 자신의 집 속을 간파해낼 수 있다면 이것은 집에서 일상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일에 불과할 뿐이다. 다시 어떤 법을 일러 희유한 법이라고 하겠으며 어떤 일을 희유한 일이라고 하겠는가. 만약에 이것을 보지 못하고 단지 문자의 형상으로만 다투어가면서 찬탄한다면 훗날 고개 돌려 한 번 바라볼 때 희유하지 못한 것을 보게 될까봐 걱정스럽다. 하생이 법어를 청했으나 이 노인은 설할만한 법이 없다. 그러므로 그 말에 따라서 이렇게 말해주노라.향림이라는 자 이야기대도(大都)에서 온 자선장로
몸이 이루어지자 망상이 영욕과 근심과 기쁨과 호오와 희노애락과 질병과 재앙으로 흘러다니고 생사가 교대로 뒤바뀌는 데에까지 흐르면서 갖가지로 변화를 일으켜 본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이것은 자체는 본래 진여인데 지금은 여여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초목과 미세한 먼지까지모습가진 모든 것이 진여생사윤회를 벗어나는데뜻을 두면 응당 여여해야이 때문에 선사께서 본래 지니고 있는 것에 의지해 인도해주면서 “그대는 마땅히 진여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자를 응여(應如)라고 지어준 것이다. 이 뜻을 말해보자면 본래는 자체가 진여인데 지금 현재는 진
그런데 유독 공만이 후세에 광명이 사라지지 않도록 염려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그가 마음을 보존하면서 근본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와 함께 좌담을 할 때에 가슴 속에 온축되어있는 것을 두드려보니 오로지 이치를 관하는 데 집중하고 있고 율행을 삼가하고 있다.허물 쌓는 게 심해지면업은 더욱 더 무거워져괴로운 길만 길어지니마음 비우지 못한 잘못그렇다면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바가 세간에서 그럭저럭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과 비길 것이 아니다. 내가 크게 가상하게 여겨서 우선 유광(愈光)이라는 자를 주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 튀는 것이
한 분은 이근으로 원통하고 한분은 마음으로 통문(洞聞)하신다. 늙은이 감산의 분상(分上)에서는 저 허공이 눈썹과 결합되어 끊임없이 설법하는 것을 삼라만상이 모두 듣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세분 보살 대사님들이 한바탕 허깨비 춤을 춘 것이고 자백 대사가 이렇게 말한 것도 갖다 붙일 곳이 없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꿰뚫어낼 수 있어야 비로소 ‘통문’이라고 불러줄 수 있다.생사열반 모두 어젯밤 꿈명자 붙인 건 꿈속 잠꼬대모든 존재 꿈임을 관하면부처님 법 항상 나타날 것당주에게 천향에서 무은으로 자를 바꾸어서 준 이야기당주인 명계
그리하여 덕이 합치되어 공을 이룬다. 그러므로 가상하게 여길 만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위태로울 뿐이다. 이른바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다”고 하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천군(天君: 사람의 마음)이 지키는 시스템을 잃게 되고 오관이 직분을 잃어버린다. 가상함을 구하려 해도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이를 통해서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마치 눈이 마음으로부터 명령을 듣는 것과 같다.마음은 복전·깨달음은 종자일상생활서 깨닫지 못하면밭이 있어도 농사 안 짓는 것깨달음은 곧 복을 심는 근본이것이 충성이 지극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
그런데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성품과 덕성이 천연적으로 광대하긴 하지만 진실로 축적하고 기르는 것이 깊고 두텁지 않으면 대임을 짊어지는 데 있어서 힘을 쓸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옛날의 호걸스러운 선비가 특달의 재주를 부여받으면 모두 각고의 노력으로 뜻을 가다듬어서 예리한 그릇을 담금질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성인은 만물 소유 삼지 않아대상과 나 잊으면 만물이 나그러면 만물이 나 받아들여이것이 곧 성인이 능히 할 일이로써 천하와 국가에 크게 쓰이는 것에 대비했다가 천년 동안 썩어 없어지지 않는 대업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광채가
