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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짜불상을 진품으로 속인 불상사기 사건

기자명 이숙희

경제적 이익 추구할 투자 수단 인식에 급증

1970년대 이후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불상의 위작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는 불상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게 되면 될수록 구입하고자 하는 다양한 계층의 수요자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예스럽고 희귀한 불상은 구하기가 어려워지고 가격은 높아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위작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가 된다.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면, 가짜불상을 진품으로 속여 팔려다 덜미가 잡힌 사건들이 종종 눈에 띈다. 

몰래 판매하려던 신라 금동불
일제 제작 모조품으로 판명 등
가짜를 진품으로 파는 일 증가

2015년 매물 금동반가사유상
200억대 사기사건으로 드러나

위작기술은 날로 정교해질 것
대표적 위작들에 대한 조사와
분석 통해 체계적 정리할 때
진품 감정 위한 기준안 마련

 
1973년 8월 골동품 상인에 의해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가 1년 만에 되돌아온 불상이 있다. 이 금동불상은 높이 18cm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일제강점기 간행, p.5615)에 나오는 동조약사불입상과 제작기법이 동일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추정하였다. 당시 전문가들에 의해 국보급의 불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때는 국내 장인이 만든 모조품이라는 설이 나돌았다. 불상의 위작설은 출처가 모호하고 불상에 전혀 손상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불상을 수리한 자가 나타나 “5년 전에 누군가가 불신을 가지고 와서 부탁하기에 3년 걸려 보수하였는데 불상의 광배와 대좌 뿐 아니라 불신 자체에도 많이 긁혀 있었다. 불상의 얼굴에 손을 댔고 재래식 방법으로 도금을 새로 했으며 인공적으로 녹을 입혔다”고 밝힌 것이다. 그간 진위여부를 둘러싸고 다툼을 벌여온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은 우여곡절 끝에 진품으로 밝혀졌다. 금동불상 2구 중 1구는 돌아왔으나 나머지 1구는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기억에 남는 황당한 사건으로는 1976년 7월 청양 장곡사에 있는 국보 제58호 통일신라시대의 철조약사불좌상을 모조불상으로 바꿔치기 하려고 대웅전 자물쇠를 부수고 침입하였으나 불상의 중량이 무거워 훔쳐내지 못하고 검거되었던 일이다. 1m에 가까운 크기의 무거운 철조불상을 아무런 도구도 없이 가져가려 했다니 그 무모함을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1983년 12월에는 6억원 상당으로 추정되는 신라시대의 금동불상을 몰래 판매하려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붙잡힌 사건이 있었다. 높이 70cm, 둘레 30cm로 왼손에 작은 약합을 받쳐들고 있는 약사불상인데 감정결과,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동불상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없는 모조품으로 밝혀졌다. 그러다가 1992년 한중수교가 되면서 중국을 통해 북한 유물과 모조품 등이 대량 유입되면서 위작의 폐해는 더욱 커지게 되었으며 가짜 불상을 담보로 돈을 빌려 쓰는 사기사건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1994년 6월 골동품 중개업자 이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재일교포 서모 여인을 찾아가 시가 40만원의 가짜 불상을 8억여 원 상당의 통일신라시대 진품으로 속이고 이를 담보로 6억 1천만여원을 받아 가로챈 사기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런 일들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불상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대상으로 많이 제작되었던 최고의 위작은 단연 반가사유상이다. 반가사유상은 석가가 인도 정반대왕의 태자였을 때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던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2∼3세기경 간다라와 마투라 불상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여 점차 단독상으로 발전한 형식이다. 중국의 경우는 남북조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5세기 후반의 북위부터 6세기 후반의 북제까지 많이 제작되었다. 특히 북제와 동위의 반가사유상 중에는 ‘태자상(太子像)’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 ‘사유불(思惟佛)’ ‘심유불(心惟佛)’ 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예들이 다수 있다. 반가사유상의 존명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일본 오사카 야쭈지[野中寺] 목조반가사유상(666년) 밑면에 “미륵어상야(彌勒御像也)”라는 명문이 있어 이를 근거로 미륵보살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인 6세기 후반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초기까지 많은 반가사유상이 금동 또는 돌로 만들어졌다. 신라에서는 청년집단인 화랑을 미륵의 화신(化身)으로 모시는 사상이 있어 반가사유상을 흔히 미륵보살로 보고 있다. 특히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뛰어난 조형성과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일본에도 전해져 아스카, 하쿠호 시대에 교토 고류지[廣隆寺]와 나라 쥬구지[中宮寺]의 목조반가사유상과 같은 작품이 남아 있다. 이렇듯, 반가사유상은 사색에 잠긴 듯한 얼굴과 반가의 자세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부처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고 있어 동아시아 전지역에서 널리 신앙되었다. 

 

▲ 2015년 200억원대 사기사건에 등장한 금동반가사유상 위작. 동아일보 보도.

‘동아일보’(2015년 4월 21일자)에 경매에 나온 200억대의 금동반가사유상에 대한 진위여부로 기사화된 적이 있다. 사진상으로 보면, 금동반가사유상은 보관이나 관대장식, 양쪽 어깨를 덮은 천의 자락과 대좌를 덮은 옷주름 표현 등에서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얼굴이나 신체 표현에 삼국시대 특유의 양식이 없고 오똑하고 날카로운 이목구비에서는 오히려 현대적인 세련미가 엿보인다. 강렬한 금색을 띠고 있는 도금상태나 표면에 고색 처리한 푸른 녹도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인 요소가 강하다. 이런 종류의 반가사유상은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가진 불상인 만큼 높은 가격에 팔 수 있기에 위작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이처럼 불상의 위작들이 점차 전문적이면서 조직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 문화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진 점도 있지만 문화재를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투자의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가짜 불상을 사들이는 수요자와 공급자들 간의 거래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위작은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위작의 기술 또한 날로 정교해질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고풍스러운 불상을 만들고 푸른 녹도 화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똑같은 물질(합성수지)로 자연스럽게 만드는 단계까지 발전하였다.

지금도 불상의 위작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제는 진품 위주의 불상 외에 위작에 대한 기초적인 조사와 함께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진위여부로 논란이 되어온 대표적인 불상의 위작들을 조사, 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다면, 진작을 감정하기 위한 최소한의 모순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감정은 문화재의 진위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410호 / 2017년 10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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