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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분별없는 윤리학, 차별 없는 존재론-중

탐진의 감정이 어이없는 무지를 낳는다

▲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 고윤숙 화가

간택하지 말고 분별하지 말라는 말은 사실 동물인 우리로서는 정말 가능할까 싶을 만큼 어려운 일이다. 제 자리에 선 채 태양과 물만 있으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식물과 달리 동물은 그런 능력이 없기에 먹이를 찾아 돌아다녀야 한다. 뇌는 그렇게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기 위해, 혹은 적들의 먹이가 되는 상황을 면하기 위해 탄생한 기관이다.

무의식적 반응은 간택의 자연학적 과정
사태 빨리 해결하지만 올바른 대처 못해
문제보다 분별 의한 뒷담화가 더 치명적

뇌가 해야 할 일 중 가장 일차적인 것은 이동하다가 만난 상대에 대해 덤벼들어야 할지 도망쳐야 할지, 그냥 있어도 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걸 잘못 판단하면, 어느새 죽고 만다. 만난 상대가 내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이와 관련되어 있다. 만난 상대가 누구인지 세세히 파악하는 것은 이차적이다. 핵심은 상대가 내가 만나게 되어 기뻐할 대상인지, 슬퍼하고 두려워할 대상인지를 최대한 빨리 판단하는 것이다. 감정이란 신경신호들이 수많은 뉴런들을 통과하며 정확한 판단을 하다간 죽기 십상인 시급한 상황에 대처하고자, 간단한 특징만으로 재빨리 판단해 행동하게 하는 증폭장치다. 그래서 감정이 일어나면 신체 전체가 크게 변한다. 신체 전체에 퍼진 신경망에 증폭된 신호가 빠르게 퍼져가고 근육은 얼른 움직일 수 있도록 긴장되기 때문이다.

이는 동물의 생존을 위해 진화된 신체적이고 무의식적인 반응이다. 바로 이것이 분별이나 간택의 자연학적 과정이다. 긴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진화된 능력이지만, 일단 신체에 자리잡은 이후엔 급하든 그렇지 않든 모든 판단에 작용하고 끼어든다. 이로 인해 어떤 대상에 대한 분별은 대개 단순한 ‘구별’이 아니라 호오의 평가를 포함하며,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 감정이 동반된다. 감정이 동반되기에 분별은 대뇌 신피질에서 사고가 진행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강하게 증폭된 신호를 신체에 보낸다. 그렇기에 감정이 일면 눈앞의 사태를 정확히 보기 어렵고, 들리는 얘기도 듣기 어렵다. 생각보다 먼저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 사태에 빠르게 반응하게 되지만,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태에 대해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욱 불행한 것은 감정적인 언행은 상대방의 감정적인 반응을 낳게 마련이란 점이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일인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화난 감정의 표현으로 접수될 뿐이다. 그건 필경 화난 감정, 화난 행동을 유발한다. 적어도 나에 관한 한 감정적으로 판단하여 한 행동 치고 후회하지 않은 것이 없고, 감정이 일어난 상태에서 한 생각 치고 어리석지 않은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도망치는 것 같은 동물적 감정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감정이 일어났으면 일어난 줄을 얼른 알아채고자 하고, 그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을 내 행동의 준칙으로 삼고 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을, 즉 분별을 하지 않으면 될 뿐”이라는 말 바로 뒤에 3조가 “애증을 떠나기만 하면, 사태가 통연명백하리라”고 썼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애증은 감정이다. 애증의 감정이 일어났다면, 그때 한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뇌의 신경신호보다 빨리 달려온 감정의 메시지고, 그때 하려는 행동은 생각보다 빨리 달려온 감정의 충동질이다. 그러니 사태가 정확히 보일 리 없다. 사태가 제대로 안 보이는데 지혜가 발동될 리 없다. 탐진의 감정이 사고의 속도보다 빨리 어이없는 무지를 낳는 것이다. 이것이 분별하지 말라는 말이 갖는 인식론적 의미라 하겠다.