즉 도에 뜻을 둔 사람 중에 현명하다고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실행이 지나치기도 하고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은 지식이 지나친 경우가 있다. 성인께서 이 때문에 절충하여 크게 지나친 것은 억누르고 미치지 못하는 것은 이끌어주신다. 그리하여 크고 지극한 중정(中正)의 본체에 돌아가서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을 완전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거울 밝음은 본래 갖춰진 것씻어서 밝음 더해지지 않아마음속의 의미를 잘 활용해열어주는 것이 바로 도일 뿐천연적으로 갖추고 있는 진실함을 잃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닦는다고 말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것을 버리
아! 공자님의 이 말씀은 진실로 길고긴 밤에 잠꼬대하는 꿈속에 울리는 목탁이다. 이것을 승조법사께서 인용하여 뜻을 펼쳐놓은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 양생(梁生)에게 자(字)로 준다. 이 말을 저버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성인의 문하에서 골수를 이어받은 제자라고 칭할 것이다. 하물며 법문(法門)의 경우이겠는가.진정 바꿀 수 없는 도 알면험난함과 평이함이 일치돼세상에 나아가고 물러나서거처함이 같은 때가 될 것황원형에게 용중으로 자를 준 이야기황원형(黃元衡)에게 내가 자를 지어주었는데 용중(用中)이라고 하였다. 이에 그것을 설명한다. 대저
그렇게 되면 사람도 옛날의 성인보다 모자라지 않고 일도 옛날의 성인이 했던 것에 떨어지지 않아서 천하국가가 태상에 올라가 혼연히 화서(華胥)의 즐거움을 똑같이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화서는 열자 황제편에 나온다. 황제가 꿈에 화서에 가서 무위자연의 이치로 다스려지는 이상향의 세계를 보았다. 역자주]나는 감로가 모두 달고 샘물이 모두 달게 되어서 편의에 따라 마시고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하여 태평가를 부르면서 배를 두드리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무어 상서로운 감응이라고 하겠는가.문인에게 불천이라는
그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혼돈이 최초에 분화되어 사람이 처음 생겨났는데 몸에는 광명이 있고 날아다니는 것이 자재했으며 바람을 들이쉬고 이슬을 마셨다. 오곡을 생산하지 않았고 샘물이 솟아올랐으며 이슬이 내려주었다. 그것이 응결되어 돼지 비개처럼 부드러웠으니 이름을 지비(地肥)라고 하였다. 맛이 제호와 같았는데 사람이 먹으면 달았다. 이것을 좋아하게 되어 싫증내지 않고 먹어대는 바람에 그 몸이 점차 무겁게 되어 자기 스스로 들어 올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때문에 땅이 비옥하긴 하지만 얇아지면서 오곡을 생산하게 되었다. 오
그러므로 “만약 전세에 심은 종자를 알고자 한다면 금생에 받는 것이 그것이다. 만약 미래생의 열매를 알고자 한다면 금생에 짓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지능과 재주와 기술을 믿으면서 공명과 부귀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공명과 부귀는 재주와 지능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농부가 좋은밭 골라 갈고때에 맞춰 씨를 뿌린 후에가을에 하나의 씨앗에서백배 수확하는 것과 같아내가 전생에 선정을 닦은 것이 금생의 재주와 지혜를 만나서 그렇게 되는 것이니 얻었다고 해서 기뻐하는 사람은
