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마지막 응화비진분의 익히 유명한 ‘일체 유위법, 여몽환포영…’으로 시작되는 게송 바로 앞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남을 위해 일러주는 것인가? 모양에서 취하지 말고 항상 한결같아서 꿈쩍이지 않아야 한다.(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구마라집 스님 한역본의 내용인데, 이 부분에 해당하는 범본(콘즈본)은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겠느냐? 마치 설명해주지 않은 듯해야 한다. 그래서 설명해주고자 한다고 일컬어지는 것이다”라 되어 있고, 현장 스님의 한역본은 “어떻게 해야 남을 위해 널리 설해주어 열어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묻는다.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잘게 부수어 미세한 티끌로 만든다면 그 미세한 티끌들은 정말 많지 않겠느냐?” 그러자 수보리는 당연히 많을 것이라 아뢰고는 많은 이유를 “만약 그 미세한 티끌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그 미세한 티끌들을 말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고 답한다. 앞서 ‘금강경’에서 마흔 차례 가까이 반복되는 문구, A는 A가 아니므로 A라 한다는 어투의 일종이기도 하다.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는 비록 이 문단에서 무한대(無限大)의 개념으로 사용되었지만 부파불교의 시각과 대
제28 불수불탐분에, “만약 어떤 이가 항하사 모래 같이 많은 칠보로 보시한 공덕보다 일체법에 아(我)가 없음을 알고서 인(忍)에서 성취한 공덕이 더 클 것”이라 하였다. 일체법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안다는 것은 무아법(無我法)을 성취하였다는 것이요, 무아법을 성취한 상태에서 감내해냄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공덕은 그 크기가 갠지즈강 모래알 수보다 많은 칠보를 쟁여놓고 그것을 불보살님에게 세세생생 공양을 올려 쌓은 공덕보다 더 크다는 말인데, 이를 사자성어로 옮긴 것이 ‘무생법인’이다.무생법인(無生法忍)이란 “일체법이 공하
제27 무단무멸분에 “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자는 ‘법의 단멸을 말한다(說諸法斷滅)’고 여기지 말라”는 문장이 있다. 그 바로 앞의 문단에서 몇 가지 범어판본 및 현장 스님의 한역본은 “여래는 32상을 갖추었다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구마라집 스님은 “여래는 32상을 갖추지 않은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라고 ‘불(不)’ 한 글자를 더 첨부하여 번역내용을 수정한 이유, 혹은 스님이 저본으로 삼은 범어판본이 그렇게 되어 있는 까닭이 바로 이 ‘보리의 마
제27 무단무멸분의 구마라집 번역본을 보면 ‘여래불이구족상고득아누다라삼막삼보리(如來不以具足相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막작시념(須菩提莫作是念): 여래불이구족상고득아누다라삼막삼보리(如來不以具足相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 부분에 대한 번역논란은 최근의 일이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중국 손지현이 대혜종고(1088~1163)에게 이 점에 대해 문의하자 “억측스런 소견으로 성인의 뜻을 깎고 덜어낸다면 이 또한 인과법에 걸려서 성인의 가르침을 훼방하는 것이기에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은 논할 것도 없지만…”이라고 답
경전을 가리키는 산스끄리뜨는 실이나 끈을 의미하는 쑤뜨라(sūtra)이므로 한문으로는 끈으로 종이를 묶어놓은 모습을 본뜬 상형자인 책(冊)에 해당하는데, 한문번역어로는 경(經)이 사용된다. 경(經)이란 날줄이 걸린 베틀[巠] 곁에 실[糸]을 쌓아둔 모습이다. 베를 짤 때는 베틀에 이미 걸려있는 날줄에 맞춰 씨줄을 어떻게 먹이느냐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문양의 온갖 천이 짜여지듯이, 쑤뜨라인 경전도 성인이 말씀해놓으신 것을 어떤 근기에서 어떤 시각으로 읽어내느냐에 따라 그 해석에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경전에 대한 갖가지 해석
제26분에서 부처님께선 수보리에게 32상만으론 여래를 뵐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주지시키고는 그 마지막에 “만약 형색으로 나를 찾으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일 뿐이니 결국에도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니라”는 게송을 일러주신다.‘금강경’에서 강조되어 반복되는 내용 가운데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운 보석으로 영원토록 여래께 보시하는 공덕보다 ‘금강경’의 최소한 한 수의 사구게송을 다른 이에게 일러주는 그 공덕이 더 크다’는 말이 있다. 물론 여기서의 ‘사구게송’이란 앞서 밝혔던 바와 같이 단지 위와
