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정-총무원장 갈등 원인…양측 공방으로 폭력·유혈 난무청사는 불타고 사상자 다수 발생…공권력에 의해 겨우 진정 1998년 조계종 분규로 화염에 휩싸인 조계종 총무원 청사. 1998년은 김영삼 정권의 경제정책 실패로 말미암아 IMF로부터 구제금융 지원을 받아 주가지수는 300대로 추락하고, 각 기업과 공무원들은 인원 감축 사태를 맞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불교계 또한 정화개혁회의라는 세력이 등장하여 1994년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의가 중심이 되어 사부대중이 참여하여 민주화를 실현하였던 개혁을 역행하는 분규를 겪게 된다.사태의 발단은 1994년 서의현의 3선을 저지하기 위하여 개최되었던 전국승려대회 결과 개혁회의가 출범하고 새로운 종단의 총무원장으로 취임하여 4년의 임기
1994년 4월 13일 승려와 신도들이 종단 비상사태를 타계하기 위해 조계사에서 개최한 범불교도대회. 사진제공=민족사 서의현 총무원장의 독선적 3선 개헌이 발단수행승·학승 주축, 개헌저지 범종추 결성잇단 승려대회-범불교대회로 서의현 압박노부호·박광서·남지심 등 재가지도자 참여새 비전 제시 못하고 제도 개혁에만 그쳐 1994년 대한불교 조계종은 큰 내홍을 겪게 된다. 사태 발단의 원인은 당시 서의현 총무원장이 장기 집권을 획책하였기 때문이다. 1988년 5월에 개정된 종헌에 따르면 “총무원장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중임할 수 있다”라고 되어있었다. 서의현은 중임이란 거듭할 수 있다는 뜻이며, 구체적으로 횟수가 명시되지 않은 점을 들어 3선을 강행하였다. 총무원장은 중
한국불교전서. 사진제공=동국대출판부 일제시대 불교학자들 첫 시도 1970년대 종립 동국대서 착수본서 10권, 보유 4권 등 완간 삼국서 한말까지 288종 수록2004년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2007년부터 한글 작업 진행 불교가 한국에 전해진 지 1,600여년이 지났다. 그간에 참으로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고. 또 수 많은 저술들이 발간되었다. 이 저술들은 한문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승대덕들의 사상이 담긴 이 귀중한 저술들은 잦은 전쟁을 겪으면서 많이 유실되었고, 또 일본, 프랑스, 영국 등 해외로 반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료가 민간이나 도서관 등에 흩어진 채로 보관된다면 화재나 홍수를 만나 책이 불타거나 못 쓰게 될 때까지 또는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 전종훈 신부 등 세 성직자들은 끄흥, 헉, 아흑 소리를 내며 교만과 독선 그리고 오만을 계속 뱉어내고 있었다. 이 자리에 계신 이 자리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희망입니다.나를 낮추어 세상을 밝게 하겠습니다.순례단의 참뜻과 깨달음 실천에 눈물이 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몰랐다. 누구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사람의 길과 생명의 길 그리고 평화의 길. 본래의 순리를 찾고자 길을 나선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 등 오체투지 순례자들이 53일간의 순례를 갈무리하기 전날 밤. 천지가 진동했다. 하늘이 그렇게도 울었다.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 생명의 방울방울들이 다시 땅으로 돌아왔다. 다시 새 생명을 내는 산고의 고통이었다. 생명의 순환이었다. 태고부터 있었
95년 中 북경서 첫 공동 봉축 발원문 발표2005년 금강산 신계사 복원으로 신뢰 구축 묘향산 보현사에서 개최된 남북한 불교도합동법회 기념사진. 우리가 북한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북한은 이미 60년이 넘는 세월을 버티어 온 유엔에 가입한 실존 국가이다. 북한이 1950년 도발한 6·25전쟁으로 10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학살되었으며 지금도 북한에는 우리의 부모와 형제·자매가 이산가족으로 살고 있다. 이같이 처참한 상황이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데에는 누구나 동의하며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평화통일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지만 뚜렷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남한과 북한은 이념과 체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은 일
조계종 본사·종회 요직 비구승 독식불교 정화·개혁 때마다 말없이 앞장02년 비구니회관 완공…주역 발돋움부당한 대우 여전…총림 건립이 과제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여성들의 위상과 역할은 크게 강화되었다.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여성 대통령과 수상이 나와서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나라도 여성 장관과 국회의원, 대학 교수 등 각종 전문직 사회에서 여성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날로 늘어가는 추세이다. 그런데 종교계만은 예외이다. 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그리고 이슬람교 경우도 여성 지도자는 극히 드물다. 그것은 불경과 성경, 코란에 모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여성을 경시하는 까닭은 창시 기원이 모두 고대 농경사회에서 발생하였기
1986년 해인사에서 개최된 전국승려대회. 2000여명이 운집한 이 대회에서 10·27법난 해명, 불교 관련 악법 철폐 등 불교계의 자주화를 선언하였다. 86년 해인사에 2000여 승려 운집…10개항 결의불교 관련 악법 철폐-10·27법난 진상 규명 요구혈서 쓰고 일주문 밖 가두시위…각계의 성원 쇄도불교계 민중 운동 심화…종단 지도부 배신은 ‘흠’ 해인사 승려대회에 참석한 스님들이 혈서를 쓰며 불교자주화 결의를 다지고 있다.(왼쪽) 1986년 9월 7일 해인사에서 개최된 전국승려대회는 현대 한국불교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이 대회에서 논의되고 결의된 사항은 종래 정치권에 예속된 듯 한 인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불교계가 자주화를 선언하였다는 데
