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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법의 이야기와 법의 역사

“역사는 생멸해도 법은 생멸 않는다”

편지 형식의 이번 글을 쓰게 까닭은 제가 옮긴 책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의 ‘나무아미타불’(도서출판 모과나무)에 대하여 일종의 에프터 서비스를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러한 ‘편지’는 모두 ‘나무아미타불’에 대한 일종의 주석이자 보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미타불 전신인 사문 법장은
특정한 개인 아닌 모두의 이름

‘법’은 초월적 이념·실재 아냐
대승이야말로 ‘법’ 잘 드러내 

우리 안에 내재된 법장 본다면
지금 이곳서 극락 누릴 수 있어

제 주위에서도 ‘나무아미타불’을 읽으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여쭈어 봅니다. “‘나무아미타불’에 많은 장(章)이 있는데 어떤 장이 가장 좋았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어떤 분은 ‘타력’이 좋다 하시고 또 어떤 분은 ‘서방’이 좋았다고 하십니다. ‘자력과 타력’이 제일 좋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저는 어떤 장이 가장 감동적이었을까요? ‘사문 법장’이라고 저는 늘 대답하고 있습니다. ‘사문 법장’은 제3장의 이름입니다. 1장은 ‘염불의 불교’이고 2장은 ‘삼부경’입니다. 1장에서는 일본불교사 안에서 염불의 불교가 어떤 위상을 차지해 왔는지를 밝힙니다. 어떻게 보면 일본불교사 개설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삼부경’이 이어지는데 거기서는 정토삼부경의 개요를 설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1장과 제2장은 모두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예비적인 서술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정도의 워밍업을 한 뒤 본격적으로 정토사상의 본질에 대하여 메스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주제가 거론되겠습니다만 제일 먼저 시급하게 거론해야 할 주제로서 ‘사문 법장’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 장이 차지하는 의미는 이 책의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각별한 바 있습니다. 

그 점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도대체 저는 어떤 점에서 ‘사문 법장’이 제일 좋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만약 제가 ‘사문 법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혹은 ‘나무아미타불’에 ‘사문 법장’이 없었다고 한다면 어쩌면 지금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편지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 ‘사문 법장’에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 정토에 대한 믿음을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 그런 정도라면 믿을 수 있겠다”고 말입니다. 제게 그런 기연(機緣)이 되어준 것이 바로 ‘사문 법장’이었습니다.

‘사문 법장’은 그 이름 그대로 아미타불의 전신이었던 법장(法藏)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시간적으로 말하면 10겁 이전에, 사문 법장 즉 법장 스님이라는 이름의 한 구도자가 부처가 됩니다. 그때까지 5겁이라는 긴 세월에 걸친 수행 끝에 이룬 쾌거입니다. 그 결과 모든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는 극락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극락은 서방에 있습니다. 지금도 아미타불은 그 극락세계에 계시면서 설법을 해주시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설해져 있는 경전이 ‘무량수경’이고 ‘아미타경’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은 믿을 수 있을까요? 현대인들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야나기 무네요시’는 출발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나름으로 모색해 갑니다. 그러한 법장의 이야기는 “창작이며 역사적 사실이 아니”(‘나무아미타불’ 92쪽)라는 점을, ‘야나기 무네요시’ 역시 현대인이므로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상식에 머무르지 말고 조금 더 깊게 파고들면 어떨까”라고 말합니다.

법장 이야기는 그야말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의미도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흔히 역사를 중시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헛된 것이고 역사는 참된 것이라 말하기 쉽습니다. 실제 현대인들은 흔히 그렇게 말하고 믿습니다.

하지만 야나기 무네요시는 그러한 관점을 전복(顚覆)합니다. 오히려 “역사는 변천하는 현상으로서 생사를 넘어설 수 없는 하찮은 일로 끝난다. 만일 변하지 않는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렇게 외면적으로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역사를 역사가 되도록 하는 것”(‘나미아미타불’ 92~93쪽)이라고 봅니다. 그 움직이지 않는 것이 ‘법’입니다.

역사는 생멸하지만 법은 생멸하지 않습니다. 법은 역사의 이면(裏面)에 있는 것입니다. 법이 없다면 역사는 역사다워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참된 것은 역사가 아니라 법입니다. 법이 있어서 비로소 역사는 역사가 됩니다. 정토부 경전의 이야기는 “외면적인 역사로는 꾸며진 것이라 하더라도 내면적인 법의 역사로서는 이보다 더 진실한 이야기는 없다. 역사는 흐르지만 이야기는 흐르지 않는다.”(‘나무아미타불’ 93쪽)

흐르지 않는 이야기는 바로 법의 이야기이고, 흐르는 역사는 바로 법이 그 안에 들어와서 역사를 역사답게 만들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말하는 ‘법’은, 그렇다고 해서 무슨 초월적인 이념이나 실재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법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다행히도 법은 그런 초월적인 실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 다 갖고 있는 것입니다.

“법장이라는 이름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다. 본래는 어느 누구든지 법장이라는 이름을 모두 가졌다. 어떤 이름을 가졌더라도, 그 이름 가운데는 법장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법장은 한 사람의 이름이지만 실은 모든 사람의 이름을 포섭한 것이고, 또 모든 이름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나무아미타불’ 94쪽)

그러므로 저는 ‘김호성 법장’이라 할 수 있고 여러분도 아무개라면 다만 아무개인 것이 아니라 ‘아무개 법장’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 법장이 들어와 있다고 한다면 “법장 이야기는 우리에게서 벗어난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다”(‘나무아미타불’ 94쪽)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점을 노래한 시 하나를 ‘야나기 무네요시’는 인용하고 있습니다. 어느 여성 불자의 시입니다.

“법장보살은 / 어디서 / 수행하실까 / 모두 나의 / 마음속에서 / 나무아미타불 / 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95쪽)

과거 10겁 이전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마음 속에서 법장보살이 수행하고 있습니다. 나와 법장보살은 이렇게 둘이 아닙니다. 이런 정도의 이야기라면, 어떻습니까? 그 주인공이 가공의 존재냐 아니냐? 이런 시비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닐까요.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런 이야기를 통하여, 정토삼부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이 갖고 있는 의미를 잘 변호하고 있습니다.

대승경전은 그것이 석가모니불의 설법이 아니라는 점에서 불설(佛說)이 아니라고 말해져 왔습니다. 그런데 ‘야나기 무네요시’에 따르면 그런 이야기는 결국 ‘외면적인 역사’에서 하는 말일 뿐, ‘내면적인 역사’를 놓치고 있는 관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면적인 법의 역사로 본다면, 오히려 대승경전이야말로 ‘법’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불설이야말로 적어도 우리가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 마음이라는 ‘법’을 떠나서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 이름 안에 ‘법장’이라는 이름이 들어와 있음을 보는 사람이라면,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극락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법장이야기를 하고, 극락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12호 / 2017년 10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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