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굴은 막고굴의 석굴들 중에서 손에 꼽히는 규모를 자랑한다. 그런데 주실로 들어가는 통도의 우측 벽에는 이례적으로 별도의 석굴로 들어가는 입구가 자리한다. 이 입구는 근 천년 세월 동안 외부로부터 봉쇄되어 왔으며, 1900년에 이르러 왕도사라는 인물에 의해 다시 세상을 향해 문을 열게 되었다. 이 곁방살이 석굴이 막고굴에서 가장 유명한 장경동, 즉 17굴로 두 평 남짓한 자그마한 공간 안에서 5만여 건이라는 엄청난 양의 문서더미가 발견되었다. 이 문서들은 당시 사회, 정치, 종교, 문화에 대한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이른바
막고굴 72굴 주존상을 모신 감실의 좌측 외벽에는 ‘성자사주화상(聖子泗洲和尙)’이라는 방제 하에 한 스님의 존상이 모셔져 있다. 머리에 바람막이 모자를 두른 채 산을 뒤로하고 물을 마주한 어느 초려에 정좌한 스님의 모습은 성스럽기보다는 친밀하고 소박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 스님의 도상과 대칭하여 감실의 우측 외벽에 또 다른 스님이 그려져 있는데, 방제는 이것이 ‘성자 류살하 화상’의 존상임을 전한다. 지난 5회의 기사에서 언급했듯이 막고굴 72굴은 주실의 남벽을 양주서상 및 류살하와 관련한 장면들로 채울 정도로 양주서상과 류살하를
하나의 문화권에서 새로운 종교가 자리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종교가 전파되는 과정은 종종 선각자들의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고, 때로는 극적인 상황의 전개 속에서 그 결실을 맺기도 한다. 막고굴 323굴은 주실의 남벽과 북벽 양쪽에는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여러 신이한 사건들이 그려져 있다. 그중 세 분의 고승에 대해 상당부분의 화면을 할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7세기 후반에 건설된 이 석굴의 벽화에서 주목하고 있는 고승들은 누구이며 어떠한 사건들인가?7세기 후반 석굴에 새긴 고승통치자와 승단 관계 특히 강
돈황 막고굴 154굴 주실 남벽에 그려진 한 무인의 도상은 그 화려한 복장과 위용으로 눈길을 끈다. 우측의 천녀상과 나란히 서 있는 이 존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온몸에 견고한 갑옷을 착용하고 있다. 오른손으로는 긴 창을 들고 왼손에는 보탑을 받들고 있으며, 왼쪽 허리에는 긴 칼을 차고, 다시 허리 앞에는 휘어진 만도(彎刀)를 차고 있다. 두 다리 사이로는 반쯤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 그 발을 받치고 있다. 무인의 부릅뜬 두 눈에서는 위엄과 공포가 절로 느껴진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방제를 통해 이 존상이 비사문천왕임을 확인할 수 있다
1975년, 돈황문물연구소는 막고굴 220굴의 주실로 들어가는 통도(通道)에 그려진 서하시대(1032~1127) 벽화 보존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다. 벽화를 벗겨내자 그 안에 가려져 있던 이전 시기(925)의 벽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롭게 드러난 벽화의 주요 장면을 보면, 한 보살이 사자 위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 우측에는 북방민족의 복식을 하고 턱수염을 기른 남자가 사자의 고삐를 쥐고 있고, 좌측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동자가 자리하고 있다. 이 벽화는 어떤 보살을 표현한 것일까? 벽화에 남겨진 명문을 통하여 이 상이 ‘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말 사이에 건설된 돈황석굴 중에는 주실로 통하는 통도 천장부를 각종 불교감통설화의 벽화로 장식한 경우가 많다. 이들 석굴에 그려진 불상과 신이한 사건들의 장면들을 검토해보면, 비록 세부적인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소재들의 구성에 있어 비교적 정형화된 패턴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본 연재에서 다룬 바 있던 내용들 중 코삼비국의 우전(優塡)왕상, 아육왕 탑상, 양주서상 등의 소재들이 석굴의 감통설화 벽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서역남로 대승불교국가 ‘우전’돈황 불교감통설화 중 다수는우전국서
698년에 건설된 돈황 막고굴 제332굴 주실의 동벽에는 중앙의 입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설법인을 한 불상을 중심으로 한 벽화가 장식되어 있다. 좌측 화면의 중앙에는 한 부처님이 방형의 금강좌 위에 앉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설법인을 하고 있고, 좌우에 보살과 제자들이 협시하고 있다. 그 뒤로 겹겹이 펼쳐진 산자락은 이 장면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취산 설법을 묘사한 것임을 알려준다. 동벽 우측 화면의 주불 역시 설법인을 취하고 있지만, 그 외의 다른 구성 장면들은 좌측의 석가모니 영취산 설법도와 확연히 구별된다. 먼저 주불은