‘금강경’은 수보리의 질문에 부처님께서 답하시거나 간혹 수보리에게 오히려 물음을 건네어 말씀하고자 하시는 내용을 이끌어내는 문답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26 법신비상분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먼저 부처님께서 ‘수보리여! 누가 32상을 갖추었다면 그를 여래로 볼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시자 수보리는 ‘예! 그렇습니다. 어떤 이가 32상을 갖추었다면 그를 여래로 볼 수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두 분의 대화내용을 살펴보면 ‘금강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수보리가 부처님의 질문에 잘못된 답변을 드렸다가 핀잔까지 듣고
‘위없고도 올바르며 동등한 깨달음’이란 의미의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은 범어로 안웃따라(anuttara, 위없는)・삼약(samyak, 바른)・삼(sam, 동등한)・보디(bodhi, 깨달음)이며, 그 소리옮김이 널리 알려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위없고[無上]・올바르고[正]・동등함[等]은 모두 깨달음[覺]이 어떤 형태인지 설명해주는 내용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 ‘동등한 깨달음’이란 곧 ‘여래와 동등한 깨달음’을 가리키는데, 수행자가 추구해야 하거나 혹은 추구해서 얻은 깨달음의 기준이 완벽한 깨달음을 얻은 여래의 깨달음과 같아야 함
제21 비설소설분엔 ‘설법’에 대한 세존과 수보리의 문답이 오가는데, 느닷없이 “수보리여! 내가 설한 법이 있다고 여기지마라! 그런 생각도 하지 말지니라. 누구라도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니, 내가 설한 바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생긴 일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부분은 범문의 내용과 그것을 번역한 구마라집 스님 및 현장 스님의 번역문에 의미상 큰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바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 되는 까닭을 범문에선 “법을 설한다
구마라집 스님은 각기 다른 범어 3개에 대한 한문 번역어로 동일한 상(相)을 사용하여 ‘금강경’을 번역하였다. 첫째는 아상・인상 할 때의 ‘상’으로서 범어로는 산즈냐(saṁjñā)인데 음역은 ‘산야’요 의역은 ‘지식(知識)’이니, 그 반대어인 쁘라즈냐(prajñā)가 ‘반야’와 ‘지혜(智慧)’로 옮겨진 것에 맞춘 것이다. 둘째는 32상・80종호 할 때의 ‘상’으로서 범어로는 락샤나(lakṣaṇa)인데 일종의 징후로 드러나서 감각기관에 감지(√lakṣ)된 모양새를 가리키므로 ‘감지새’로 옮겨놓는다. 셋째는 범어로 니미따(nimitta
점심(點心)이란 말은 분명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건너온 것이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이 쓴 고려의 생활상을 적은 ‘고려도경’에도 “고려 사람들은 하루에 두 끼만 먹는다”고 되어 있으며, 아침과 저녁이 순수 우리말인데 반해 오찬에 대한 우리말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중국에서 점심이란 말의 유래로는, 남송 때 한세충이란 명장이 있었는데 아내 양홍옥이 군사들을 위해 만들어온 만두의 양이 너무 적자 “심장[心]에 조그만 불씨를 지펴[點火] 기운이나 차리시게!”라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금강경’에 통달했다는
지금까지 가장 널리 읽히는 ‘금강경’ 한문본은 구마라집 스님이 범본을 번역한 것이다. 그것의 구경무아분 뒷부분에 이르러 세존께서 수보리에게 “보살이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케 하리라고 스스로 말한다면 그를 보살이라 일컬을 수 없다. 왜냐하면 보살이라 일컬을 만한 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일체법에 사상(四相)이 없다고 말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등장한다.세존께서 수보리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전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범본과 현장 스님의 번역본을 살펴보면 그 중간에 결역(缺譯)된 부분이 존재한다. 즉, “보살이라
