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행파는 유식학파 혹은 유가행유식학파로도 불리며, 중관학파와 더불어 대승불교의 양대 학파를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유식사상(唯識)이란 우리들이 경험하는 이 세계는 단지 마음의 표상에 지나지 않고, 외계의 사물은 마음의 표상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방식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유식사상은 무착(無着)과 그의 동생인 세친(世親)에 의해 약 4~5세기 무렵 ‘유가사지론’과 ‘해심밀경’을 근거로 하여 ‘중변분별론’ 등의 미륵의 논서와 ‘섭대승론’, 그리고 ‘유식20론’이나 ‘유식30송’ 등에 의해 사상적으로 체계화된 것이다. 사실 유
‘반야중관’이란 ‘반야경’의 공사상에 토대를 두고, 용수(龍樹)의 ‘중론’에서 제시하는 중도의 실천과 ‘반야경’에서 강조하는 ‘반야바라밀’ 즉 ‘지혜의 완성’을 통한 공사상의 체득과 그 실천을 목표로 하는 사상체계를 말한다. 사실 이러한 사상은 ‘반야중관’이라는 명칭보다는 ‘중관학’ 혹은 ‘중관사상’이라 불린다. ‘중관파(中觀派)’ 혹은 ‘중관학파(中觀學派)’라는 명칭은 용수의 ‘중론’에 근거한 것으로, 청변(淸辯)에 의해 5~6세기 이후에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용수(龍樹)는 ‘중관파’라는 말을 직접 쓰지는 않았고, 중관파가 역사
이제설은 일상적인 진실(=세속제)과 궁극적인 진실(=승의제)로 구분되는데, 붓다의 자내증의 경지인 궁극적인 깨달음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즉 맛지마 니카야의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 연기를 본다’라는 경구는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여실지견에 대한 붓다의 진의가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인 연기의 이법(=법)은 궁극적인 진실로서, 연기의 이치가 적용된 현상(=연생법)은 세속적인 진실로서 확립된 것으로 이해된다. 초기경전에서 제시된 연기와 법에 대한 이해방식은 일의적이지 않고 매우 다양
이제설은 ‘맛지마니카야’의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 연기를 본다’라는 이해방식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유부는 법(dharma)을 ‘자상(自相) 혹은 자성(自性)을 지니기 때문에 법이다’라고 정의한다.이러한 법은 연기의 이법이 적용된 유위와 무위의 다르마, 즉 일체법을 나타내는 5위75법으로 이제적인 차원에서는 승의에 해당된다. 하지만 용수는 ‘일체법무자성’이라는 입장에서 유부의 실체적인 법에 대한 이해방식을 비판한다. 이런 점에서 유부와 용수의 견해는 자성실재론(自性實在論)과 자성공론(自性空論)의 대립으로 이해
이제설은 붓다의 교법과 진리의 형식에 관한 학설로서 다루어져 왔다. 원형은 초기 불교경전의 ‘중아함’ 등에서 산견되고, ‘구사론’에도 등장한다. 한편 용수는 ‘중론’에서 반야경의 공사상을 이해하는 토대로서 대승적인 입장에서 이제설을 독특한 진리관으로 확립시켰다. 이제설은 용수에 의해 대승적으로 새롭게 제시된 이래 공성론의 이해나 전개와 관련하여 중관학파의 중심적인 교설로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용수의 이제설은 유가행파의 이제설과는 차이를 보인다. ‘진실의품’에서 ‘일체법무자성’이라는 입장에서 가설의 의지처나 기체를 전면적으로 부정
초기 유가행파의 공성에 이해방식은 ‘반야경’의 공사상을 공무소득(空無所得)의 부정적인 설명방식이 아니라, 공성을 무분별지의 대상인 진여와 등치되는 개념으로서 긍정적인 실재(=vastu)로 치환시켜 설명하는 점에서 그 특징을 드러낸다. 이러한 공성의 이해방식은 용수를 비롯한 중관학파의 입장과는 교리적으로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이는 초기 유가행파의 독특한 실재관이나 진리관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공성의 이해방식을 둘러싼 초기 유가행파의 독특한 사상들은 ‘보살지’ 진실의품에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제시된다. 주로 유식적인 공관이나
공성의 이해방식은 초기경전에서 제시한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 연기를 본다’는 사상적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이러한 연기와 법에 대한 이해방식은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그 교리체계에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유부의 법에 대한 이해방식에도 계승된다. 다만 유부가 내세우는 ‘5위75법’이라는 다르마 이론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입장은 견지하지만, 이는 아공법유(我空法有)라는 실체론적인 사고를 내포하는 점에서 용수나 유식학파 등에 의해 비판의 표적이 된다. 이러한 유부와 용수의 법에 대한
대승불교에서 공성(空性, śūnyatā)은 ‘반야경’의 ‘모든 존재는 자성을 가지지 않으므로 공(一切法無自性空)’이라는 입장에서 이해된다. ‘반야경’의 공성은 내적으로 존재의 구성요소로서 법이 승의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설일체유부의 실체론적인 사고를 비판함과 동시에 이와 유사한 실체론적인 사고경향을 가진 바이쉐시카 등 외도들의 견해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반야경’의 ‘모든 존재(=법, dharma)는 자성을 가지지 않으므로 공’이라는 입장을 잘못 파악하거나 과도하게 해석할 경우 악취공이나 허무주의에 빠질 소지가 있다.
