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끝난 듯했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막다른 길에서 벽을 뒤에 두고 무섭게 쫓아오던 ‘운명’이란 놈에게 소리쳤다. “야! 덤벼.” 멈추면 잡힐 것 같아서 잡히면 죽을 것 같아서 앞만 보고 달렸는데 문득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니 열심히 따라오던 운명이란 놈도 멈칫 놀라 섰다. 죽음이란 끝자락에서 삶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나니 출가수행이란 또 다른 시작이 앞에 펼쳐졌다. 전생의 인연인가 했다. 낯선 절집생활이 차츰 적응되어 가고 마치 오랫동안 해왔던 일처럼 익숙한 나의 모습에 ‘이곳이 바로 내가 살 곳이구나’하는 생
인연(因緣)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 아닌가 싶다. 왜, 무엇 때문에 이 무지막지하고 엄청난 일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전생의 빚을 갚으려고 그러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어쩌면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처럼 갑자기 글 쓰는 벌레로 변했다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그런 느낌이다. 아니면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햇빛이 너무나 강렬해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우연(?) 혹은 필연일지도 모를 일이다.그 시작은 이러했다. 평소 ‘불교신문’에 연재되는 동은 스님의 감성 에세이 ‘지금 행복하기’의 열렬한 팬
“삶이 진행되는 동안은 삶의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죽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탈리아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가 한 말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극명하게 나타낸 말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늙어가는 것이다. 며칠 전 신도님이 와서 상담을 청했다. 홀로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몇 년 전 치매가 왔다고 하셨다. 나름 봉양을 한다고 애를 썼지만 생계를 유지하며 틈틈이 간병하기에는 너무 힘에 부쳐 하는 수 없이 지역에 있는 요양원에 모셨다. 그런데 그날부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몸은 좀 편해졌지만
나이를 먹어 가는지 머리칼은 물론 눈썹이며 수염까지 서리나 눈을 맞은듯 하얗게 변해간다. 게다가 기억은 가물가물해져 뭔가 물건을 자꾸 잃어버리고 치매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말년처럼 전 세계의 산 이름을 100여개 정도 매일 외워볼까도 싶다.그러고 보면 젊다는 것만으로도 청춘은 무한한 가능성이자 찬란한 봄날이 아닌가 싶다. 만약에 다시금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헛된 상상을 하곤 한다. 그러나 지나간 세월을 누가 되돌릴 수가 있으며 한번 쏟아버린 물을 그릇에 다시 담을 수가 있겠는가. 다만
출가 수행자가 출퇴근이라는 말을 써보니 좀 어색하다. 서울 총무원에서 소임 보는 ‘수도승(首都僧)’ 스님들이야 출퇴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강원도 산골 주지가 출퇴근 한다는 것은 어째 이상하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가 종무소이다 보니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재택근무 하는 셈이다. 오래전 월정사에서 단기출가학교장 소임을 볼 때는 몇 년 동안 영월에 있는 작은 암자 금몽암에서 출퇴근을 한 적이 있다. 서강에서 평창강으로 이어지는 그 길은 거의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였다. 그 길 위로 꽃비 흩날리는 봄이 왔고, 황금빛 자작나무 잎들이 반
예전에 살던 숙소는 북촌마을 인근의 계동(桂洞)이라는 곳이었다. 아마도 계수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계수나무 아래에는 월정(月井)이란 우물이 지금도 남아있어 보름달이 뜰 무렵이면 참으로 운치가 있었으리라. 아직까지 한옥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창을 열면 기와지붕이 고풍스럽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숙소 테라스에서 바라다보는 인왕산 너머로 지는 저녁놀과 석양 또한 장관인지라 계동 숙소는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곳으로 자리한다. 특히나 일제 치하에서 북촌을 지켜낸 정세권 선생의 노고에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숙소를 나오면 바로 앞