이는 윤리적 의미로, 다시 말해 실천의 철학으로 곧장 이어진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 그렇기에 남들에 대해 판단하게 되고, 그 판단에는 필경 저 동물적인 분별능력이 끼어든다. 이는 그 ‘남’들이 정말 남들일 뿐이어서 큰 관심 없이 지낼 수 있는 관계라면 별 문제가 없다. 내 분별이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으니 분별 또한 잘 하지 않게 된다. 문제는 가까운 사람들이다. 다시 보지 않을 수 없고, 영향을 크게 받기에 하나하나의 언행에 대해 호오의 판단이나 애증의 감정을 갖고 분별한다.

그 동안 나는 꽤나 오랫동안 공동체를 만들어 공부하고 활동해왔다. 만들기도 여러 번 만들었고, 깨지기도 여러 번 깨졌다. 만드는 경험은 즐겁지만, 깨지는 경험은 고통스럽다. 나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고통스러웠을 게다. 그런데 돌아보면 깨지거나 분열된 경험은 모두 분별심과 관련되어 있었다. 분별하는 행위는 해체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라 해도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수유+너머’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뒤에도 공동체가 깨진 경험을 두 번 반복했는데, 그것 또한 모두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의 회원들에 대해 ‘이 사람은 어떻고 저 사람은 어떻고’ 하는 분별행위들 때문이었다는 생각이다. 공동체를 주도하고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일수록 분별심을 갖기 쉽다. 자신이 열심히 하기에 열심히 하지 않는 이들이 눈에 걸리기 마련이고, 공동체가 잘 되길 바라기 때문에 열심히 하지 않거나 ‘문제가 있는’ 이들이 눈 밖에 나기 십상이다. 열의의 소산이니 그게 문제라고 느끼기도 어렵다. 게다가 이런 분별심이 일어나면 그 얘기를 필경 다른 이들에게 하게 마련이다. 흔히 ‘뒷담화’라고 하는 이런 얘기들에 함축된 실질적 의미는, 그걸 듣는 이들에게 ‘이 사람 나쁘니 이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는 명령어다. 굳이 그걸 분명하게 말하지 않지만, 그 얘기를 들은 사람이 나쁜 평을 듣는 이에 대해 좋은 생각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별 생각 없었던 이들도, ‘아 저 사람’ 하며 거리를 두게 된다. 분별은 평판이 되고 소문으로 퍼져간다. 그러면 그 사람 역시 그 거리나 감정 섞인 분별심을 어느새 알아챈다. 자신이 잘못한 걸 심지어 잘 안다 해도, 당연히 감정적 반감이 어찌 안 일어날 것인가? 그러면 그 역시 뒤에서 자기 얘기를 하는 이들은 물론, 그 얘길 듣고 거리를 두는 이들과 잘 지내기 힘들어진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 사이에 거리가 만들어지고 감정의 골들이 패이게 되면, 공동체는 이제 그 골을 따라 깨지거나 분열되는 길로 밀려간다. 그게 아니면 서로 불편하니 안 나오게 되면서 공동체가 공동화되어 간다. 활력은 사라지고 생기 없고 텅 빈 공동체가 된다. 결국 공동체는 깨지거나 분열되게 된다.

나는 다른 회원들에 대해 하던 이런저런 뒷담화가 대부분 이유 있는 얘기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분별하고 뒷담화를 하는 사람이 공동체에 대해 애정을 갖고 공동체를 걱정해서 하는 얘기라는 것도 전적으로 믿는다. 그런데 그게 모두 사실이라 해도, 그들이 분별하고 뒷담화를 한 결과는 공동체 성원들이 함께 지내고 활력있게 살아가는 것에 치명적인 독이 된다. 문제가 있는 사람을 그냥 둔다면 그 사람이 공동체에 기여하는 바가 적은 걸로 끝나겠지만, 그에 대해 분별하여 사람들 사이에 감정의 골이 패이면 공동체가 해체되거나 불편한 공동체가 되어, 결국 공동체를 죽음(해체!)에 이르게 한다. 공동체 자체의 해체나 분열이라는 귀착점에 비추어보면 애초에 문제가 된 사람이 야기한 무익(無益)이나 해악은 정말 사소한 것 아닐까?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09호 / 2017년 9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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