공성(空性, śūnyatā)은 세속과 승의의 두 차원으로 볼 때, 이는 승의의 차원에서 전개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나와 세계를 공(空, śūnya)으로 설명하는 경우, 현상과 본질의 긴밀한 불가분의 관계를 고려하면 일상적인 영역에서 현상적으로 경험되는 나와 세계는 세속의 차원에서 그 존재성이 전면적으로 부정되지는 않는다. 반면 나와 세계의 본질은 승의의 차원에서 자성적으로 그 존재성이 부정되는데, 이를 공성이라 부른다. 나와 세계가 공이라고 표현되는 경우, 나와 세계는 세속의 차원에서 현상적으로는 유(有)이지만, 승의의 차원에서
‘공성(空性, śūnyatā)’이란 ‘결여되어 있다’ 혹은 ‘비어있다’라는 형용사 ‘공(空, śūnya)’의 여성명사의 형태이다. 어원적으로 ‘공(空, śūnya)’은 ‘부풀다(to swell)’ 혹은 ‘증가하다(to increase)’는 의미를 가진 산트크리트의 동사어근 ‘스비(√śvi)’ 혹은 '수(√śū)'에서 파생된 형용사이다. 이러한 ‘공’은 인도 베다문헌에서는 ‘공허한’이나 ‘텅빈’ 등의 의미로, 인도의학서에서는 병적으로 ‘부풀어 오른’ 상태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했다. 대체로 여성명사 ‘공성’과 형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경전은 ‘반야경’이다. 이러한 ‘반야경’의 핵심적인 사상은 공사상과 육바라밀, 보살사상 등으로 볼 수 있다. ‘법화경’ ‘화엄경’ ‘무량수경’ 등 여러 대승경전들도 ‘반야경’의 공사상과 육바라밀, 보살사상 등을 근거로 이에 여러 요소들을 부가하여 매우 독특한 형태로 발전시킨 것으로 이해된다. ‘반야경’은 인도에서 나타난 초기대승경전의 하나로, 핵심내용은 ‘일체의 존재는 공(空, śūnya)이고, 무(無, abhāva)이며 무자성(無自性, niḥsvabhāva)이다’라고 설한다. ‘반야경’의 텍스트 성립과정은 최초
불교의 수행이나 명상심리학의 핵심주제는 ‘나’란 누구인가? 과연 나의 존재성(=자아 혹은 실존), 즉 자기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제대로 확립할 것인가? 라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초기불교나 아비다르마불교에서 제시하는 명확한 답변은 바로 5온․무아이다. 즉 교리적으로는 승의적인 차원에서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자아로서 ‘나(=자아, ātman)’는 부정되지만, 세속적인 차원에서 5온의 유기적이고 인연에 따라 조건적으로 생멸하는 경험적이고 현상적인 자아나 자아의식(=ego)은 인정된다. 초기불교나 아비다르마불교는 태어나서 죽는
초기불교나 아비다르마불교는 인간존재를 5온, 즉 ①색온(色蘊), ②수온(受蘊), ③상온(想蘊), ④행온(行蘊), ⑤식온(識薀)의 5가지 임시적인 모임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색’은 ‘육체적 현상’을 ‘수․상․행․식’ 등은 ‘정신적 혹은 심리적 현상’을 의미한다. 5온은 과거․현재․미래 3세에 걸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아닌 역동적으로 생멸하는 연기적 현상임을 시사한다. 이는 붓다의 연기적 통찰에 의해 제시된 것으로, 인간 존재는 5온의 연기적인 흐름(相續)이나 모임에 불과할 뿐 ‘나’라고 내세울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무아(無我
설일체유부는 존재를 이제적인 차원에서 군대와 꽃병, 물이나 불 등은 물리적인 분석이나 지혜에 의해 여러 요소로 해체되는 점에서 세속적인 존재(=假有)로, ‘5위75법’이라는 다르마는 일체 존재의 구성요소로서 승의유(=實有)로 구분한다. 하지만 용수는 유부가 내세우는 다르마(=법)도 세속의 차원으로 간주한다. 용수에 따르면 진리의 차원은 언설이나 관습에 따라 설명되는 일상적인 차원의 세간적인 진실(俗諦 혹은 世俗諦)과 언설이나 관습을 뛰어넘는 초일상적인 차원의 뛰어난 진실(眞諦 혹은 勝義諦)로 구분된다. 이때 세간적인 진실은 언설에
연기와 법의 관계성은 초기불교 이래 아비다르마불교와 반야・초기중관을 거쳐 유식사상에 이르기까지 사상구조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연기’란 '연기의 이법이나 인과관계(혹은 인연법), 또는 연생법' 등으로 법은 진리(진실), 교법(가르침), 현상, 요소나 성질' 등으로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하지만 초기경전에서 연기와 법의 관련기술은 연기와 법이 지시하는 의미와 그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특히 초기불교에서는 연기나 법이 의미하는 바가 세속인지 승의인지 그 존재론적 위상이 그다지 명확하게 제시되지않아 논란의