돈황석굴에 묘사된 각종 서상(瑞像)들의 면면을 보면, 앞서 살펴본 양주서상이나 보리서상의 예와 같이 불상의 형식에 있어서 여타의 불상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을 갖춘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 가장 파격적인 형식을 갖춘 불상은 단연 하나의 몸에 두 분의 부처님 얼굴을 갖춘 이른바 분신서상(分身瑞像)이다.두 개의 불두 갖춘 파격양식‘대당서역기’에 유래 기록돼가속화된 불교 대중화의 결과영험에 대한 과한 집착 경계막고굴 237굴 주실에는 천정부의 가장자리를 따라 각양각색의 서상들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그중 주존상을 기준으로 후면 천정부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을 하나 선택한다면, 아무래도 보리수 아래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그 순간일 것이다. ‘화엄경’에서 설하는 대방광의 연화장세계가 바로 이 순간에 펼쳐진 점을 생각한다면, 깨달음의 순간에 느껴질 장엄함과 환희심이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마가다국 마하보리사서 조성머리 보관·팔찌 찬 파격 양식7~8세기 중국 광범위한 유행석굴암 본존불도 그 영향받아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은 일찍부터 불교미술에서도 중요한 표현의 대상이 되어왔다. 막고굴 231굴 주실 천정부에도 성도(成道)의 순간을 표현한
류살하는 불두(佛頭)의 유무를 통하여 정치적 길흉을 예고하였던 양주서상과 관련된 인물로서, 이 특별한 불상의 출현을 예언하는 배역을 맡고 있다. 각종 문헌과 유적이 전하는 류살하는 단지 서상의 출현을 예고하고 무대 뒤로 사라지는 단역을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다. 류살하는 5세기에서 11세기에 걸친 기간 동안 지옥의 목격자, 잊힌 성지의 발굴자, 서상 출현의 예언자로서, 또는 북방민족의 홍법자이자 수호신, 관음보살의 화신으로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칭송받았던 인물이다.‘고승전’에 처음 등장한 류살하갑작스러운 죽음에 이은 부활인도서 석가모니
중국 감숙성 무위시 영창현의 어산(御山)에는 성용사(聖容寺)란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이 절은 최근 대대적인 중수작업이 한창이다. 그중 산자락에 기대어 세워진 서상전(瑞像殿)에 모셔진 불상은 그 모습이 자못 괴이하다. 전당의 중앙에는 흔히 예상되듯 멋지게 조각되고 장엄된 불상은 보이지 않고, 마치 본래 산자락의 바위가 자연적으로 형성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형상이 보인다. 언뜻 보면 그 자태가 마치 가사를 걸치고 서 계신 부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괴이한 것은 이 형상에
이상적인 지도자란 어떤 모습일까? 불교에서는 정법(正法)에 의지해 세상을 평정하는 전륜성왕의 개념으로 이 질문에 화답하고 있다. 아육왕, 중국에 불교 전래 이후이상적인 통치자 모델로 인식양무제 시기에 아육왕상 성행황실 주도로 진신사리 공양도역사상 실존했던 아육왕(Aśoka)은 이런 전륜성왕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다. 아육왕은 기원전 3세기에 인도 대륙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살육의 전쟁을 벌였지만, 불교에 귀의한 후 홍법에 힘쓰고 덕의 정치를 펼쳤다. 불교 전파 이후 중국에서도 아육왕은 하나의 이상적 통치자의 모델로 인
불상은 언제부터 제작되었을까? 고고학의 시각에서 이것은 서기 1세기 전후, 즉 석가모니 열반 후 500여년이 지나서야 발생한 일이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조각된 산치대탑의 부조에서 석가모니를 보리수, 법륜, 스투파 같은 상징물로 대체하여 표현한 것을 보면, 당시에 불가사의한 여래의 몸을 형상화하는 것에 대한 모종의 금기가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전에서 불상의 출현은 훨씬 더 이른 시기의 일이며, 극적인 서사 전개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다.부처님 그리워한 코삼비 우전왕전단나무로 5척 형상 만들게 해부처님이 도리천서 돌아왔
‘삼국유사’는 기이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누구도 이 이야기들을 단순히 허황된 옛날 얘기일 뿐이라고 치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이야기들 안에 내재된 당시의 역사와 사상을 읽고, 극적으로 구성된 서사 전개 속에 투영된 신앙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도 당연히 ‘삼국유사’의 내용처럼 불교와 관련된 각종 설화들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흥미롭게도 돈황석굴(막고굴과 주변의 유림석굴, 동천불동, 서천불동을 포함한 광의의 돈황석굴)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시각적인 텍스트로 만날 수 있다.막고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