1989년 10월 27일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서 개최된 10·27법난 진상규명을 위한 실천대회. 사진제공=민족사 80년 조계종총무원을 비롯 전국사찰 군화로 짓밟아고문으로 없는 비리 조작…죄없는 스님들 감옥 보내교계, 6월 항쟁 이후 진상 촉구…민중 불교운동 계기 1980년 10월 27일 새벽 4시를 기해서 계엄군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을 비롯해서 전국의 사찰을 일제히 수색하였다. 그들은 군화를 신은 채 법당을 유린하고 승려들을 연행하였다. 다음날 신문 지상을 통하여 발표한 명분은 대공 용의자와 사회정화 차원에서 비리·범법자 승려를 검거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군부는 ‘45계획’이라고 명명하였고, 불교계에서는 10·27법난이라고 규정하고 이후 지속적으로 정부
1977년 신문에 실린 이서옹 종정의 중앙종회 해산 발표 장면. 사진제공=민족사 종정-총무원장 중심제 힘 대결…결국 소송으로 얼룩져교세 위축과 승려자질 저하로 분열…10·27법난 빌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대처승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담화 발표를 계기로 시작된 이른바 ‘정화운동’은 1970년 1월 대처승 측에서 태고종을 창종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조계종은 이 분쟁을 ‘정화운동’ 또는 ‘정화불사’라고 부르며, 오늘날 조계종이 한국 불교 최대 종단의 모습을 갖추게 된 계기가 된 것으로 파악한다. 반면에 태고종 측은 2006년에 발간한 『태고종사』에서 이 사태를 법난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법난의 성격은 이승만 정권이 일본 불교 잔재 청산한다는 미명 아래 비구 승단
1945년 미군정 종교계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날을 공휴일로 지정교계, 통합종단 출범 이후 줄기차게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지정 촉구1973년 용태영 변호사 독자 소송…목숨 걸고 박정희 결단 이끌어 내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지정됐다는 ‘대한불교’ 기사와 경축 강연회. 사진제공=민족사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소송 공판을 마치고 조계사를 참배한 불자들의 기념사진. ‘부처님오신날’은 1975년부터 공휴일로 제정되어 불교도들은 사찰을 찾아 등을 밝히고,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불법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다.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제정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며 해방 후 30년 세월이 걸려서 이루어 낸 쾌거였다. 크리스마스는
한글 대장경 발간 편집회의 장면. 사진제공=민족사 1964년 동국대학교 부설 동국역경원 설립정부·조계종·동국대 함께 참여한 대 역사1971년 이탈리아의 밀라노 전시회에 출품통불교적 관점으로 펴낸 ‘불교성전’ 인기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불경은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되어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1세기 중반인 후한 초기에 불경이 한역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4세기 경이고,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경전은 한문으로 되어 있었다. 한문으로 된 불경은 지식인이 아니면 아무나 쉽게 읽을 수는 없었다. 불교가 나의 실체를 깨닫는 종교라고 한다면 그 깨달음을 알기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1967년 2월 6일 중국 음식점 아서원에서 가진 비구·대처측과 정부 관계자들의 화동회합 장면. 사진제공=민족사 비구-대처측 화동위원회 구성해 화해와 협력 시도1965년 6월 대처측 승소…해빙무드에 결정적 찬물1967년 대처측 전국 사찰주지 대회 통해 분종 결의 정부 개입된 불완전 정화…“상처뿐인 영광” 평가 ‘정화운동’은 힘으로 절을 뺏고, 뺏기는 물리적인 충돌기를 지나 정통성 시비를 가리는 법정 공방기를 거치면서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달았다. 승려들도 세속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따가움을 느꼈고, 승단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비구·대처측 모두가 화해를 위한 대화의 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195
법정 공방 끝정부에 의해통합종단 출범 대법원 앞에 운집해 결의문을 낭독하는 비구승과 신도들 모습. 1960년 11월 대처측이 승소하자 비구측은 대법원 판결에 불복하고 청사로 진입하였으며, 그 가운데 6명의 승려가 할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진제공=민족사 ‘정화운동’은 1955년 8월 4일 ‘왜색승려는 물러가라’는 이승만의 제7차 담화 발표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비구승들은 8월 12일 조계사에서 문교·내무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종헌을 개정하고, 설석우를 종정으로 추대한다. 당시 종정은 송만암이었으나 비구측에서 대처측과 차별성을 가지기 위해서 보조종조설을 주장하자 이러한 처사를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비난하면서 사퇴했다. 그러자 비구측은 종정마
“대처승은 모두 친일파” 일방적 매도로 토론 통한 합리적 해결 무산1955년 승려대회 기점 비구승 종권 장악…지리한 법정 공방 이어져 1954년 9월 27일 선학원에서 개최된 전국비구승대회. 이날 비구승 중심의 교단을 지향하는 종헌을 제정하여 선포하였다. 사진제공=민족사 ‘정화운동’은 그 성패 여부를 떠나서 일제시대 정법을 수호하고 계율을 지키고자 하였던 비구승들이 해방 이후 한국 불교의 정통성 회복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비구승들은 해방 이후 자체적으로 정법을 수호하고 정통성을 천명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고 있었다. 백양사를 중심으로 한 고불총림 결성과 봉암사를 거점으로 한 봉암사결사 등은 그 좋은 예이다. 그런데 ‘정화운동’의 발발은 역설적이게도 독실한 감리교 신자