설일체유부의 다르마 이론은 물질적 현상과 심리적 현상을 분석하여 번쇄하게 느껴질 정도로 교리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정리한다. 즉 유부의 교의체계는 물질에 대한 원자론적 분석을 비롯하여, 업의 인과문제나 심리학적인 문제들, 업과 번뇌 등으로 인한 실존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수행론적인 실천에 이르기까지 매우 방대하다.이러한 아비다르마의 사상이나 유부의 교의체계를 너무 지엽적이거나 철학적인 문제에만 잘못 치중하는 경우에는 간혹 숲 속에 들어가 길을 잃는 경우와 같은 일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유부의 다르마 이론은 실존적 괴로
초기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체계는 ‘맛지마니카야’ 등에 설해져 있는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 연기를 본다’라는 경구에 집약되어 있다. 초기불교의 교리는 연기와 법의 관계에 대한 붓다의 직관적인 통찰을 근거로 인간존재 문제는 5온설, 존재와 인식 문제는 12처와 18계, 실존적 괴로움이나 존재의 심연을 파헤치는 통찰은 4성제와 12연기 등으로 제시된다. 초기불교에서 교리가 무명이나 번뇌로 인한 실존적 괴로움을 해결하여 깨달음이나 완전한 행복(열반)의 성취를 추구하는 점에서 그다지 철학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이
설일체유부의 다르마 이론은 일체 현상을 해체해 5위75법으로 환원시키고 있다. 우리의 인식주관이나 무루지에 의해서 포착된 현상을 유위와 무위의 다르마 이론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과관계를 벗어나 있다는 3가지 무위의 현상을 포함하는 다르마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일까?‘구사론’에서 세친이 아비다르마를 승의로서의 다르마, 즉 아비다르마를 열반으로 해석하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비다르마는 다르마의 특징(法相)에 대향(對向)하는 것이기 때문에, ‘승의적인 열반’이나 ‘열반이라는 현상에 도달하게 하는 방편
설일체유부는 세친이 주장하듯이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라는 그 본질적 측면을 간과하거나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유부는 인식의 구조상 언어보다도 더 중요한 요소를 이름으로 보는 듯하다. 사실 언어관의 차이는 언어가 의미를 지니는 것이 이름 등에 의한 것인가? 혹은 언어자체가 사회적 약속에 의해서 이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와 결부된다. 예컨대 유부는 우리가 말을 할 때 그 말은 사라지지만 이름 등은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반면에 세친은 언어는 이미 사회적 약속에 의해 사용되어지는 것으로, 별도로
유부와 세친의 언어관에 대한 그 견해 차이는 말과 이름의 관계나 말의 특성에 대한 이해방식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유부는 명․구․문 중 자·모음(문, vyañjana=음소)들은 문자(lipi)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의 이름들에 불과하지 않는가?라는 세친의 반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문자의 구성요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자·모음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실제로 말할 때는 들리지 않는 자·모음을 남에게 글(lekhya)로 이해시킬 수 있을까? 즉 다름 아닌 말을 구성하고 있는 음소로서의 자·모음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