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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탑 속에 모신 부처님

기자명 정진희

부처님 입멸 이후 성스러운 구조물로 변모

▲ 1919년 익산미륵사지 석탑, 조선고적도보.

백제 미륵사는 서동요의 주인공이었던 무왕(600~641) 때 만들어진 절로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다. 이 절 금당 앞에는 동서로 세워진 2개의 석탑과 그 사이 목탑이 하나 있었는데 15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가면서 목탑과 동편의 탑은 무너져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서편의 탑은 반파된 상태로 힘겹게 세월을 지탱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된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은 639년 만들어졌는데 일반적으로 나무로 탑을 세우는 것이 돌로 탑을 쌓은 것보다 시대가 앞서기 때문에 초기의 석탑은 나무 탑과 같은 모양을 따르고 있어 미륵사지 석탑도 나무 탑의 형태를 본떠 만들었다. 이 탑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지붕의 곡선은 마치 나무를 깎아 놓은 듯 부드럽고 유연해 석탑을 만든 백제 석공의 뛰어난 기량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기나긴 세월의 풍파를 보여주듯 탑의 부재들이 여기저기 빠져나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던 서 탑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콘크리트가 덧씌워지는 무지막지한 보수가 있었고 그 흉한 모습으로 또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이후 탑의 안전을 위해 2001년 10월부터 이루어진 해체보수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 과정 중 탑의 1층 심주석(心柱石)에 있는 사리를 넣어두는 사리공(舍利孔)속에서 사리장엄구와 사리봉영기를 비롯한 백제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석가모니 육신서 나온 사리들
일곱 부족에 배분돼 탑에 봉안
이후 아소카왕 8만4000탑 세워
불탑 숭배·부처님 숭배 동일시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신 후 육신을 다비하여 나온 사리는 쿠시나가라의 말라를 비롯하여 일곱 부족에 배분되어 탑(stupa)을 만들어 사리를 모셨는데 이를 근본팔탑이라고 한다. 이후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쇼카왕에 의해 8기의 석탑 속에 있던 사리는 다시 인도 여러 지역으로 분배되어 8만4000기의 탑을 세우게 된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이전 인도의 전통적인 무덤이었던 스투파는 이후 성스러운 구조물로 변모하였고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의미를 담게 되어 탑을 쌓는 것은 공덕을 쌓는 것이요 불탑을 숭배하는 것은 부처님을 숭배하는 것과 동일시되었다. 따라서 부처님의 사리는 탑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요건이며 사리의 봉안은 탑이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에 탑 속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들어 있어야 원리에 맞다.

▲ 미륵사지 석탑 사리공 내부.

하지만 부처님 입멸 이후 삼천대천세계를 이익 되게 할 만큼 많은 사리가 나왔다 해도 모든 탑 속에 다 봉안되는 것은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를 대신하여 탑 속에 넣을 대용품을 찾게 되었고 부처님의 말씀을 새긴 경전을 법신사리라 하고 작은 구슬이나 반짝이는 광물질 등을 넣어 변신사리라 부르며 이것들을 탑의 중심에 넣어 탑을 쌓게 된다. 더불어 우리나라 황복사지 탑이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수종사 오층석탑처럼 아예 불상을 만들어 봉안한 예도 있는데 이는 부처 속에 부처가 있는 독특한 구성방식을 보여준다.

▲ 금동제 사리 외호와 그 내부. 익산 미륵사지 석탑.

‘금광명경’에 의하면 사리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닦아 익혀야만 생겨나기 때문에 매우 만나기 어려운 가장 으뜸가는 복밭(福田)이라서 7보로 만든 함에 넣어 탑 속에 모신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공 내부는 바닥에 유리판을 깔고 그 위에 청동합을 6개 넣고 그 사이를 일명 변신사리라고 부르는 금과 유리로 만든 구슬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위 금동으로 만든 외호 속에 푸른 구슬을 채우고 다시 순금으로 제작된 내호를 넣고 그 속에 또 구슬이 들어 있는 유리로 만든 사리병을 넣었다. 지금은 흔하디흔한 유리는 당시 7세기 전반에는 최고의 기술을 요하는 귀하디귀한 보석과 같은 것이었다. 중국의 ‘삼국지’를 보면 구슬은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하지만 금과 은은 보배로 여기지 않았고 우리나라 삼한시대에도 금은 장신구로 그리 선호되지 않았다. 그래서 옛날 그 옛날의 유리는 금과 은보다 귀한 것이었기에 부처님의 사리를 대신하는 임무를 띠고 탑 속에 모셔지고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 유리제품은 신라의 무덤에서 나온 것처럼 외국에서 수입된 것도 많이 있지만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에 출토된 구슬들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들이다. 거의 대부분의 탑 중심에 있는 사리공은 부처님을 의미하는 귀한 보물들을 모시는 공간이기도 하였지만 이를 탐내는 도굴범들의 표적이 되었기에 탑이 훼손되는 원인이기도 하니 세상일은 참 아이러니하다.

▲ 익산 미륵사지 석탑 출토 금제 족집게, 폭 0.8㎝, 길이 5㎝.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장엄구 가운데는 금으로 만든 족집게가 있다. 사리공 속에 귀한 보석들과 함께 족집게를 넣은 까닭을 학계에서는 구슬을 담기 위한 용구로 사용한 후 같이 봉안한 것이라 보기도 하고 황룡사의 목탑이 있던 터에서 사악한 기운을 막는다는 의미로 가위와 칼, 거울 등이 발굴된 것처럼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필자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부처님을 모신 공간에 사악한 기운이 범접을 할 가능성은 없을 듯싶어 혹시 번뇌를 가위로 싹둑 잘라내고 족집게로 꼭 집어 뽑아내라는 고집멸도를 이루는 방편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 번에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없다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고통을 한 가닥, 한 가닥씩 매일 매일 뿌리 채 뽑아버리는 성실함만 있다면 범부인 우리도 언젠가는 도를 이루는 그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정진희 문화재청 감정위원 jini5448@hanmail.net
 


[1409호 / 2017년 9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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