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하다. 짓이겨진 흔적들이 곳곳에서 나뒹굴고 있다. 벽에서 파여진 손과 눈, 그리고 처참하게 뜯긴 몸체가 차가운 바닥을 헤맨다. 도려내진 것들이 남긴 윤곽선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날아올 것 같다. 텅 빈 모퉁이 어둠속에서 웅크려있던 유령이 핏물 배인 눈으로 순례자를 노려본다. 그것은 욕망과 광기에 앗겼던 부처님을 되찾으려 100년을 배회해온 과거의 영혼이었다. 탐욕의 잔재를 어루만지며 가련한 영혼들에 말을 건넨다. 부처님이 이곳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주시길, 함께 기원한다. 인간의 무지를 참회하는 기도가 베제크릭(백자극리극, 伯孜克
열차는 낙조를 이고 사막을 질주한다. 붉은 숨을 토해내고 있는 태양이 서서히 사막의 지평선 아래로 떨어진다. 누런 모래는 제 빛을 잃어가며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간다. 곧 별들이 떠오르면 황막했던 사막의 풍경은 영롱한 빛이 되어 반짝일 것이다. 투르판(토로번, 吐魯番)을 향해 달리는 고속열차 안.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에서의 순간들이 태양과 함께 사막 저편으로 사라진다. 이제는 새로운 현재와 만나야 한다. 순례는 늘 현재와의 조우였기에 물과 바람이 길러낸 생명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숱한 유적지에서 엿본 찬연했던 역사
왕원록 도사가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의 고문서들을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다만 몇 가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당시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일화는 이렇다. 1900년 어느 날, 16굴을 청소하던 왕 도사는 입구 오른편의 작은 균열을 목격했다. 이후 인부들이 모래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굉음과 함께 균열이 벌어졌고, 벽면을 무너뜨리니 곁간굴인 17굴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왕 도사가 필사(筆寫)를 위해 고용한 사람이 담뱃재를 균열에 털었는데 한없이 밀려들어갔다. 이를 심상
난주(兰州)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가욕관(嘉峪關)에 도착하니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번거롭지도, 그렇다고 아쉽지도 않은 딱 적당한 정도의 비다. 그동안 높은 습도 탓에 다소간의 불편함을 느껴왔던지라 지금 내리는 비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더군다나 가이드는 이곳의 연평균 강수량이 60mm에 불과하다면서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늘이 흩뿌리는 감촉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동안 가피의 의미를 헤아려본다. 비가 흔한 곳에서 왔으나 이제는 그것이 귀한 곳을 순례하며, 삶의 노곤함을 이유로 감춰버린 소중한 것들
천수(天水) 맥적산(麥積山) 석굴에서 2시간여를 달리자 도로 주변으로 민둥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고 곳곳에 계단식 논이 조성돼 있긴 하지만 헐벗은 풍경을 감추기엔 역부족이다.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 갓길에서 도색작업을 하고 있는 인부들도 눈에 띄는데 보는 사람이 아찔해질 정도다. 황무지와도 같은 대지에 주입되고 있는 생명들을 보며 본격적인 실크로드 순례가 시작됐음을 느낀다. 이제부터는 비옥한 토지와 울창한 숲의 풍요로움 대신 누런 모래, 따가운 햇살, 잡히지 않는 지평선만이 순례단의 길벗이 되어줄 것이다.감숙성
법문사(法門寺)를 빠져나와 천수(天水)로 출발한다. 천수는 감숙성(甘肅省)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장안(長安, 서안)에서 시작되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천축으로 향했던 스님들 역시 천수를 거쳤는데, 현장(玄) 스님도 마찬가지였다. 버스는 목가적 풍경 위로 뉘엿뉘엿 내려앉고 있는 석양의 붉은 빛을 가르며 나아간다. 지금 바라보이는 풍요로운 산과 들, 논밭과 강물 어딘가에 옛적 등짐 짊어진 스님들의 발자취가 남아있진 않을는지. 이내 죽음과도 같은 사막과 드높은 설산을 마주해야 할 운명이었던 스님들이 부디 이곳에서 처음의 갸
1987년 4월3일 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110km 떨어진 법문사(法門寺). 8각 13층 진신보탑(眞身寶塔)을 보수하던 이들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바닥을 파내고 내려가자 온갖 진귀한 금은 동전들과 함께 조그마한 석문(石門)이 발견된 것이다. 그것은 법문사가 1000년 동안 숨겨왔던 지하궁전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이었다. 석문 안에서 당나라 황실 유물 3000여 점이 쏟아져 나왔다. 실크로드를 지배하며 국력을 뻗어나갔던 당나라의 유물들은 그 방대한 양과 화려함으로 중국뿐 아니라 세상을 경악케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밤하늘 수놓은 별빛을 벗 삼아 광막한 모래사막을 가르는 카라반(대상, 隊商)의 행렬. 낯선 침묵과도 같은 사막의 고요 속에서 시시각각 조여 오는 모래바람과 약탈꾼들의 위협. 금은보화 그득한 짐을 등에 진 낙타와 터번 두른 상인들의 고단한 걸음 앞에 샘솟은 오아시스. 신비로움과 낭만이 덧대어진 실크로드의 이미지는 잘 보존된 박물관 유물처럼 세상에 전시되고 있다. 그러한 이미지가 유통되면서 실크로드는 한낱 박제된 껍질로서 사람들에게 소비된 지 오래다.한 무제 시대 서역 정벌로본격적인 문명 교류 시작장안에서 로마까지 이어져오아시스 도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