(법문은) 번뇌를 녹여내는 도구이다. 이른바 공법(空法)이라고 했을 때 공법은 부처님의 마음이니 이것으로 밝혀야 할 일은 부처님의 실천행이다.세상사람 중 어리석은 이는생사가 주야로 돌고 삼세의윤회가 어제가 있고 오늘이있는 것과 같음을 알지 못해부처님을 배우는 이는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 부처님의 마음을 체득하여 일상생활에 벌어지는 일에서 부처님의 실천행을 하는 효과를 내야한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있는 부처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에 있는 부처님의 실천행을 배우고 자신의 마음에 있는 번뇌를 끊고 자신의 마음에 있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사홍서원 이야기사홍서원은 ‘중생이 가이 없지만 모두 제도하고자 서원을 세웁니다(衆生無邊誓願度)’ ‘번뇌가 끝이 없지만 모두 끊고자 서원을 세웁니다(煩惱無盡誓願斷)’ ‘법문이 한량없지만 모두 배우고자 서원을 세웁니다(法門無量誓願學)’ ‘불도가 위없지만 모두 이루고자 서원을 세웁니다(佛道無上誓願成)’라고 원을 세우는 것이다. 이 네 가지는 우리 불제자들이 보살행을 닦는 자로서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보살은 별다른 사람이 아니라 마음을 크게 낸 범부(大心凡夫)이니 번뇌의 티끌 속에서 자신을 업그레이드시켜 부처가 되고자 확고한 뜻을 세운
“만약 한 부처님만 혼자 갖추고 있는 것이라면 또 어떻게 ‘일체중생의 몸에서 정각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화엄경’에서 말하기를 ‘기이하도다, 기이하도다. 일체중생이 모두 여래의 지혜덕상을 갖추고 있구나’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래의 덕상은 법신 전체입니다. 중생들이 통째로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니, 어찌 부분만 갖추고 있겠습니까.비늘·날개·털 달린 모두가색신삼매 나타냄을 알아마음 밖 다른 존재 없어도청산이 눈 가득히 들어와삼조 승찬 스님이 ‘신심명’에서 ‘완전하기가 태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고 하였습니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햇볕이 내리쬐는데 전등불을 켜는 것과 크게 같고 뱀을 그리면서 다리를 그리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장자께서는 잘 새겨들으십시오.”중생불성이 각각 나누어서갖추는 것이라면 일체중생모두가 각각 부처님 이룰 것이렇게 여러 부처님 있게 돼무정불성 이야기내가 광산에서 병 치료를 하면서 문을 닫아걸고 여러 인연을 거절하고 있었는데 공일자(空一子)가 문을 두드리면서 질문하였다.“저는 인간세계에서 걸식을 하고 있습니다. 들으니, 군자들이 불성의 의미를 담론하면서 어떤 사람은 무정설법을 믿지 않고, 어떤 사람은 중생
아, 어떤 사람이 진실로 양의의 마음을 활용해서 나라를 다스린다면 어느 나라인들 다스려지지 않겠으며,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마음을 지니고 만물을 다스린다면 어떤 것인들 수용하지 못하리오. 만물을 수용하면 다 함께 포용할 수 있고 나라를 다스리면 겸선(兼善)을 행하는 것이니, 이것이 성인이 공을 이루는 것이다.자백이 ‘차광’ 이름한 누각이 누각은 광명과 하나라만상 받아들여 일체 융섭광명 밖서 누각 찾지 말라대장부가 일을 행함이 이와 같다면 구사하는 테크닉은 다르더라도 이루는 공은 같은 것이며 이름은 달라도 실제의 알맹이는 똑같은 것
“이러한 때를 당해서 마음의 지혜가 곤궁해져 빠져 나가려해도 방법이 없고 탈출하려해도 수가 없게 됩니다. 구제해주길 바라도 사람이 없으니 소리를 질러본들 그 누가 친하게 다가오겠습니까. 이게 어찌 허둥지둥 할 일이겠습니까. 형색을 드러내어 끙끙 신음소리를 내면 깨어있는 사람이 어떻게 정상상태로 여길 수 있습니까. 호되게 소리를 지르면 벌떡 일어나게 됩니다. 한 번 깨달아 크게 깨어나 꿈속의 일을 돌아보면 어렴풋하게 벌어졌던 일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꿈속의 일을 찾아보아도 얻을 수 없고 말하려 해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것을 깨어있는
늪과 산 이야기들으니, 장생이 말하기를 “골짜기에 배를 감추고 산 전체를 늪 속에 감추고 나서 단단하게 감추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힘이 센 자가 등에 짊어지고 달아나버리는데도 깜깜한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한다”라고 하였다.[감산 스님은 천진의 상태를 유형의 존재에 감추는 것은 배를 골짜기에 감추는 것과 같고 유형의 존재를 천지에 감추는 것은 산을 늪 속에 감추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역자주]이 말은 감추는 것이 있으면 짊어지고 달아나버리는 자가 있지만 감추는 것이 없으면 짊어지고 달아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감춤이 없는 것을 지극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