조계종총무원 발간 『한국전쟁과 불교문화재』에 실린 6.25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봉선사 해탈문. 전쟁은 수많은 무고한 인명의 살상이 따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무수한 전쟁이 있어왔다. 우리 민족이 가장 최근에 경험한 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이다. 불교계는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찰과 문화재를 소실 당하였으며, 많은 승려들이 피살되거나 납북되는 비운을 겪었다. 당시 사찰은 대부분 산 속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빨치산들이 자주 출몰하여 사찰을 습격하였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한 군과 경찰은 정도에 지나치는 사전조치를 취하였다. 그 과정에서 빨치산과 남한의 군경
불교계 대책위원회 결성…이승만 담화로 45% 농지 회수농지 대신 사업체 불하…경험미숙과 분규로 대부분 상실 1965년 「대한불교」에 게재된 농지개혁 후 불교계 재산이 줄어들고 있음을 전하는 보도 기사 사진제공=민족사 어떤 종교 단체든지 교단을 유지하고,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물적기반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불교계의 경제적 기반은 농지에 있었다. 일제시대에 사찰의 재산은 사찰령에 재산을 매각할 때는 사전에 관청의 허가를 받게 되어 있어서 매매가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사찰은 많은 농지를 보유하는 대지주였다. 해방이 되고 나서 농지개혁이 진행될 때 좌우익의 갈등으로 우선적으로 귀속농지만 유상몰수·유상분배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북한의 경우 1946년 3월 농지개혁의
고불총림이 결성되었던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양사의 전경. 대한불교 조계종의 연원은 1941년에 성립된 조선불교 조계종에서 찾을 수 있지만 실질적인 출발은 해방 이후 1954년 이승만의 담화로 시작된 이른바 정화불사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일제시대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승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해방 직후에는 전체 승려 가운데 90%가 넘는 승려들이 대처승이었다. 잘 알려진대로 정화불사는 대처 승단으로부터 비구 승단이 정통성을 확보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내면을 살펴보면 폭력과 법정 소송으로 얼룩져있으며 자비를 중시하는 불교다운 면모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해결이 아닌 불법에 의지한 평화적인 해결 방법은 없었을까.
봉암사 결사의 역사적 장소인 문경 봉암사의 현재 모습. 해방 직후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통일 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좌우익의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불교계 사정 또한 비슷하였지만 그 양상은 조금 달랐다. 해방 직후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생겨난 대처승과 비구승의 갈등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비구승 중심의 승단 건립이 중요한 과제였지만 당시 비구승의 비율은 전체 승려 가운데 5%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전국의 주요 사찰은 모두 대처승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면한 최대 과제는 일본 불교의 유습을 청산하고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일본 불교의 유습을 청
軍牧 기독교 독점…“그리스도 정신으로 건국”망언일제잔재 사찰령 유지…기독교에만 각종 혜택 부여 1945년 11월 이승만이 중국에서 귀국한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미군정 점령군 사령관 하지에게 소개하는 장면. 『이승만의 삶과 꿈』(1996. 유영익)에 사진수록. 우리나라는 해방과 더불어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지 못하고 3년이라는 미군정 시기를 거치게 된다.1945년 9월 일본 오키나와(沖繩)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인천을 통하여 상륙하였고, 시민들은 미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였다. 미군이 진주한 시점부터 제1공화국이 탄생하는 시점까지를 해방공간이라고 부른다. 미국은 잘 알려진 것처럼 영국에서 건너 온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이다. 이 기간 동안에 기독교 우선 정책이 시행되었
사찰령 등 악법 철폐 실패로 불교청년단 등 혁신 세력 등장급진적 개혁으로 우익과 대립 불교청년당 인사들이 통도사 무풍교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 두 번째가 불교청년당 선전부장을 지냈던 통도사 출신 임정달로 법명은 화산이다. 사진제공=민족사 우리나라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의해 신탁통치안이 가결되자 좌익과 우익이 신탁통치 수용 여부를 놓고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져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처음에는 좌익과 우익이 모두 반대를 주장하였으나 소련의 지령을 받은 좌익계열은 곧 찬성 쪽으로 선회하였다. 그러나 신탁통치 결정은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우리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찬성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