만년필이라.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이다. 만년필이란 말만 들어도 왠지 가슴이 설레며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요즘은 하도 필기구들이 많아 만년필이란 것을 구경조차 못한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많이 쓰는 볼펜도 예전에는 쓸 때마다 찌꺼기가 묻어나와 옆에 따로 똥(?)닦는 종이를 두어야 했다. 이제 대부분의 글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종이가 아닌 기계 속에다 저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맘대로 썼다가 지우고 손가락 한번 까딱하면 복사해서 옮기기도 하니 이 얼마나 편리한 도구인가. 문명의 이기에 밀려 손으로 쓰
어린 시절 초등학교 다닐 적에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글을 쓰던 기억이 새롭다. 어려운 시절인지라 몽당연필이 되면 아버님께서 빈 볼펜대에 끼워주던 기억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달력 뒷장에 꼭꼭 눌러 받아쓰기를 하거나 한자를 익히던 기억이 아련하기만 하다. 새 연필을 예쁘게 깎아 필통에 가득 채우면 부자라도 된 듯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종이로 만든 카네이션 꽃과 연필로 삐뚤빼뚤 쓴 어버이날 감사편지 한 장에 부모님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다.그러다가 샤프펜슬이 나왔을 적에 얼마나 신기하고 멋지던지 몰랐다. 연필을 깎지 않아
모든 꽃은 아름답다. 저택 정원에서 우아하게 뽐내고 있는 백합이든, 깊은 산중 홀로피어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고고하게 피어있는 들꽃이든 아름답긴 마찬가지다. 왜 아름다운가? 피어있기 때문이다. 꽃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찬란한 순간,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애쓴 것이 빛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피어있는 꽃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러나 알고 보면 싹을 틔워 떡잎을 내밀고 대지에 몸을 맡긴 순간부터 꽃이 아닌 순간이 없다. 꽃을 피워내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비바람 눈서리를 견뎌냈겠는가. 다만 그 모든 과정들의 결정체가 바로 꽃으로 드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 길잡이 목련화는 /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가곡 ‘목련화’를 불러봅니다.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어머님은 강릉 함씨로 이름이 옥연(玉蓮)이셨습니다. 어머님을 생각하면 한 송이 목련꽃이 떠오릅니다. 그런 까닭에 지난해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봄이면 산목련으로 다시 살아오시리라 믿습니다. 내년 봄 산목련이 필적에는 어머님을 만나러 갈 겁니다.다른 이는 조병화의 “내 어릴 적 을남이는 /
‘제 눈에 안경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물을 바라보거나 판단하는 시각적인 기준을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안경이란 것이 그 사람에게만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남이 꼈을 때는 어질어질 한 것이 당연하다. 남들이 볼 때 영 아니다 싶은 커플도 눈에 ‘안경’이라는 콩깍지가 끼면 그 사람 눈에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나는 출가 후 안경을 쓰게 됐다. 학인시절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눈이 점점 안 좋아지더니 결국 안경을 쓰게 되었다. 흐릿했던 글자는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안 쓰던 안경을 쓰니 불편하
어떤 만남은 일기일회(一期一會)의 귀중하고 아름다운 만남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만남은 차라리 안 만나는 것보다 못한 잘못된 만남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만남에는 우연 혹은 어떤 기연이 함께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런 우연의 합(合)이 모여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과도 같은 삶이나 깨달음의 순간으로 화현하는 것이리라. 홍대용(洪大容)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1765년 겨울부터 1766년 봄까지 연경(燕京 : 지금의 북경)을 다녀온 기록이 ‘건정동필담(乾淨洞筆談)’인데 ‘항전척독(抗傳尺牘)’이란 책에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
나는 어려서부터 뭔가 공책에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일기쓰기’였다. 무언가 나만의 비밀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 좋았다. 지금 읽어보면 그 내용이란 게 참으로 기도 안 차는지라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열심히 무언가를 기록하면서 아울러 그중에 한자로 바꿀 수가 있는 것은 국어사전을 찾아서 써 보았다. 국어와 한문 2개 국어를 익히는 나만의 일기쓰기 비법이었다.아버님께서 한학을 좋아하셔서 초등학교 3학년 아들에게 매양 ‘농민신문’을 읽게 하셨다. 국한문 혼용인지라 읽기가 쉽지 않은데 용케 잘 읽으면 칭찬
