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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광엄과 도량

기자명 이제열

절만이 절이 아니라 중생과 세간이 절

“부처님은 광엄동자에게 이르셨다.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병을 위문하여라. 광엄동자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에게 가서 병을 위문할 수 없나이다. 왜냐하면 제가 과거에 비야리성으로 외출을 하였는데 그 때에 유마힐을 만났습니다. 제가 그에게 ‘거사님 어디에서 오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더니 그는 ‘도량으로부터 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또 묻기를 ‘도량이란 어느 곳을 말합니까?’ 하였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곧고 깊은 마음이 도량이며, 보시 지계 인욕 선정 자비 신통 다문이 도량이며, 다문삼십칠조도품 사성제 십이연기 무아 일체법 공 삼계 십력 사무애 십팔불공법 삼명 등이 모두 도량입니다. 이와 같이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바라밀로써 온갖 중생을 제도하면 발을 움직이고 손을 움직이는 것 모두가 도량에서 불법에 머무는 것이 됩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에게 가서 병을 물을 수 없습니다.”

절 머물러도 불법 아니면
그곳은 이미 절이 아니고
몸 비록 세간에 머물러도
법 있으면 그곳이 바로 절

광엄동자는 몸과 마음이 깨달음의 광명으로 장엄되어 있는 보살이다. 여기서 동자(童子)는 보살의 이명이다. 보살은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기 때문에 동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광엄동자가 유마거사에게 물은 내용은 유마거사가 자신을 만나기 전 어느 장소에 있었느냐는 것이다. 도량이란 알다시피 출가 수행자들이 머무르는 절을 말한다. 광엄동자는 유마거사의 이와 같은 대답에 절이라면 어느 절을 가리키는 것이냐고 되묻는다. 왜냐하면 머리 기른 속인이 절에 있다가 오는 길이라고 하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마거사는 절에 대한 정의를 광엄동자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한다. 절은 꼭 스님들이 머무르는 특정한 수행 공간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정의한다. 직심과 신심을 지니고 부처님이 설하신 사성제 삼법인 육바라밀 연기 무아 삼십칠조도품 선정 등과 같은 교법들을 잘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그 사람 자체가 절이 된다. 세속과 떨어진 특정한 공간이 절이 아니라 불법을 닦는 주체로서의 자신이 곧 절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절에 대한 정의는 ‘금강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금강경’을 보면 “이 말씀을 받아지니고 읽고 외우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면 그 곳이 곧 부처님의 탑을 모신 곳이라 하였고 부처님과 수행하는 제자들이 머무는 곳”이라 하였다. 대승의 가르침에서는 이렇게 수행처인 절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불이(不二)의 원리를 따른다. 이는 앞서 보적장자가 부처님께 부처의 나라는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물었을 때 중생의 국토가 곧 보살의 국토라고 답한 이치와 동일하다. 불이의 이치에서는 이곳과 저곳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바로 저곳이 된다. 어떤 사람이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심산유곡의 절에 머문다 할지라도 그의 몸과 마음이 불법과 어긋나 있다면 그 곳은 이미 절이 아니다. 반대로 몸은 비록 세간에 있으나 부처님의 교법을 잘 이해하고 바르게 실천한다면 그가 머무는 곳은 그대로 절이 된다. 특정한 장소로써의 절이 해야 할 일은 출가수행자들이 생활해야 할 공간의 개념을 넘어 사람이 곧 절임을 깨우쳐 주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불교의 역사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대승의 절에 대한 개념을 전혀 살려 놓았다고 할 수 없다. 절이라는 공간은 중생을 중심에 두고 있지 않고 스님들의 생활공간으로만 사용되어 왔다. 충청도의 모 사찰은 백제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도량이지만 막상 찾아가 보면 절의 기능은 찾으려 해야 찾기 어렵다. 중생과 세상을 향한 어떤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그 곳의 스님은 절을 지키는 절지기에 불과하다는 느낌만 받는다.

사실 한국불교에 이러한 절들이 어디 한 둘이가? 한국 불교의 절들은 거의 껍데기만 남아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바로 중생들을 도량의 주체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생과 세간이 절임을 깨우쳐 주지 않고 절만이 절이라고 여긴 까닭에 절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처럼 한국의 절이 절을 위한 절, 출가자 수행자들을 위한 절로만 남아 있다면 그 수명은 머지않았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411호 / 2017년 10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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