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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윤혜승의 ‘홈통의 물소리’

기자명 신현득

절에서 밤새 들은 홈통의 물소리는
자연·생명·나라사랑 깨우치는 법문

절간 요사채에서 밤을 새워본 이는 누구나, 가라앉은 밤의 고요 속에서 부처님 법문을 느낀다. 그 적막 속을 비추는 달빛과 달빛 위에 뜨는 벌레의 울음, 밤새의 울음, 흐르는 바람소리,  물소리에서도 부처님 법문을 듣는다. 여기에 절간의 밤에 들리는 물소리 하나로 빚은 법문 같은 동시 한 편이 있다.

부모 따라 산사에 온 어린이가
밤새 홈통 흐르는 물소리 주목
적막을 비춘 달빛과 벌레 울음
물소리까지 모두 법문으로 들어

홈통의 물소리 / 윤혜승

법당에서 종이 웁니다.
불을 훅, 끄고는 눈을 감았습니다.
가물가물 종소리는 그쳤습니다.
장지문 밖 돌담 새로 찰찰찰찰, 물소리가 들립니다.
홈통에서 떨어져 넘치는 물소리입니다.
귀를 따라, 이 기나긴 밤을 꿈속에까지 쫓아옵니다.
찰찰 찰찰 찰찰….
귀를 기울이면 한결 줄기찹니다.
도무지 쫓아버릴 수 없는 소리입니다.
곤해지면 가물가물 멀어지는 것 같다가도 또 세차게 들려옵니다.
찰찰 찰찰 찰찰….
그것은 그릇 씻는 소리입니다.
접시와 쟁반과 사발, 그리고 종발들, 그것은 끼니때마다 밥상 위로 고사리와 도라지, 송이와 무슨 산나물들, 그리고 국과 밥을 이고 오르던 그릇들입니다.
그릇들은 자꾸만 씻깁니다.
이웃 방에 든 얼굴이 새하얀 소녀의 그릇도 씻깁니다.
서울서 왔다는 안경 쓴 선생님의 그릇도 씻깁니다.
갈비씨로 불리는 건넌방 장난꾸러기 대학생의 그릇도 익살맞게 씻깁니다.
또 언제나 잘 웃기만 하는 곁방의 할머니의 그릇도 씻깁니다.
그리고 삭발하신 스님의 그릇도 씻깁니다.
찰찰 찰찰 찰찰….
끊임없이 들려오는 물소리입니다.
절간이 지어진 날부터, 스님이 드신 날부터 찰찰 찰찰 흘러넘치는 물소리입니다.
장지문, 살과 살 사이가 희부연히 밝아오기에 두르르 문을 열었습니다.
홈통 곁에서는 어린 스님이 무같이 하이얀 팔을 걷어 올리고는 하이얀 그릇들을 찰찰 찰찰, 씻고 있습니다.
  
산문시로 된 동시 ‘홈통의 물소리’의 캐릭터는, 부모를 따라 산사에 온 어린이다. 이 여름을 이 산사에서 보내면서 부처님 참배도 하고 스님의 법문도 듣고, 방학숙제도 하고, 자연 관찰을 할 작정으로 와서 요사 한 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날 밤, 이 꼬마 캐릭터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장지문 곁 홈통에서 흐르는 물은 절간에서 솟는 샘물이다. 그것이 소리를 내면서 물받이 수조로 흐르고 있다. “찰찰 찰찰 찰찰….”

한결 같은 홈통의 물소리는 한 가지 소리뿐인 언어다. 그것은 그릇을 씻는 소리다. 홈통을 흘러내린 줄기찬 물이 그릇을 씻고 있다. 접시와 쟁반과 사발, 종발이 씻기고 있다. 그릇이 씻기면서 소리를 낸다. 깨끗이 씻겨야지 한다. 고사리·도라지·송이와 산나물을 담아서 밥상에 올려야지 한다. 그러면서 요사에 든 여러 휴양객의 그릇이 홈통의 물소리에 같이 씻기고 있다. “찰찰 찰찰 찰찰….”

그 소리가 법문인 것 같다. 누구나 절간에 와서 하룻밤쯤 산의 자연 속에 묻혀보라는 말인 것 같다. 그러면 깨달음이 올 거라는 말씀 같다. 자연 사랑, 생명 사랑, 나라 사랑, 역사 사랑을 깨닫게 될 거라는 법문이다. 날이 밝아 문을 열고 나가보니 홈통 곁에서 또래의 사미스님이 하얀 팔을 걷어 올리고 홈통의 물소리 속에서 그릇을 씻고 있다. 이것도 법문 같다. 둘러보니 절간의 자연 모두가 법문이다!

지은이 윤혜승(尹惠昇, 1928~2000)은 대구에서 활동하던 시인으로 시집 ‘애가(哀歌)’(1958)와 동시집으로 ‘갈잎의 노래’(1968) 등을 남겼다. 1957년 대구아동문학회의 창립에 참여한 이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신현아동문학가·시인 shinhd7028@hanmail.net

[1410호 / 2017년 10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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