“아버님 전상서! 조석으로 바람이 찬데 그간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하신지요? 소자는 아버님의 염려덕분으로 건강하게 공부 열심히 잘하고 있습니다.”무슨 옛날 편지인가 하겠지만 내가 고등학교 객지 유학시절 가끔 시골집에 계신 부모님께 안부편지 드리던 첫 구절이다. 그 무렵에는 소식을 거의 편지로 전하던 때라 격에 맞춰 글을 쓰지 않으면 ‘배우지 못한 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하니 편지 첫머리의 ‘누구누구 전상서’와 ‘기체후일향만강’은 편지 좀 쓴다는 사람들의 기본옵션이었다.나는 중학교 때 한문시간이 즐거웠다. 고사성어에
스님! 여여(如如) 하신지요?미혹한 제자 ‘진광’입니다. 스님께서 원적에 드신지도 어언 14주기가 다 되어 옵니다. 그렇게 꽃은 피고 또 지고를 반복하며 14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제 가슴 속에 항상(恒常) 하시는 스님의 크고 너른 자비덕화는 해가 거듭될수록 더해만 갑니다. 원래 생전에 불효한 자식들이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더욱 애달픈 것과 같은 이치인 듯합니다.남미를 여행할 적에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스님의 전화를 받았지요. “이제 들어와서 나를 도와다오”라는 한마디에 2박3일간 비행기를 타고 귀국을 했었지요. 귀국해 인사드리
“스님,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스님께서 편안하게 해주십시오.”“불안한 네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편안하게 해주리라.” “아무리 찾아도 그 마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미 너를 편안케 하였느니라.”선종에서 너무나 많이 알려진 달마대사와 제자 혜가의 문답이다. 스승을 찾아 힘들게 소림굴까지 온 혜가는 허리까지 오는 눈 속에서 법을 구하였다. 그러나 근기를 점검해보는 달마대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왼팔을 잘라 구도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자 비로소 제자로 받아들였다. 9년 동안 두문불출 면벽좌선을 하며 제대로 된 제자를
우리는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물려받고 닮아간다. 나의 경우에는 아버님에게서 이성을, 어머님에게는 감성적인 면을 물려받은 듯하다. 특히 사내아이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어머님의 영향을 더 받는가 보다. 그러다보니 어린시절의 나는 주변환경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다분히 감성적인 소년이었다.그 시절에 우리 집에서는 소를 키우고 있었는데 매일 시냇가로 끌고 나가서 소꼴을 먹이는 일이 내 차지였다. 그런데 소를 끌고서 걸어가기에는 꽤나 먼 거리인지라 소의 등에 올라탄 채 오가곤 했다. 그럼 내가 마치 수주 변영로라도 된 듯 했고 소등에 탄 채 함곡
# 에피소드1지난 초하루 법회 때 일이었다. 한참 법문을 하고 있는데 노보살님 한분의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청춘~을 돌려다오~♬” 조용한 법당에서 울리는 벨소리는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쏠리게 했다. 다들 멋진(?) 벨소리에 킥킥댔다. 그러나 그 보살님은 벨소리를 잘 듣지 못하시는지 꺼질 때까지 그냥 있었다. 잠시 후 조용하던 전화기 벨이 다시 울렸다. 어쩌면 자식들의 안부 전화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평소 법문시간에 재밌는 말씀으로 대중들을 즐겁게 해주시던 보살님이라 ‘감성이’의 너그러운 마음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세
무라카미 하루키는 ‘먼 북소리’라는 책의 서문에서 “그렇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여행을 떠날 이유로는 이상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중략)…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먼 곳에서 북소리가 들려온 것이다”라고 말했다.누구에게나 그런 ‘먼
살다보면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다. 내겐 지난해 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일명 ABC)’ 트레킹이 그것이다. 나는 사실 이 순례를 오래전부터 꿈꿔왔다. 선방 다닐 땐 지인들에게 “내게 연락이 끊기면 설산 어느 자락에서 살다가 간 줄 알아라”라고 이야기 한 적도 있었다.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그 설산 양지바른 어디쯤엔가 토굴 하나 지어놓고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가고 싶은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오래전 포카라에 갔을 때 안나푸르나 설산이 보이는 ‘오스트리아캠프’에서 하루 묵은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