제17 구경무아분에는 제2 선현기청분과 제3 대승정종분에 걸쳐 나온 문장과 유사한 내용이 등장한다. 우선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게 하고 항복시켜야합니까?”라고 여쭙자 대승정종분에서, ①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머물게 하되 설령 중생을 모두 제도하더라도 제도한 중생이 있다고 여겨선 안 된다 하셨다. 그리고 ②사상(四相)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을 장악하라 하셨으니, 내가 제도했다는 아상(我相) 등이 있으면 이미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라 답하셨다
제16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업장을 깨끗이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업장은 단지 일반적인 경우라기보다는, 예를 들자면 어떤 이가 혹독한 용맹정진 끝에 문득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는데 아직까진 맑혀야 될 잔업(殘業)이 존재하는 경우라면, 아라한의 지위에 올랐다 하였으니 다시 목숨을 받고 태어나 그 업을 맑힐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미 지은 업이 근거 없이 탕감될 리도 없는 상황일 때 적용되는 경우라고 보면 적합할 것 같다.부처님께서 “수보리여!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경
경전의 첫머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시아문(如是我聞)’. 현대의 대역경가이셨던 운허 스님에 의해선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능동문으로 번역되어 잘 알려져 있지만, 범어로는 “evaṁ(그렇게) mayā(나에 의해) śrutam(들렸다)”으로써 인도어의 특징인 수동문의 대표격 표현이라는 것은 본 연재물의 첫머리에서도 언급되었다.일반적으로 인도 말이 수동문을 기초로 하다시피 하는 연원을 인도의 관련 철학에서 찾아보면, 절대상태이자 존재인 브라흐만(Brahman)이 어떤 연유로 인해 불완전한 상태로 바뀌자 전변(轉變)의 형태로 모든
제14 이상적멸분 중반부에, 앞서 살펴보았던 ‘와스뚜(vastu)’가 다시 등장한다. 먼저 해당문장의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문은 다음과 같은데, 원문에 비해 제법 축약된 번역문에서 ‘와스뚜’에 해당하는 번역어는 ‘法’이다. “만약 보살이 마음을 法에 머문 채 보시를 행한다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이내 보이는 것이 없는 것과 같으며, 만약 보살이 마음을 法에 머물러 두지 않은 채 보시를 행한다면 마치 눈이 있는 사람이 햇빛이 밝게 비치면 갖가지 빛깔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그리고 동일한 부분의 현장 스님 번역은 범어원문과
제13 여법수지분 첫머리는 “세존이시여! 이 경(經)을 어떻게 이름 해야…”라며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쭙는 말로 시작된다. 그런데 경전 안에 ‘이 경(經)…’이란 말이 나올 수 있는가? 심지어 부처님의 답변이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며…”라고 되어 있으니 분명 경전의 이름을 말한 것인데. 그러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경전이고 어느 부분이 경전을 객관적으로 언급한 내용인가? 과연 그렇게 나뉠 수 있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의문은 불경(佛經)이 성립된 역사적인 배경이 성경이나 논어 등 여타 경전류의 성립배경과는 다르
제13 여법수지분 초반에 이 경(經) 혹은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할 지 묻는 부분이 나온다. 즉, “세존이시여! 이 경을 어떻게 이름 해야 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옵니까?”라고 물으니 부처님께서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러한 이름으로 네가 받들어 지녀야하느니라”라고 답했다. ‘금강(金剛)'은 범어 와즈라(vajra)에서 온 말로서, 선・악의 신들이 전쟁을 하는 와중에 힘을 잃은 선신들을 위해 선인 다디찌가 자신의 유체(遺體, 스스로 자신을 화장하여 만든 재)를 제공하여 만들어진 세상에서 가장 단단
제12 존중정교분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지금 일러준 이 경전 전체나 심지어 그 가운데 사구게송 한 수 만이라도 잘 익혀서 남에게 설해주기만 한다면 가르침이 설해진 그곳은 온갖 무리들이 마치 부처님 공양하듯 모두 공양하는 탑묘(塔廟)와 같을 것이라 하셨다.탑이 있는 사당이란 의미의 '탑묘'는 ‘금강경’에선 범어 짜이뜨야(caitya)에 대한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어이다. 현장 스님은 영묘(靈廟, 신령을 모신 사당)라고 번역하였다. 본디 범어 ‘짜이뜨야’는 성인의 유체가 묻힌 묘소를 비롯하여 그 분의 유품이나 가르침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